우리 둘이 후생하여 너 나되고 나 너되어
내 너 그려 긏던 애를 너도 날 그려 긏여보면
이 생에 내 설워하던 줄을 너도 알까 하노라.
우리 둘이 후생하여 너 나되고 나 너되어
내 너 그려 긏던 애를 너도 날 그려 긏여보면
이 생에 내 설워하던 줄을 너도 알까 하노라.
비제가 그 끝내주는 오페라를 만들 기 전, 프로스페로 메리메의 원전이 있었다. 원전은 비제의 화려한 스페인식 오페라와는 다른, 관조자의 입장에서 사형수를 쳐다보면서 쓰는 일종의 녹취록에 가까운 풍광을 그려낸다. 한 반듯한 군인이 보헤미안 여인을 만나면서 어떻게 인생이 망가져 가는 가를 그린 이야기. 실패한 사내의 이야기.
모든 남자들은 자신을 한 번에 옭아맬 매력을 가진 여자를 꿈꾼다. 그리고 그 여자와 함께 평생을 같이 하며 정착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러한 매력을 이용해서 더 자유로와지기를 원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안정을 통한 일신의 물질적 자유와 평안함을 추구한다는 것으로 확장해석해 본다면 더 많은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봐도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호세, 카르멘의 남주인공의 처사다. 여자가 해 달라는대로 다 해준다. 사람도 죽이고 밀수도 하고 도둑질도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렇게 하면 카르멘이 내 옆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카르멘이랑 같이 있으면 세상이 두렵지않다고 말하는 호세의 말은 종류와 정도만 다를 뿐 모든 수컷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잠시 떨어져 이 사건을 기록하는 메리메의 눈으로 살펴보면 얼마나......병신같은 짓인가 말이다.
모든 걸 다 해줘도 여자가 손아귀의 새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게 현실이다. 잡은 새는 모이를 주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시각일 뿐, 여자들은 늘 열려있는 새장을 통해 날아갈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새의 날개와 자유로움에 목매달고 다시 한번 옆에서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없는 탄탈로스의 갈증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 동경은 비뚤어진 소유욕의 변형을 만들어내고 곧 그 감정은 질투와 질시로 바뀐다. 옆에 다른 인간이 있나 경계하게 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기위해 이짓저짓 다 하게 되고, 그렇게 병신짓 하다가 여자가 날개를 푸드득 펼치고 날아가게 되면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나는 갖지 못할 것을 소망하였구나. 내 아까운 시간.
그나마 호세는 막판에 카르멘까지 죽이는 막장테크를 타고 거침없이 인생을 종치지만, 대부분의 사내들은 여기까지 가진 못한다. 그냥 혼자 끙끙대다가 가슴에 누덕누덕 상처나 만들고 다시 다른 카르멘을 찾아 황야를 방랑하는 것이지.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 그러다가 나중에 혼까지 빨린 뒤에 정신을 차리는 것이리라. 메리메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완성한 걸까?
카르멘은 [사랑은 변덕스러운 새]라고 노래하였지만 우리에게는 현철이 있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 라고 하지 않았던가?그것을 보면 현철과 벌떼들 역시 비제만큼의 국제적 유명세는 타지 못했을 지언정 남녀간 사랑의 함의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으니, 오호라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혼이여. 집시 카르멘이 에스카밀리오를 사랑하는 것을 보던 이베리아인의 불타는 눈동자는 우리들 마음속에 트로트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밤이 후덥지근하다.
얼마 안 된 삶을 반추해보면 참 묘한 것이
내 주위에 사람이 끊긴 적은 없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왕래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내 집에 사람이 안 들어와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혼자 독거인처럼 행세를 해도 최소 일주일에 두세번은 집에 사람들이 들렀던 듯 하다.
문제는 그 대부분이 남자라는 것이다. 아마 비율로 따지면 0.000001% 정도의 여성이 오가긴 했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지극히 미미하고, 하나던 둘이던 모두 사내들이 들고 나가는데, 그것도 일정하게 오는 사람들은 몇이고 늘 오랫만에 보자고 전화하고 들리는 사람들이 하나씩은 있더라는 거다.
사람이 사회적인 대중성을 갖춰야 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렇게 인상 좋거나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도 아닐진대 꼭 집 앞에서 전화하고 들어오는 사내들로 넘쳐났다. 예전에 부모님하고 같이 살 떄도 그러했다. 거 참 이상한 노릇이지.
아마도 내 주변에 있는 남정네들이 모두 정이 많고, 이 인간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지만서도, 최소한 문지방에 먼지가 쌓일 수준으로 살지는 않고 있으니 나름대로 사내들과는 돈독하게 지내는 삶이러니 한다.
살다보면 이제 그런 친구들에게서 소식이 온다. 돌잔치네 결혼이네 상사네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럴때는 감연히 하던 일 다 때려치고 나가야 한다. 최소한 그 동안 쌓인 정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내 주고 그안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라면 그들과는 2차집단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야 하는 것이 도리인게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내 삶이라는 것은 거미줄처럼 한없이 하늘하늘한 가냘픈 관계들이 종횡으로 묶어져,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 삶의 제석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는 것 참 좋은 일이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내 삶에 중요한 일부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살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이익을 기반으로 만나거나 목적을 공유하고 만나지 않고 그저 사람을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관계가 주변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내 머릿속이나 내 손재주나, 내가 가진 어떤 것에 대한 흥미로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 경홀히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보석들을 모아서 내 상자 안에 넣어두는 과정과 같다.
사람들의 평판에 의해,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 정련되고 닦여진 보석들을 모으는 삶이라는 것은 효율적이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의 방편일수도 있다. 내 보석상자에 담긴 것은 남에게 아무 가치가 없는 활석이나 황철광일수도 있는 노릇. 하지만 그것 역시 어딘가에서 수만년의 압력을 받아 돌로 빚어진 존재들일 터.
인생이라는 것을 어찌 타산적인 눈으로만 보겠느냐.
삶이라는 게 얼마나 특출나다고 별다른게 있겠나.
그저 살았던 방식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예전의 발자국을 보면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는 것이 태반일텐데.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의 성정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애초에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바뀐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이자 다짐일 뿐.
사람이라는 것은 짐승의 일부분임을 잊을 수 없다.
집청소를 하다가 손거울을 손으로 건드렸는데 그만 땅바닥에 닿자마자 산산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게 야밤에 웬 소란인가. 청소기 돌리고 물수건으로 바닥 닦고 땀을 뻘뻘 흘리고 난 뒤에서야 처리를 다 마치고 앉아있는데
파경(破鏡)이라니.
갑자기 이 생각이 드는 것이다. 파경이라니. 내가 그 동안 남 몰래 사모하던 여인과 이제 영영 이별이라는 것을
전지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시려고 내 손을 빌어서 거울을 박살내신 것인가 이런 젠장.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생각나는 춘향전 한 토막.
이럴 때는 기억력이 비상하다. 거 참 이상한 일이야.
"말대로 그러면 오죽 좋사오리까. 간밤 꿈 해몽이나 좀 하여 주옵소서."
"어디 자상히 말을 하소."
"단장하던 체경이 깨져 보이고 창전(窓前)에 앵도꽃이 떨어져 보이고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려 뵈고
태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말라 보이니 나 죽을 꿈 아니오."
봉사 이윽히 생각하다가 양구(良久)에 왈
"그 꿈 장히 좋다. 화락(花落)하니 능성실(能成實)이요,
경파(鏡破)하니 기무성(豈無聲)가. 능히 열매가 열려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질 때 소리가 없을손가.
문상(門上)에 현우인(懸偶人)하니 만인이 개앙시(皆仰視)라.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으면 사람마다 우러러볼 것이요.
해갈(海渴)하니 용안견(龍顔見)이요 산붕(山崩)하니 지택평(地澤平)이라. 바다가 마르면 용의 얼굴을 능히 볼 것이요
산이 무너지면 평지가 될 것이라. 좋다. 쌍가마 탈 꿈이로세. 걱정 마소. 멀지 않네."
춘향이가 옥에 갇혔을 때 악몽을 꿨는데, 맹인 점쟁이가 왔다가 그 꿈을 해몽해 주는 대목이다.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없을소냐. 사람들이 떠들석하니 볼 일이로다.
춘향이는 꿈으로 꾸었지만 나는 내 손으로 거울을 깼으니
내가 떠드럭하니 세상을 놀라게 하겠구나. 얼씨구 좋구나.
역시 꿈보다 해몽이구나. 절씨구.
여자가 한 말이니 좆나게 부러운 게 맞을거다. 사내놈이 저렇게 썼다면 전두환 시절이 좆빠지게 그리워요 씨발 이라고 했을 테니까. 신문 사설 읽어봤다. "이게 무슨 맞아 죽을 소리인가 할 것이다" 라고 첫번째 말을 쓴걸 보니까 최소한 이 여자는 자기 씹에서 좆이 나기를 앙망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이 여자의 자극적인 제목은 교육문제에 대한 개탄이었다. 전두환 시절이 아무리 씹빠빠룰라고 해도 지금의 좆병신스러운 교육제도보다는 낫지 않겠냔 이야기였다. 하긴 요즘 교육이 교육인가. 애들 양계장에 처 넣고 모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무슨 선진국형 어뤤지 그 미친 할망구 생각하면 지금도 5년 전에 처먹은 소주가 올라온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설프게 교육 건드려서 유럽식으로 만들려고 햇던 이해찬도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각설해 보고, 과외하는 놈들 다 때려잡고 차라리 학력고사 식으로 대입을 돌려버리자라고 이야기하는 논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시장은 이미 마피아가 독식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되는 일은 늘 꼬인다. 더군다나 한국시장에서 교육이라면 자기 몸이라도 팔 부모가 한둘이랴. 하지만 전두환 시절에도 고액과외는 존재했다. 그리고 집권층, 사회지도층의 탈법은 여전히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는 대학도 적었으니까 아예 특별한 계층취급을 했었다는 것을 종종 사람들은 잊고 산다. 내가 군대 갔을 때 내무반에 대학생이 몇이나 되었는지 알면 까무라칠 것이다. 70명 중 30명이 안 되었다. 그 시절이 전두환 시절 지나고 영삼이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늘 과거를 황금색으로 채색한다. 아무리 병신같았어도 과거가 좋다고들 이야기 한다. 정보가 통제되고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형사정책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회상한다. 국제그룹을 돈 안 가져왔다고 공중분해시킨 군사정권이 경제를 살렸다고 지랄한다. 백주에 광주에 내려가서 사람들 패죽인 쏴죽인 놈들의 후신인 주제에 나라를 살리겠다고 깝쳐댄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너무나도 후하게 용서해준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난 5년 다 되어가는 전처에 대해서 아직도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데, 어째 우리 국민들은 나라를 뒤엎어버린 패륜역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대한 건가.
교육문제는 교육문제에서 끝냈어야 했다. 이 글을 쓴 여자는 자신의 생식기가 형태변화 하는 것을 원하진 않았을 지언정 최소한 자신의 글이 전두환 시절의 아스라한 황금색 기억을 다시 반추하는 똘추들의 흥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쓴 것 부터가 이미 정신상태 심란하다는 것을 알려 주더라 [전] 대통령 아니다. 예우 박탈했다고. 그 새끼는 씹새끼에 호로새끼라고 이년아.
아무리 떡정 든 옛 서방 좋다고 매 맞던 시절 잊지는 말자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 성인 직장인들의 유희라는 것은 술 아니면 여자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이 가지고 있는 취미와 여가시간의 활용은 수많은 것들로 분화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구조에서 원하는 성인의 유희라는 것은 전술한 두가지외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산업사회가 분화되고 개인주의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엄연하고 냉정한 사실이다. 사업관계라는 것은 공적인 연결고리 외에 다른 것으로 인해 움직이기 마련이며, 1차원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으로 인해 현실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보다 끈끈한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산하의 인간속성이다. 한국은 이것이 술과 여자로 특화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은 술이다.
벌써 20년여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술을 정말 먹기 싫어했다. 지금도 싫어한다. 불쾌한 몽롱함이 이성 앞에 장막을 치는 것도 싫거니와, 다음 날 숙취라는 묘한 고통으로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가학적 성향도 굉장히 기분나빠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술을 먹고 친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끔찍하다. 나와 가장 관계가 깊은 친구들은 이미 20여년 전 술이 없이도 만난 상대려니와, 지금까지도 술과는 관계가 없는 끈끈한 우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봐도 그것은 자명하다. (물론 술을 먹고 관계가 돈독해지는 사람도 있지만서도...매일 먹지는 않잖은가.)
대한민국 사회는 술을 먹고 연극을 한다.
취하지도 않았지만 취한 상태에서도 사람들 앞에 본심을 내밀지 않는다. 정확하게 계산된 말을 술김에 내뱉는 것 뿐이다. 그걸 못하는 사람은 주정뱅이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한다. 단지 술을 먹으면 조금 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할 수 있다는(술김에 라는 방패를 두르고) 잇점 때문에 술을 먹는 것뿐이다. 이걸 누가 모를까. 술을 먹지 않는 사람도 술을 먹는 사람만큼 아는 세상에서.
한 시절, 사회 초년 병일 때 맥주를 주는 상관하고 멱살잡이를 하던 인간이 어느 새 아랫사람들에게 소주잔을 나눠주는 위치에 올라섰다. 어지간하면 마시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내 윗선의 사람에 의해 눈치를 보는 형편으로 바뀌었다. 술냄새만 맡아도 토악질을 하던 인간이 소주2병은 먹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슬슬 빼고 들어갈 때를 알게 되었고 다음 날 어떻게 하면 정신을 차리는 지 요령도 생기게 되었다. 사회생활에 요령이 생긴 것이라고 볼 만 하다.
하지만 내가 가끔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술을 못 먹어서 고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삶의 뒤틀림 사이에서 알콜이라는 되도않는 요물때문에 좌절하는 수많은 청춘들을 보고 있자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언제쯤 이 나라는 술을 안 먹고 일할 수 있는 나라가 될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만 동시네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나'하는 되먹잖은 어른의 딱딱해진 대가리가 그 가운데로 불쑥 들이미는 것을 느낀다. 이게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획일화를 통한 같은 집단의 확장에 목마른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그냥 심란하다.
1. 다시는 광고 이야기 안 쓰려고 했는데 밥을 다시 그쪽에서 먹게 되어서 한 마디만 써 보련다.
가장 병신같은 기획서는 잘 쓴 기획서다. 내가 봤을 때 더 이상의 흠결이 없도록 쓴 기획서가 세상에서 가장 병신같은 기획서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대부분의 좋은 기획서는 광고사의 입장에서 병신같은 기획서다. 광고주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도출해 주고 광고사는 거기에 밥 숟갈 살짝얻는 표시 날 정도의 기획서가 만점짜리이다.
물론 내 식대로 pt하고 대신 광고매체를 종합선물세트로 때려박는, 광고주보다 더 큰 대형광고기획사들도 있지만 그건 극소수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볼 때 즐거워한다. 남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을 볼 때 즐거워 하고 그사람의 말에 조금이라도 맞장구를 치고 싶어한다. 인간의 삶은 욕망의 굴레를 타고 궤적을 그린다. 화폐경제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이다.
3.
이성의 파도를 타면 본능의 벽을 타고 넘어 벽 뒤에 있는 인간성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어느정도는 사람들의 시선이 객관화될 것이고 보다 평등하게 세상 일이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미안하지만 꿈과 같다. 이성의 파도를 뒤집어쓴 인간들은 이성으로 욕망에 덧칠을 할 뿐이다. 세상에서 유체이탈하여 모든 것을 관조적으로 볼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이성으로 조정되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사느니 종교적 도그마에 의해 일정수준의 계율을 지키고 사는게 더 편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일정수준의 연령이 되면 절대로 타인에게 설복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욕망의 발현방향을 바꾸기 전까지는 그러하다. 이성이고 과학이고 효과가 없다. 만약 그렇게 설복이 가능하다면 6월 항쟁 이후 한나라당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공고하게 두 다리를 붙이고 서 있지 않은가. 인간의 탐욕은 이성에 우선한다. 그리고 제어할 수도 없다.
3.
왜 사업할 때 술을 처먹는가. 비이성의 영역에서 비공식적인 친밀함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이다. 서구권은 이성적으로 해결할 것 같은가. 로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반도의 술문화는 소소한 로비의 총합이다. 어찌보면 한국인들은 모두로비스트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왜 생긴다고 보는가? 이성적으로는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 기저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4.
요즘 보면 말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어른들이 있다. 그냥 자기가 쓰고 싶은 기획서를 쓰는 어른들이 많다. 직장 초년병 때 그런거 가지고 사장한테 가면 부모욕부터 처먹는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대세인가보다.
그래서 병신같아 보이는 기획서가 훨씬 이성적인 것이다.
최소한 그게 나에게 돈을 벌어다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1. 둘째 씨렁이가 다른 집으로 갔다.
솔직히 뭐라고 글을 남기고 싶지도 않을 만큼 기분이 빠진다. 둘째를 생각하면. 도저히 몸이 감당을 못하겠어서 보냈다고 말을 하고, 그 녀석이 사라진 뒤에 어느정도 비염이 사라지고 사람처럼 산다 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람이 감당하지 말아야 할 일을 괜시리 저질렀다는 느낌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말을 줄이고 싶다.
고모부가 아는 집에 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정작 어디에 갔느냐고 하면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기분이 안 좋다. 뭐랄까. 친족이기 때문에 모두가 아는 사안에 대해서 비밀인양 감싸고 들어야 하는 느낌이랄까. 마치 아우슈비츠 옆에 초가집 짓고 살던 독일인의 마음이랄까.
계속 물어보지만 이젠 역정을 내시니 뭐라고 할 도리가 없다. 나중에라도 사진이라도 받아오고 싶은데.
이게 사후약방문이겠지.
그냥 내 그릇의 한계인가 싶다.
2.
결국 다시 광고쪽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될 지는 알 도리 없다. 바빠지고 다시 술도 먹는다. 정해진 틀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전히 나이를 먹고도 힘들다. 나이를 먹을 수록 힘들다. 돈이라는 것은 참 위대하고 두려운 물건. 어쩔텐가. 내가 돈 이상의 가치가 되지 못하는 세상인데.
3.
고장난명이라고 하지만 내가 힘을 주면 손뼉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손바닥을 끌어올 수는 있다.
사람의 관계를 지속지키는 것은 노력과 돈과 정성.
하지만 그것이 꼭 내게 좋은 결과물로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저 세개 중의 하나만 모자라도 사람을 내 쪽으로 끌어올 수는 없다. 연애도 마찬가지, 교우관계도 마찬가지.
계속 해 볼까 관둘까 생각중이다. 나에게 스스로 걸어오는 사람에게 나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몇 달이었다.
4.
앞으로는 어찌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