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gion for Religious

수련장 2009. 4. 11. 14:01

어두운 동트기 전의 세상같은 요즘을 지내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부쩍이나 많이 합니다.

아마 개인적인 삶의 부분에서
개인적인 사유의 부분을 할애해 보라면
종교가 40% 여성이 40% 기타가 2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전의 타락사제에 어울리는 컨셉이군요.

각설하고,
현재 제 스탯에서 종교란은 기독교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이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예장, 예수교장로회쪽이죠.

가끔은 기복신앙적인 측면도 보이고
대부분은 이성적으로 제가 가진 종교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점수보다는 돈오쪽에 대한 선호가 강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돈오라는 게 일단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어나는 돈오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고양의 착각일 경우가 다분하죠.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인 천재라는 이야긴데...이런 고승대덕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냥 줄기차게 보는 편입니다.

성경이라는 게
어찌보면 단편적인 서술로 이뤄져 있고,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를 모르면 뭔 소리인지 모르거나 곡해하기  쉬운 구절도
숱하고...한 마디로 이성의 총합으로 읽어도 불합리할 지경인데
그냥 [믿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장르는 결코 아니라는 거죠.
기독교인으로 산 지 한 4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지금은 백의종군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교회 내 직분이 있기도 했고요.
 
어느 날인가 있을 돈오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있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대로 절대선이 될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적인 [종교적인 Credo]는 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를 한번에 설명해 주진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택 범위 밖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기도해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라는 명제가 생략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확신의 부분이지만
신앙은 공동체와 외적인 표출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기독교는 개인의 믿음을 외적인 신앙으로 포장하는 데 너무 익숙하죠.

현실적 축복,
기도의 응답
그리고 돈

이 세가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홉마리 소 중의 터럭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세가지가 정수라면 일전에 죽은 제 여후배는 의미없는 개죽음밖에 안됩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벌기위해 살아가면서
[성경]하고 하나도 합치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40%가아니라 99.9%가 되도 모자랄 만큼머리가 아프고
기독교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일주일 내내 드는데

왜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사회에 대해서 늘 날 선 말들만 성경에서 취합해서 뽑아내
대외적으로 무장하며
속으로는 꿀빵에 시럽발라놓은 것 같은 말만 슬슬 요리조리 발라서
뭐가 진리이고 요설인지 구별도 못하게 되는 것인지.

그냥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간판은 신자라고 걸어놓은 우리들]에 대한 위로의 차원일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약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녀석이 중학교 이상 되어 세례를 받을 때가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세례를 받던지 말던지 하라고 시킬까.

아비는 아비의 신앙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식에게 있어서 내가 보여준 신앙이 잘못 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뭐...이 이후의 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겠거니 하고 말이죠.



흠.
여성을 사유의 40% 이상 생각하는 남자의 글 치고는 상당히 심각하고 경건하군요.
이것도 자기합리화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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