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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21 이제 머리가 안 아프니 자야겠다.
  2. 2016.08.16 아프다 2
  3. 2015.07.08 세월이 하 수상하니
  4. 2014.07.08 핸드폰 기변과 페이백과 기타 등등등등등
  5. 2012.09.20 가증스러움 2
  6. 2012.08.11 글이 안 써져
  7. 2012.06.28
  8. 2012.04.16 민생고 4
  9. 2012.02.07 알 수 없는 트랙백
  10. 2012.01.20 공간과 간극 2

2016년

2012년보다 머리가 더 아플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는가

제발 내 민생고 하나만 걱정하면서 살게 해 다오. 이 더러운 세상아.

그리고 세상을 더럽게 만드는 인간들아. 욕심꾸러기 노인네들아.

나도 나이를 먹어서 꼰대소리 듣고 있다만서도......너희들은 너무 더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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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투덜투덜 2016. 8. 16. 00:45

나는 병약하다. 병약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부끄러움 없이 달 수 있을만큼 충분히 병약한 사람이다.

일주일에 사흘 이상을 편두통에 치대며 산다. 나머지 사나흘은 복통을 달고 산다. 과민성 대장증상과 스트레스를 같이 껴 안고 살며, 가끔 인후염이나 뜻하지 않은 알러지도 종종 온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편두통이다. 

 한달에 몇 번 오는 편두통은 종종 내게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할 만큼 정교하고 잔혹하게 다가온다. 삶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고 내 인생의 우선순위들을 파괴한다. 가족이고 뭐고 형제고 신념이고 종교고 다 알게뭐냐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만약 내가 독재정부에 항거하는 운동권 인사였다면 아마 편두통이 발작하는 날 바로 모든 걸 불어버렸을 것이다. 난 취조하는 형사가 좋은 진통제라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면 말이다.


 최근 들어 여기에 하나 더 불규칙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이 생겼다 무릎관절의 통증. 아마도 관절염 초기증세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급격히아프며 관절이 붓고 물이 차다가 소염진통제를 먹으면 붓기가 빠지고 2-3일 후에 줄어드는 과정을  경험하는데..이 또한 무시하지못할 고통이다. 발을 디딜때마다 불로 달군 못이 내 다리와 허벅지를 깊게 쑤시는 듯한 통증. 점점 심해지면 어떻게 내가 반응해야 할 지 대책이 안 서는 병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새롭고 신비해지는 것은 나의 피폐해지는 몸을 방문하는 참신한 병마들뿐이다. 나는 부서지고 해진 몸을 새롭게 기우고 보수하면서 아직도 한참 남아있을 내 인생을 끌고 가야한다. 다행스럽게도,내인생이 그리 멀지않은 시간에 망가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골골대며 지루한 인생을 침대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글을 더 쓰고 싶은데 아이가 울어서 이젠  이것도 못하겠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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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써지질 않는다.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게 이 거칠고 규칙없는 나라에서 조악하고 바보같은 인생을 영유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지.의욕 상실의 현장에 서 있는 거다.


글이라는 것은 반성과 낭만의 접점이다. 내가 행한 일에 대한 반성과 내가 앞으로 하거나 내가 꿈꾸는 일에 대한 분석과 밑그림이 글로 나타나는 것인데...요즘 같아서는 글을 쓰는 의미가 없다. 반성을 한다고 나와 내 주위의 환경이 새 날개깃아래 솜털만큼이라도 바뀔 것 같지않고, 내가 의지하는 꿈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허황된 모래성이나 쌓게 될 것같다는 비관이 온 몸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살기 힘들면 희극이 융성하고 살만하면 비극이 흥한다는 옛 말이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는 막장이 제일인 걸로 봐서 그냥 종말지말이 아닌가 싶다.


그냥 짜증스러운 나날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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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년 9개월 정도 써 왔던 핸드폰을 새로 나온 핸드폰으로 과감하게 교체를 해 버렸다.

원래 전에 쓰던 핸드폰이 당시 최고의 스펙이라고 모두 뻥을 치지 이 제조사 개객기야  여겨지던 폰이었고, 그 폰을 구입하던 당시 사장이 "내가 핸드폰을 바꾸니까 팀장 너도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것이 사대의 의리 아니냐?" 하면서 말도 안되는 즉흥구매를 행했던지라. 별로 크게 선택을 하지 못하던 처지였다.


그래도 80만원 가까운 거금의 핸드폰이었다. 난 원래 상거래에서 흥정을 안 하는 사람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면서 일을 할 때도 그랬고, 다른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금액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원들이 제시하는 가격이라면 이 가격이 모든 업계에 당연히 통용되는 비용이라는 생각 하에 가격을 지불한다. 난 그게 신뢰이자 공감대고, 그것이 경제활동의 가장 빝바닥에 깔리는 내용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난 틀렸더랬다. 최소한, 핸드폰 시장에서는 그게 틀렸다.


나보다 훨씬 어린 내 부하직원들이 왜 그렇게 비싸게 샀느냐고 계속 말들을 하더라. 이 정도 가격이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제 값 주고 사는 핸드폰]이 어디 있냐는 거다. 말 그대로 공시가격으로 사는 핸드폰이라는 것은 정보 어두운 노인들이나 아무 것도 보르는 직장인들이 어수룩하게 통신사 가서 사는 것이지, 요즘은 인터넷으로 그 절반 가격, 3/4 가격, 심지어는 공짜로도 번호이동으로 산다는 거다 (이쯤되면 필자가 얼마나 어수룩한지 알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반은 이런 빙신을 봤나 하면서 이 글을 읽고 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원래 장사라는 것이 이문을 남기는 것이니까 어느정도 마진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파는 핸드폰 가격이라는 것은 매장에서 파는 핸드폰 가격이라는 것과 너무나도 큰 괴리가 있더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매장에서 사는 것이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거다 (아니며 온라인이 밑지고 파는 거겠지) 그런데 내 주변의 대부분 젊은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수리가 토끼 낚아채듯 타이밍을 골라가며 값싸게 핸드폰을 집어가고 되팔고 다시 갈아타기를 반복하더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 아니면 세상이 내가 아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장 짜증이 나던 것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거래하는 것이 아무런 장점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같은 피조물을 대할 때 신의성실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화한다는 대전제가 이미 소용이 없더라. 어느 정도의 이문에 대한 암묵적인 보장을 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상거래일텐데, 오히려 그것은 얼굴을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만 의사표현을 하는 온라인에서 더욱 활성화가 되어가고. 정작 얼굴을 맞대서 사람들에게 물건을 구하러 오는 이들은 바보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목격했달까.


아마 핸드폰에 국한된 이야기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정부에서 핸드폰에 대한 가격을 규제해서 더 이상 온라인에서 그리 쉽게, 오프라인에서 그리 비싸게 팔지 못하게 만든다고 제한을 걸어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문을 정부가 알아서 메꿔주는 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내가 뭘 모르나, 하긴 이쪽으로는 문외한이지). 이윤추구를 정부가 정해주고, 오프라인에서는 소비자를 벗겨먹고, 온라인에서는 알아서 각자도생하는 것이 장땡인 시대. 


점점 시대가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개개인들은 이윤의 흐름에 대해서 알 수 없어질 것이다. 정보의 중앙에 위치하여 매일매일 변하는 이익구조를 접하지 않는 한, 언젠가 개개인은 사회의 흐름에서 멀어진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예전에는 몇 세대를 지나서 움직여야 했던 상황이 한 개인의 인생 속에서 몇 번을 바뀔정도로 세상이 급속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람들의 바람보다 훨씬 느리고 둔감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하여간, 나는 지금 그래서 여지껏 행해온 내 상거래 방식을 버리고 다른 인터넷 쇼핑몰에서 빤스 사는 것처럼 휴대폰 하나를 생각외로 저렵하게 구입하게 되었다. (사람들 말로는 내가 규제 전 끝물 탔다고들 하는데...솔직히 뭐가 끝물이고 시작물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이게 고장날 즈음이 되면 그 때는 또 어떤 방식으로 거래를 터야 할까? 이젠 하나한 바뀌는 모양새가 슬슬 무서워지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난 사람들을 대면하고 핸드폰을 사는 일에 거부반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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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움

투덜투덜 2012. 9. 20. 22:56

한때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 많은 시간을 온전히 나를 향해 쓸 수 있기만을 바랬다. 시간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봤다. 확실히 이것은 여타 어떤 것들보다 인생에 값진 행위였고, 나는 그 안에서 무한한 안락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시일이 지나자 참으로 얄궃고 미천한 것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돈이었다. 세상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성경을 빌리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법이지만, 마치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금전적 핍절이라는 것은 내 신경을 부단히도 긁어대는 종류의 통증이었다. 맨 처음에는 견딜 수 있는 노릇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져갔다. 어느 순간, 이 작은 고통은 수미산같은 거대한 고통이 되어서 나를 짓눌렀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돈을 벌어야겠다. 돈이 있다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뒤 몇달간은 나를 짓누르는 고민이 사라진 것 때문에 행복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 불가피한 인생살이는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시간의 자유를 모두 늑탈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또 다른 절망에 빠져든다. 


사람이라는 것은 원래 모든 것을 가지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돈이 없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며, 돈을 벌고 싶다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이 어찌 그러한가. 우리는 늘 그래서 슬프고 슬프다. 인간이라는 것은 한참 뒤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을 지켜보면서 그 가증스러운 추함에 치를 떠는 짐승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동물이지만 그 거짓말의 대부분을 자신에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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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안 써져

투덜투덜 2012. 8. 11. 02:36

등 따시고 배부른 모양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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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투덜 2012. 6. 28. 22:49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 성인 직장인들의 유희라는 것은 술 아니면 여자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이 가지고 있는 취미와 여가시간의 활용은 수많은 것들로 분화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구조에서 원하는 성인의 유희라는 것은 전술한 두가지외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산업사회가 분화되고 개인주의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엄연하고 냉정한 사실이다. 사업관계라는 것은 공적인 연결고리 외에 다른 것으로 인해 움직이기 마련이며, 1차원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으로 인해 현실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보다 끈끈한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산하의 인간속성이다. 한국은 이것이 술과 여자로 특화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은 술이다.


벌써 20년여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술을 정말 먹기 싫어했다. 지금도 싫어한다. 불쾌한 몽롱함이 이성 앞에 장막을 치는 것도 싫거니와, 다음 날 숙취라는 묘한 고통으로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가학적 성향도 굉장히 기분나빠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술을 먹고 친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끔찍하다. 나와 가장 관계가 깊은 친구들은 이미 20여년 전 술이 없이도 만난 상대려니와, 지금까지도 술과는 관계가 없는 끈끈한 우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봐도 그것은 자명하다. (물론 술을 먹고 관계가 돈독해지는 사람도 있지만서도...매일 먹지는 않잖은가.)


대한민국 사회는 술을 먹고 연극을 한다.

취하지도 않았지만 취한 상태에서도 사람들 앞에 본심을 내밀지 않는다. 정확하게 계산된 말을 술김에 내뱉는 것 뿐이다. 그걸 못하는 사람은 주정뱅이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한다. 단지 술을 먹으면 조금 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할 수 있다는(술김에 라는 방패를 두르고) 잇점 때문에 술을 먹는 것뿐이다. 이걸 누가 모를까. 술을 먹지 않는 사람도 술을 먹는 사람만큼 아는 세상에서.


한 시절, 사회 초년 병일 때 맥주를 주는 상관하고 멱살잡이를 하던 인간이 어느 새 아랫사람들에게 소주잔을 나눠주는 위치에 올라섰다. 어지간하면 마시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내 윗선의 사람에 의해 눈치를 보는 형편으로 바뀌었다. 술냄새만 맡아도 토악질을 하던 인간이 소주2병은 먹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슬슬 빼고 들어갈 때를 알게 되었고 다음 날 어떻게 하면 정신을 차리는 지 요령도 생기게 되었다. 사회생활에 요령이 생긴 것이라고 볼 만 하다. 

하지만 내가 가끔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술을 못 먹어서 고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삶의 뒤틀림 사이에서 알콜이라는 되도않는 요물때문에 좌절하는 수많은 청춘들을 보고 있자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언제쯤 이 나라는 술을 안 먹고 일할 수 있는 나라가 될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만 동시네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나'하는 되먹잖은 어른의 딱딱해진 대가리가 그 가운데로 불쑥 들이미는 것을 느낀다. 이게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획일화를 통한 같은 집단의 확장에 목마른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그냥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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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고

투덜투덜 2012. 4. 16. 19:43

어차피 살기 위해서 밥을 먹고 

소화기관의 열약함으로 인해 미각을 위한 식사는 곧 심각한 소화불량을 초래하는 바

별달리 음식에 대한 집착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지만

어떨 때는 정말로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는게 참 넌더리 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감기가 오랫만에 단단히 걸렸는데

독한 약을 먹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이 떨어져서 쌀을 씻고, 반찬이 떨어져서 남은 김치 다 넣고 찌개를 만들고.

그 와중에도 몸은 열이나서 욱씬욱씬 거리긴 하는데


어차피 결혼하건 누가 옆에 있건 이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가 아픈 건 개인이 온건히 담당해야 할 사안이고

아픈 건 극복하기 위해 약을 먹고 그 전에 위장을 보하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밥을 해 줄까?

그런 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저것 합해보면 그냥 지금의 삶이 죽 이어진다고 봐야 하는데

사람살이라는 게  별다르게 뒤어난 감흥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P.S)

지금도 어딘가에는 아파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도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반이 넘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밥을 먹기 위한 행위 자체가 나하고는 전혀 다른 인생의 과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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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 트랙백이 걸려있길래 봤더니 생전 읽어보지도 않은 무라카미 류 책광고.

이 양반아, 남의 블로그에 다른 나라 책 링크시킬 역량이 있으면 국내 작가들이나 발굴해 봐.

내 책이나 내 주던가. 씨발. 



하여간 출판사 놈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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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간극

투덜투덜 2012. 1. 20. 01:09
[이해한다]라는 말처럼 위선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삶에 있어서 한 개체는 다른 개체와의 공간을 극복하기 힘들다. 유기체는 그 하나로써 정당하게 독립되어 있으니, 그 하나의 유기체를 내가 온전히 통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한다는 것이 단지 거죽의 움직임이나 그가 한 행동의 인과관계를 따져서 그 시작과 끝을 판별하는 것이라면 맞는 말이겠거니와, 그 [이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심리적 상태의 총합까지 알아야 사용가능한 단어라면 어느 누구도 상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 사람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내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고, 찾는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간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오감을 사용하고, 그 오감을 사용해서 친목을 만들고 애정을 갈구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질투한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다. 온전하지 않기에 충돌이 있다. 늘 공간에는 아무리 서로가 접해져도 메꿔지지 않는 호말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해받고 싶어하고 공간을 줄여보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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