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개인의 삶에 있어서 한 개체는 다른 개체와의 공간을 극복하기 힘들다. 유기체는 그 하나로써 정당하게 독립되어 있으니, 그 하나의 유기체를 내가 온전히 통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한다는 것이 단지 거죽의 움직임이나 그가 한 행동의 인과관계를 따져서 그 시작과 끝을 판별하는 것이라면 맞는 말이겠거니와, 그 [이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심리적 상태의 총합까지 알아야 사용가능한 단어라면 어느 누구도 상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 사람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내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고, 찾는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간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오감을 사용하고, 그 오감을 사용해서 친목을 만들고 애정을 갈구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질투한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다. 온전하지 않기에 충돌이 있다. 늘 공간에는 아무리 서로가 접해져도 메꿔지지 않는 호말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에게 관심 있는 여자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내가 관심있어하는 여자에게만 끌린다 ---> 그 여자는 내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좋아한다 ---> 내가 끌린다고 해도 여자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 내가 관심을 보인다 ---> 여자는 관심이 없다 ---> 관심이 없는 여자기 때문에 내가 관심을 가져봤자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 내게 관심없는 여자가 내게서 멀어진다 --->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던 여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여자가 사라진 것으로 인해 실제적인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 혼자 있게 된다 --->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 나는 나에게 관심있는 여자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내가 관심있어하는 여자에게만 끌린다
다른 말이 필요없다. 365일중에 300일을 아팠다. 급격한 두통, 구토, 체함. 어지러움. 딱 뇌종양증상인데 CT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MRI를 찍어봐야겠는데 솔직히 걱정이 된다. 중풍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스트레스일 확률이 가장 높긴 하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절망과 분노 뭐 그런 일이겠지. 하지만 그게 표면화 되어서 육체에 고통을 줄 정도라면 내가 의도적으로 피하고자 했던 스트레스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오늘 보건소에서 혈압을 쟀다. 98/154가 나왔다. 내일 혈관이 터져 죽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 수치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피지 않고 여자랑 자는 것도 아니다. 일주일에 세네번은 한시간씩 토나올 정도로 운동하고 정말 수도승처럼 먹는 것도 굶어 죽지 않는 한에서 최소한의 것만을 섭취한다. 체중도 정상체중을 밑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압은 점점 높아진다.
이걸 보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관리하고 노력하고, 인생의 지표를 위해 뛰고 노력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들 그것이 내게 주어진 복이 아니라면 내가 한 노력은 어떠한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그게 인생이고 삶의 냉엄한 현실이다. 인생은 절대로 교과서적으로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계획한다. 혈압을 130대로 낮추겠다고 다짐하고, 식이요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계속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냥 이렇게 비실비실 시든다는 것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거부감이 있다. 내 인생에 대한 본전 생각이 난다.
2. 썼다.
뭔가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좋아하는 사람은 소수, 하지만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인기란 바람앞의 촛불 같은 것. 하지만 글에 대해 투자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글은 아름다와진다. 연애보다 낫다. 시간을 들여서 다듬으면 절대로 사람의 손길이 탄 곳이 나빠지지 않는다.
내년에도 쓸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3. 안 만났다.
천하의 반이 여자라는데, 점점 사람들의 모습이 이지러져 보인다.
씁슬하긴 한데. 어쩌랴.
내년엔? 모를 일이다. 과거의 지저분한 그림자도 있고
아직도 애틋한 추억이 너무 짙은 것도 있고
그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신뢰를 하고 싶지도 않고.
참으로 모를 일 투성이가 인생인 것이다.
하지마 올해보다 심하랴. 올 해는 아파서 모든 것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내년에는 제발 아프지 말아야지.
글 쓰기를 좋아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참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소설을 하나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척이나 써 보고 싶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일이 머릿속에서 휘발되기 전에 활자나 파일로 남겨 져 나중에 다시 보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일 거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십편의 습작을 써 보고, 수천권의 책들을 보았지만 결코 맘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뒤에 알았다. 원래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리고 작가라는 이름은 정말 위대한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마흔이 되었다. 마흔이 되도록 그는 작가라는 이름은 굉장히 신비한 직종이 아닌 직책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작가라는 것이 아무나 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더 이상 경외가 아닌 냉소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심심풀이로 고등학생이 쓴 글을 출판사에서 사 가서 고등학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예닐곱권의 연장소설을 쓰게 만들어 팔아먹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출판계의 현실이다. 고등학생은 사십이 다 되어가는 아저씨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너무나도 간편하게 얻지만, 그 고등학생은 작가라는 타이틀은 샐러리맨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저작을 하지 않게 된다.
삶의 호오를 흑백으로 구분지어 산다는 것이 지금은 지적으로 모자란 사람들의 행태같지만, 몇 십년전, 아니 십수년전만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악당은 악당이었다. 사람들을 괴롭히면 악당이었고, 혼자 잘먹고 잘살고 다른 이들 거 뺏아먹으면 악당이었고, 부족한 사람들 핍박하면 악당이었다.
옳음에 대한 정의는 거칠지만 간단명료했다. 분명 그렇게 된 배경에는 악당들의 세련되지 못한 자기표현이 존재했다. 아무리 잘 봐줘도 못된 짓을 했다. 멀쩡한 학생 패죽이고, 돈 뜯고, 말 안들으면 갖다 거짓재판하고 고문했다. 악당스러움이라는 것이 확연했기에 옳음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악함이라는 것에 명분이라는 조미료를 치고, 그곳에 질서라는 조미료를 치고, 대의명분이라는 것을 입혔다. 까뒤집어보면 똥인데, 그 포장지를 휘황찬란하고 먹음직 스러운 장식을 해 놓고 당당하게 먹거리라고 팔아댄다.
그 포장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걸 봐. 너희들도 쓰는 포장지야. 이 향기를 맡아 봐, 너희들이 쓰는 조미료야. 이 색깔을 보렴, 예전에 너희들이 그렇게 찾아 헤메던 색깔 아니냐. 시대가 바뀌었잖아. 이젠 이런 것들도 감내하며 같이 갈 줄을 알아야 해.
흑백논리가 좋지 않다는 것에 동감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겉만 바꾼 불량품을 그동안 줄기차게 싸워왔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성껏 권하는 시대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인지 나는 의심스럽다. 세상은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지만 최소한 똥을 밥이라고 먹이는 시대를 제대로 된 시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