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좀 심각한 이야기고 개인적인 이야기라 오픈되어 있는 블로그에 쓰기가 뭐한데
뭔가 교회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

우리 교회에선 한번도 감사헌금이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고 교회에서 공론화 시킨적도 없었고
헌금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오메르타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오늘 설교시간 충격 좀 먹었다. 감사헌금을 공론화하려나보다.
어차피 만들어봤자 나야 빈 봉투 낼 인간이고, 감사할 거리가 있으면 하지 말라해도 하겠지만
이게 대체 뭔일인가 싶다.

사실 오늘은 설교시간에 반 이상을 졸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다음 주에 가서 정확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봐야겠다. 

어떤 놈 머리에서 튀어나온 교회 정책인지 짜증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집사 준다고 할 때  할 걸 그랬나? 


2.
사는 삶이나 말하는 게 불가(佛家)쪽에 가까워서 불교신자인 줄 아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래도 3대째 내려오는 기독교집안이다. 거진 1세기가 되어가고, 내 조카대에 이르면 4대째가
될 것인데 교회에 대해 화내고 짜증내는 것은 솔직히 애증이다. 

기독교를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인생의 행로에 다른 기준점을 놓지도 않을 예정이다.
하지만 뭐가 뭔지 요즘은 잘 모르겠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서 바뀌어야 할 것과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 바뀌고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나부터가 그런 것 같다.
언젠가부터 형식에 집착하고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유교의 제사도 혼백을 부르는 의식에서 시작한 것이다.
양(陽)인 혼(魂)을 부르기 위해 향을 피우고 음(陰)인 백(魄)을 부르기 위해 땅에 술을 쏟는다.
그것이 점점 형식화, 체계화가 되다 보니 오늘날처럼 엄숙하고 거한 절차가 된 것이다만

기독교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천주교의 허식과 사제들의 성경본질에서 벗어난 생활태도를 배격해서 본질로 돌아가자고
나온 것이 개신교인데  점점 21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암흑기의 천주교를 따라가는 듯 하니...

나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이야 교회에서 반은 방관자로 살고 있으니약간 떨어진 곳의 조망이 보이지만
언젠가 다시 나이 먹고 깊숙히 관여하게 되는 시점이 되면 
내가 욕하는 그 부분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사랑, 우정, 용기, 민주화, 자유, 평화....다 돈으로 처발라야 되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아름답게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교회라고 거기서 빠질 수 없는 걸까.

그냥 뭔가 정리되지 않은 글을 이쯤에서 끝내야만 하는 찝찝함이라니.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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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의 변

수련장 2009. 6. 15. 11:02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인간이 나온다.

예수의 제자도 아닌 주제에 꽤 많이 등장한다.

이 양반은 유대 랍비일파의 가장 큰 일문중 하나인 [힐렐 학파]의 한 사람이자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이나 기독교의 전파에는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란 이야기다.
그냥 유대교의 학식있는 스승이지.

그런데 이 양반, 학문에 있어서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를 꿰어맞춘 바울을 가르친 사람인데다
논리적으로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得道한 자가 얻을 수 있는 智의 탈한계]에 달한 사람 같다는 생각.

사도행전 5장 30절 하반부부터 나오는 이 양반의 말은 그런 이야기다.
기독교가 이단이네 전파하지 말아야 하네 하는 공의회 사람들을 한큐에 보내버리는 말을 하는데
"사람의 소관에서 난 것이면 크게 일어났다가도 사라지려니와 하나님의 일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그냥 냅두라"

어찌보면 이현령비현령식의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퇴계 이황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으니
뭔가 지식이나 수련에 극에 달하면
스스로 알지 못하여도 마음의 결정함이 바람에 물결이 쓸리듯 순리를 따라서 행하게 되는 모양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생각하는게
"내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소서"아닌가?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텐데.

알면 알수록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것이 이쪽 공부구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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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올라온 후배의 글에서도 그랬지만
발달해가는 인간의 삶 속에서
기독교인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영원한 중간자의 삶을 꾸려갈 수 밖에 없음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한쪽 발은 인문학과 인간가치중심의 영향권에 넣어두고
한쪽 발은 신의 현현에 대한 기대와 절대자에 대한 복종의 서원에 넣어둔다.

같은 종교를 믿는 자의 패악에 통감하지만
같은 종교를 비방하는 말에 대해서 역시 다르게 가슴아파한다.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나
급변하는 사회의 상대성에 대해 공감한다.

비신자의 비판에 대해서
몰이해와 광신과 합리적 선택과 절대복종의 사이에서
작은 지푸라기 하나에도 갈등한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이성에 의한 판단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움직이면 좋으련만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절대적인 선(善)의 기준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게 된다면 또한 그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믿고 선이라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절대자의 입장에서 선이 아닐 경우는
어떤 것을 따라야 하는가?

어찌보면 나 개인의 신학을 규정짓는 문제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자 화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날 내가 깨달아
즉심즉불이요 비심비불이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신의 섭리라고
느껴질 때 나는 이 모든 것을 초탈할 수 있으련만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세상이 그렇게 얇지 않은 관계로
늘 고민하고 고민하는데
뭐가 실상인지를 알 수 없는 오성의 한계에 늘 절망한다.

어쩌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어느 쪽에도 온전하게 의탁하지 못한 채로
모든 곳에서 영원한 회색분자로 살아가야 할 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어렵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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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r Religious

수련장 2009. 4. 11. 14:01

어두운 동트기 전의 세상같은 요즘을 지내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부쩍이나 많이 합니다.

아마 개인적인 삶의 부분에서
개인적인 사유의 부분을 할애해 보라면
종교가 40% 여성이 40% 기타가 2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전의 타락사제에 어울리는 컨셉이군요.

각설하고,
현재 제 스탯에서 종교란은 기독교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이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예장, 예수교장로회쪽이죠.

가끔은 기복신앙적인 측면도 보이고
대부분은 이성적으로 제가 가진 종교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점수보다는 돈오쪽에 대한 선호가 강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돈오라는 게 일단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어나는 돈오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고양의 착각일 경우가 다분하죠.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인 천재라는 이야긴데...이런 고승대덕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냥 줄기차게 보는 편입니다.

성경이라는 게
어찌보면 단편적인 서술로 이뤄져 있고,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를 모르면 뭔 소리인지 모르거나 곡해하기  쉬운 구절도
숱하고...한 마디로 이성의 총합으로 읽어도 불합리할 지경인데
그냥 [믿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장르는 결코 아니라는 거죠.
기독교인으로 산 지 한 4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지금은 백의종군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교회 내 직분이 있기도 했고요.
 
어느 날인가 있을 돈오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있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대로 절대선이 될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적인 [종교적인 Credo]는 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를 한번에 설명해 주진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택 범위 밖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기도해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라는 명제가 생략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확신의 부분이지만
신앙은 공동체와 외적인 표출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기독교는 개인의 믿음을 외적인 신앙으로 포장하는 데 너무 익숙하죠.

현실적 축복,
기도의 응답
그리고 돈

이 세가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홉마리 소 중의 터럭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세가지가 정수라면 일전에 죽은 제 여후배는 의미없는 개죽음밖에 안됩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벌기위해 살아가면서
[성경]하고 하나도 합치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40%가아니라 99.9%가 되도 모자랄 만큼머리가 아프고
기독교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일주일 내내 드는데

왜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사회에 대해서 늘 날 선 말들만 성경에서 취합해서 뽑아내
대외적으로 무장하며
속으로는 꿀빵에 시럽발라놓은 것 같은 말만 슬슬 요리조리 발라서
뭐가 진리이고 요설인지 구별도 못하게 되는 것인지.

그냥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간판은 신자라고 걸어놓은 우리들]에 대한 위로의 차원일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약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녀석이 중학교 이상 되어 세례를 받을 때가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세례를 받던지 말던지 하라고 시킬까.

아비는 아비의 신앙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식에게 있어서 내가 보여준 신앙이 잘못 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뭐...이 이후의 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겠거니 하고 말이죠.



흠.
여성을 사유의 40% 이상 생각하는 남자의 글 치고는 상당히 심각하고 경건하군요.
이것도 자기합리화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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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신부가 되어 볼래?"

이거 농담 아니다.
나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나에게 물어본 말이었다.

우리 집안이 3대째 개신교도이고 나름대로(?) 가족의 전통을 중시하는 집이었고
장남이었으니 망정이지
내 성정에 맞기로는 
머리깎고 절에 들어가 앉아 독경을 하거나
천주교로 개종해서 수사가 되고 신부가 되는게 훨씬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자에 대해 별 관심없을 때 일이다.
요즘처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터에 바디페인팅하는 여자 사진이나 찾아다니는 깜냥으로는
수도가 아니라 파계승도 못될 심정이지만.

각설하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구만.
속세에 어차피 남겨놓은 것도 없으셨을테니 그냥 홀가분하셨을 게다.

그거 보면 신부들이 참 부럽다.
세사 어떤 물질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냥 구도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

난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좋더라.
눈 한 번 질끈 감고 고개 돌리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수도자의 삶인데
민초들의 아우성에 귀를 막을 수 없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모습아닌가.

그저 진흙탕에 고기 몇점 줏어먹겠다고 아둥바둥하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놈이 다 그놈으로 보이는 세상이다.
빛이 비추되 어두움은 깨닫지 못한다는 성경말씀이
요즘처럼 절실한 적이 없었네그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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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백이나 첨언을 하자면, 나는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거의 가풍처럼 기독교를 믿고 있는 집안이다.한 세대 30년이라고 치면 대충 내가 믿는 시간까지만 해도 중첩되는 기간을 제하면 짧게는 50년이고 길게는 70년이상 되는 기간동안 한 가정의 정신적인 dogma로 존재해 오는 것인데 실제적으로 이것에서 오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불어 나도 이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한 도덕적 규례나 개인적인 가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서 내 행동양식도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성향을 빌려보면 나는 오히려 불교쪽에 더 가깝다. 선(禪)에 더욱 가까운 양식이 내 개인적인 사고방식이고 내면에 침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그 핵심적인 사안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아니지, 오히려 그 core는 180도 다를 수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종교적 방식에 있어서는 두 종교의 수련법이나 깨닫는 과정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아직 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돈오점수나 성령의 체험과 성경의 묵상이 한자와 한글의 체험일 뿐, 인간이 느끼는 것은 같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절대자와 인간개인의 수련이라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진여를 깨닫느냐 아니면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존재함을 불현듯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막말로, 내가 어늘 불가적인 수행을 하다가 본래면목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세상을 창조주가 만들었고 구세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천둥에 머리를 돌리듯 깨달았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구원의 감격인가 아니면 불교적인 득도의 경지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기독교의 성경에 써 있는 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면 적이지 절대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육체저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악다구니 같은 돈지랄의 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이번 주 로또 맞게 해주세요]따위의 기도를 줄기차게 뻑적지근한 교회에 앉아서 드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말릴 수 있으랴? 나도 가끔 먹고살기 힘드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절박성 기도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기독교와 상충되는 사회 안에서 상충되는 가치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 봤자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은 점점 탈세속화 되어간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산문의 한가함을 느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산속 도량에서 독경을 하는 것이나 스스로의 욕심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신이나 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진대. 그래서 중세시대에 수도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불어 이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모든 종교의 끝은 결국 시장으로 나와서 도를 설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정토종을 만들 때 그러했듯이 도가 도에 이르면 그 끝은 사람들에게 나서서 도를 잇는 길이 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뭔 차이가 있겠는가. 전도 찌라시 돌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닌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는가.

아아 살면 살수록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이고 종교에 관련된 생각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글로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종교적인 실타래가 꼬여있는데 과연 이것이 죽을 때까지 다 풀릴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번쩍하고 귀가 들리고 눈이 트이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될 것인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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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련장 2008. 11. 4. 15:41
[심두멸각하면 화염도 자량이라] 고  혜림사의 지주 쾌천화상이 말하였다.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는 말인데 원래 쾌천의 말이 아니라 당나라 두순학의 말이다.
하지만 정작 실천에 옮긴 것은 쾌천화상. 일본말로 카이텐 화상인데 이 양반은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풍림화산으로 유명한 다케다신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문제는 다케다가 오다 가에게 발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가 다케다의 영지로 쳐들어와서 다케다의 영지를 유린했다는 거다. 혜림사의 카이텐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랬더니 노부타다가 절에다 불을 놨다나.

불타는 산문에 정좌해서 타 죽어가면서 외쳤다는 마지막 사자후가 [심두멸각 화염자량]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
오, 젠장. 그 이야기를 아래에서 불 놓던 오다가의 군사들이 듣고 얼마나 섬찟했을까.

나도 평지풍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부도옹처럼 살고 싶다만.
다 이것이 마음의 고집멸도를 버리고 마음의 본래면목을 찾아 떠나는 수행의 첫 발자국 아니겠는가
상구보리 하화중생해야 반본환원하는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인이 왜 불법을 쓰고 있나.
무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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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한담

작은 방 한담 2008. 11. 1. 21:59
1. 대체 방명록도 안 쓰고 댓글도 안 다는 눈팅만 하는 사람들이 370명이나 들어오는 이 괴상한 사이트의 주인으로써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귀하가 사람이시면 감사합니다.
귀신이면 물러가거라!

2. 저녁으로 먹은 건 맥주 하나와 돼지고기 편육 10조각정도.
   내가 무슨 중세시대 독일 용병도 아니고
   하긴 집에 먹을거라고는 그거 아니면 밀가루밖에 없는데 뭐 어쩌랴.
   햇반이 있긴 하지만 햇반이라는 것은 반찬을 마련해야 하는 종류기 때문에 참 곤란할 떄가 많다.
   그래서 자취하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저녁을 밖에서 사람들과 먹으려 드는 것이지만.

3. 사람들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힘들어지는 일이다.
    같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사람도 100%신뢰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온라인 장터에서 거래하는 사람들이 용자처럼 보이더라.
    (하긴 인터넷 쇼핑몰의 불안감을 극복한 지 몇 년 안되니까)

   그것도 그렇고...역시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건 어린 시절에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났던 사람들 외에는
    믿지 못한다는 것을 요즘 여실히 증명받고 있다. 하기사 어린시절 동무들이라고 모두 진실된 것도
    아니다. 결국 무소의 뿔처럼 혼자가게 되는 게 인생인가? 우울하군.

4. 기어즈 오브 워2가 8만3천원에 한정판을 판매한단다.
    벼룩의 간을 뺴먹을 작자들 같으니, 어차피 한 달만 더 참으면 팍팍 떨어진 값에 구매할 수 있는
    대량 타이틀을 그따위로 팔아먹는 걸 보면 정말 상도라고는 발바닥의 떄만큼도 없는 인간들이다.

5. 날씨가 좋으니 놀러가 볼까?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가 봤자 내 정서상 부합되는 곳도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멍하니 산 정상에 벤치 하나 있는 곳. 그런 곳이 좋은데
   문제는 그런 데 가면 서로 주물럭 거리는 연인들밖에 없다는거.

6. 성가대도 그렇고 내년의 교회 사역은 0가 될 것 같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그랬는데 수신은 개뿔이고 제가는 시궁창이니
   그냥 평신도로 사는 일 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하지만 이근안이도 목사가 되는 나란데 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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