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한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참으로 괴상한 영화다.
한 때 거친 서부의 호한으로 뛰어난 명연기를 보여준 마초 사나이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늙어가면서 뛰어난 제작물로 자신의 노년을 충당하고 있다. 스스로 밝히기를 보수주의자며 마초라고 하는 그 사내가 내어놓은 이 작품은 어쩌면 자신의 영화속 페르소나를 그대로 연장시켜 놓은 선상에 위치한다. 아니, 오히려 더 단순하다.
별다른 갈등구조 없이 '자신과 자신과 대립하는 적수를 상대하는' 일차원의 메타포를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이 영화는 스토리나 작법을 봤을 때 그냥 초기 존웨인의 서부극을 21세기에 리메이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씁쓸함을 곱씹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영화가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거부감이 드는 요소는 바로 주인공 크리스 카일이다. 그는 보수적이며 종교적인(비록 성경은 한 줄도 안 읽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텍사스 출신의 노동자이다. 거칠고, 강인하며, 그 강인함으로 주변인을 보호하는 사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족이 부당한 일을 당한다고 느끼자 바로 총을 잡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간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은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채용되지 않는다. 단순함에서 나오는 내러티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주인공의 사이드킥이나 강인한 적수로 나타나는 법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을 차지한다. 그의 생각은 직선적이고 정치적인 고뇌나 가족에 대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순간 머리를 찌르는 편두통처럼 그를 맞서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으로써의 맹세와 동료의 목숨이다.
크리스 카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전사의 신념이다. 고대 노르드인과 조조의 청주병, 일본 전국시대의 사쓰마번과 같은 인종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에게 삼촌 클로디어스의 등 뒤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갈등같은 것은 그저 사치이고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일족 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본다면 그는 피에 굶주린 악마일 뿐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름은 이 모든 것을 참으로 무미건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입대 전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 같던 행실의 소유자가 입대 후 살인기계가 되어 칭송을 받고, 그 칭송을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 무대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고, 그 인물로 살아가다가 마지막까지 후회없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의 일대기가 투영된다. 거북하기 그지 없던 시작이 마지막까지 거북하게 끝난다. 영화가 끝난 뒤 크리스 카일은 전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냥 신념에 충실한 인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량은 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솔직함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에 있다. 이 영화는 미국 내에서는 훌륭한 애국영화가 될 것이지만 바다 반대편에 서 있는 내게는 출륭한 반전영화요 좀 더 나간다면 반미영화였다. 미르미돈의 생애는 끝까지 미르미돈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내적 갈등과 극적 감동은 이라크 내전에 참가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튀어들어온 가족있는 저격수 무스타파가 훨씬 많이 소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 카일이 주인공이기에 던져준 불편함을 종내 주진 못했으리라.
2001년, 9.11 테러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미국이 아닌 전 세계의 질서를 파괴했다. 무역센터에서 죽은 3000명의 목쑴 뿐 아니라 그동안 세계를 가까스로 돌려오던 무형의 공식을 파괴했다. 세상이 냉전 후 어떻게 돌아갈 것이다라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던 기시감과 가능성이 모두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들이었다. [충격과 공포]라는 말은 어찌 보면 적절한 비유였다. 2001년 이후, 사람들은 세계질서의 흐름에서 이성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범세계적인 무력과 경제적 침탈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맹종자가 생겨났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전사들의 집단이 고대로부터 다시 되돌아왔고, 역사의 불쾌한 역전이 발흥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