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한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참으로 괴상한 영화다.

한 때 거친 서부의 호한으로 뛰어난 명연기를 보여준 마초 사나이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늙어가면서 뛰어난 제작물로 자신의 노년을 충당하고 있다. 스스로 밝히기를 보수주의자며 마초라고 하는 그 사내가 내어놓은 이 작품은 어쩌면 자신의 영화속 페르소나를 그대로 연장시켜 놓은 선상에 위치한다.  아니, 오히려 더 단순하다.


별다른 갈등구조 없이 '자신과 자신과 대립하는 적수를 상대하는' 일차원의 메타포를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이 영화는 스토리나 작법을 봤을 때 그냥 초기 존웨인의 서부극을 21세기에 리메이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씁쓸함을 곱씹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영화가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거부감이 드는 요소는 바로 주인공 크리스 카일이다. 그는 보수적이며 종교적인(비록 성경은 한 줄도 안 읽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텍사스 출신의 노동자이다. 거칠고, 강인하며, 그 강인함으로 주변인을 보호하는 사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족이 부당한 일을 당한다고 느끼자 바로 총을 잡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간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은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채용되지 않는다. 단순함에서 나오는 내러티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주인공의 사이드킥이나 강인한 적수로 나타나는 법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을 차지한다. 그의 생각은 직선적이고 정치적인 고뇌나 가족에 대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순간 머리를 찌르는 편두통처럼 그를 맞서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으로써의 맹세와 동료의 목숨이다. 


 크리스 카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전사의 신념이다. 고대 노르드인과 조조의 청주병, 일본 전국시대의 사쓰마번과 같은 인종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에게 삼촌 클로디어스의 등 뒤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갈등같은 것은 그저 사치이고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일족 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본다면 그는 피에 굶주린 악마일 뿐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름은 이 모든 것을 참으로 무미건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입대 전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 같던 행실의 소유자가 입대 후 살인기계가 되어 칭송을 받고, 그 칭송을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 무대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고, 그 인물로 살아가다가 마지막까지 후회없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의 일대기가 투영된다. 거북하기 그지 없던 시작이 마지막까지 거북하게 끝난다.  영화가 끝난 뒤 크리스 카일은 전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냥 신념에 충실한 인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량은 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솔직함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에 있다. 이 영화는 미국 내에서는 훌륭한 애국영화가 될 것이지만 바다 반대편에 서 있는 내게는 출륭한 반전영화요 좀 더 나간다면 반미영화였다. 미르미돈의 생애는 끝까지 미르미돈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내적 갈등과 극적 감동은 이라크 내전에 참가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튀어들어온 가족있는 저격수 무스타파가 훨씬 많이 소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 카일이 주인공이기에 던져준 불편함을 종내 주진 못했으리라.  




2001년, 9.11 테러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미국이 아닌 전 세계의 질서를 파괴했다. 무역센터에서 죽은 3000명의 목쑴 뿐 아니라 그동안 세계를 가까스로 돌려오던 무형의 공식을 파괴했다. 세상이 냉전 후 어떻게 돌아갈 것이다라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던 기시감과 가능성이 모두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들이었다. [충격과 공포]라는 말은 어찌 보면 적절한 비유였다. 2001년 이후, 사람들은 세계질서의 흐름에서 이성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범세계적인 무력과 경제적 침탈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맹종자가 생겨났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전사들의 집단이 고대로부터 다시 되돌아왔고, 역사의 불쾌한 역전이 발흥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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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다 보니까 일본 개봉판 포스터로...그런데 이 포스터가 제일 영화를 잘 말해준다.)



* 밟히던 자의 분노가 폭발하면 감당하기 힘들다.



-  I giorni dell'ira, 미국말로 [분노의 날](어, 한글이네?) 라고 번역된 이 서부극은 꽤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뛰어난 배우들이 만들어낸 영화다. 편집력과 연출만 좀 더 받쳐줬더라면 굉장한 마스터피스가 될 법한 영화였는데 아쉽게도 연출력 그거 하나가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봐도 참신하고 즐겁고 묵직한 맛이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주연은 [황야의 은화1불]로 유명한 줄리아노 젬마, 그리고 그 상대역은 말이 필요없는 냉혈한 총잡이의 대명사 리 반 클리프. 이 두 사내의 갈등구조가 2시간여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서부극이라기보다는 부조리극에 가깝다.



- 영화의 주인공은 [똥 푸는 사나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직업이 그렇다. 서부극 사상 전무후무한 직업을 가진 이 사나이는 마을의 천덕꾸러기로 술집 작부의 아들로 태어나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허드렛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이. 서글서글한 용모에 심성도 착한지라 매일 구박만 받는다. 사람이 허고헌날 구박 멸시 받으면 당연히 주눅들고 분노가 생기는 법, 이 사내는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당연히 쌓인게 없겠는가. 유일한 취미는 말똥치우다가 옆에서 권총뽑기 연습을 하는 것인데...사람들은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말고 똥이나 치우고 바닥이나 쓸라고 구박한다.


-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을에 진짜배기 총잡이가 들어온다. 간단하게 사람 하나 쏴제끼고 시작하는 이 분은 말 그대로 거칠 것 없는 무법자 양반. 그런데 어쩌다가 이 양반이 이 [똥푸는 청년]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청년은 이 총잡이 양반에게 대충 인생 사는 법을 사사받게 된 뒤 (무법자의 길이다.) 총을 하나 선물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  이 다음부터 마을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벌어진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분노의 날]인가 이해할 수 있는 대목, 그동안 쌓였던 똥사나이의 분노가 불꽃의 쇳덩이가 되어 쏟아지고 그걸 지켜보던 무법자 총잡이는 뒤로 얄팍한 계산을 따로 한다. 그리고 마을의 기득권을 지키던 이들은 이 미친 똥쟁이랑 무법자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다. 이 정신나간 삼각관계가 영화 끝까지 이어지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각 그룹의 인물들은 서부극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저열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정말 인간 막장이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조금 만 더 심층적으로 캐릭터들을 분석했으면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 못지 않은 웨스턴이 하나 나왔을 것 이라고 공언한다.


- 줄리아노 젬마의 멍해보이는 순진한 인상의 연기, 그리고 언제 봐도 잘 벼려진 칼같은 리 반 클리프의 협연은 지금봐도 명연이다. 연출력이 조금만 붙여졌으면 진짜 끝내주는 영화였을 것이다.


- 이 영화는 굉장히 클래식하고 특별한 [화승총 결투]가 나온다. 전장식 소총을 가지고 마상결투하는 기괴한 장면, 굉장히 임팩트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와 별개로 굉장히 유명하고 멋진 작품이다. 가장 최근에 알려진 것으로는

   퀜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언체인드]에서 삽입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ps) 2014년에 내가 쓴 포스팅이 여기저기 멋대로 옮겨 다니며 자기가 쓴 글처럼 포장되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그냥 좀 웃기다. 어디서 가져왔다고 말이나해 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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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웨스턴, 마카로니 웨스턴의 장르를 따라가다 보면 묘한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미국의 정통 서부극과는 다른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이태리 출신의

감독들이 만들고 유럽에서 로케를 한 것이 많은데다 (속 석양의 무법자의 화려한 마지막 공동묘지 장면은 스페인에서 촬영된 것이다) 유럽의 정서상 우익보다는 좌익성향의 색채가 조금씩 묻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1. 돈에 매몰되는 건맨들, 즉 영웅들의 생사여탈권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그리고 있고

2. 배금주의에 의해 망가지는 사회배경이 나타나며

3. 노동자들과 무산계층 찬가 내지는 동정심이 기저에 깔린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집대성 된 역작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옛적 서부에서]인데, 이 영화는 지금 보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걸작 서부극이다. (자그마치 헨리 폰다가 애를 쏴버린다! 요즘은 개도 못 쏘는데!)


그와 더불어 스파게티 웨스턴의 걸작을 뽑아내던 감독이 여기 포스팅을 하는 세르지오 코르부치다.

이 사람이 만든 서부극은 지금도 이름이 금빛으로 남아 찬연히 전해지는데 그 중 몇몇을 이야기하자면

[장고], [나바호 조] [표범, 황혼에 떠나가다] 같은 명작들이다.


사실, 장고와 나바호 조 정도가 가장 유명하긴 해도...이미 두 작품 서부극의 상궤를 약간씩 벗어난 작품이다.

장고는 주인공 주제에 악당처럼 기관총을 상대방에게 갈겨대며 썩은 군부를 난도질하고

나바호 조는 아예 인디언이 주인공으로 나와 백인들 머리가죽을 벗겨댄다. 


하지만 이 영화만 할까. 이 서부극은 상궤가 아니라 아예 선로를 깔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위대한 침묵 (the great silnce) - 동명인 수도사들의 침묵영화와 헛갈리지 말자] 이다.



네바다의 눈덮인 산맥, 물산이 핍절한 산골 주민들은 고육지책으로 강도떼가 된다. 그들을 없애려고 바운티 헌터들이 그들을 찾아 온다. 산골 주민들은 킬러를 고용한다. 그 중간에서 보안관은 이도저도 안된다. 그리고 갈들이 폭발하고

사람들은 떼거지로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는 자는 살아남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서부극 사상, 유일하게 뿌연 먼지대신 하얀 눈벌만 잔뜩 나오는 영화. 배경부터 범상치 않은 것처럼 이 영화는 모든 서부극의 틀을 부숴버리고 결말마저 뒤틀린 채 끝나버린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일반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부류이다. 이 삐딱하고 냉소적인 시선은 주인공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봐도 악당인 클라우스 킨스키와, 선역이라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 사일런스 장 루이 트렝티냥의 대결은 기이한 대결로 시작해서 기이한 대결로 끝난다.  아마 개봉당시에도 말이 많았는지 아예 얼터 엔딩이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지금 남아서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 몇이나 될까?

광인 클라우스 킨스키도 죽었고, 감독 코르부치도 고인이 되었다.

남은 사람은 영화 [아모르]로 아직 건재함을 보여준 노인 , 장 루이 트렝티냥


그리고 어울리지 않은 서정적인 스코어를 남겨 준 엔리오 모리코네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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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코른골드의 동년- 아니면 바로 그 아랫세대에 해당하는 미클로스 로자는 상업적 창작과 순수창작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전형적인 후기 낭만주의의 관현악을 구사하면서도 바그너 풍의 등장인물 별 도입동기를 가져와 후대의 영화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특히나 그의 절제되고 웅장한 대관현악풍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회자대는 명작들을 '명작의 반열'에 오르도록 한 일등공신이다.


안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한 번 미클로스 로자의 음반을 가지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미친듯이 한 번 질러보라는 지름신이 몰아닥쳐 그냥 충동적으로 이 양반의 음반을 하나 구매했다. 어차피 좋아하는 음악가라면서 음반 하나 없는 애호가라는게 말이 되나.



솔직히 내가 이 중에 본 것이나 익숙한 노래라고 해 봤자 [벤-허]나 [엘 시드] [왕 중 왕]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CD무지막지한 3CD 안에 그동안 미클로스 로자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노래들을 컴필레이션격으로 때려넣었다. 22분에 달하는 스펠바운드 콘체르토를 실어놓는다던가, 바그다드의 도둑, 페도라같은 이제는 연주되지도 않는 상황이니 좋은 선택이었다.....

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


[벤허]의 테마를 듣는데 이거 내가 귀에 듣던 곡이 아닌 것이다. 엘시드의 노래도 내가 듣던 노래만 뭔가 차이가 있는데...아뿔사, 나중에 웹을 뒤져봤더니 미클로스 로자 음악 해석에 있어서는 최악이라고 말하는 리하르트 뮬러가 지휘한 노래가 수두룩 빽빽하게 들어있는 것 아닌가. 더 웃긴건 [엘시드]의 경우, 서곡과 메인 테마를 리하르트 뮬러가 지휘한 것과 엘머 번스타인(레너드 번스타인이 아니다. 7인의 신부를 작곡한 그 분)의 지휘곡이 같이 들어 있는데 엘머 번스타인의 곡 해석이 훨씬 매끄럽다는 것. 


돈버렸다고 혼자 슬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 번 들어보자고 마음먹고 하나를 더 질러버렸다.




소니에서 만들어낸 괴작CD, 벤허 스코어를 원작자 미클로스 로자의 지휘한 음반이다. 문제는 이게 2CD라는 것. 영화 하나에 들어간 노래가 무슨 2cd냐고 투덜댔는데, 이 음반은 첫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나온 음악을 고스란히 다 집어넣었다. 장면전환에나 나올 법한 10초짜리 변주곡까지 다 넣어 둔 음향소스에 가까운 버전이다. 덕분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장면을 음악과 함께 다시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음악과 원곡과는 조금 다른 것도 있더라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고.


결론: 지름질 함부로 하지 말아야 겠다. 영화음악 하나 듣는데 산 CD만 다섯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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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JM군에게 ABE88권을 대여받고 근 5년을 애지중지 보관하다가 드디어 돌려줄 날이 다가왔다. 사실 책을 사는 것만큼이나 책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특히나 맘에 드는 책을 보다가 다시 줘야 하는 경우는 감상이 남다른데, 이럴 때는 내가 뭘 가장 재미있게 봤던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88권 모두 양질의 서적인지라 어떤 것을 가장 재미있게 봤는지 고르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누군가에게 가장 추천을 해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집을 것이다. 호르스트 부르거의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원제는 아마 [아빠는 왜 유겐트가 되었수] 뭐 그런 종류의 르포형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줄거리 자체가 20세가 되기 전에 2차대전을 겪은 잔인한 성장기가 기반이다.

히틀러 유겐트 뭐빠지게 쫓아다니다가 죽음 직전에 겨우 살아 돌아오는 소년병사 종생기.


 원제도 그럴듯 하긴 하지만 아마 저 제목으로 내가 접했으면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 이 제목은 이 책의 줄거리를 관통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현재의 아들이 나치였던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왜 유태인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대했습니까

2. 히틀러 유겐트라는 걸 왜 만들었습니까?   

3. 왜 어린애까지 전쟁에 참여했습니까?

4. 전쟁이 끝나고 나치즘은 사라졌나요?


난 솔직히 이 책을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내가 JM군에게 양도받기 전, 내가 ABE를 소유하고 있던 시절부터 합해서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게 고등학교 부터인지 대학생이 되어서인지 생각은 나지 않는데 하여간 그 정도는 읽었다. 1번부터 3번까지는 쉽게 읽혔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뻔한 내용 아닌가. 추석때 주구장창 들어주는 [레마겐의 철교]만 봐도 전쟁이 얼마나 병신같고 머저리같은 짓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이 당시에 단체로 정신나간 짓거리를 해 댔다는 것 정도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그 때까지는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불쌍하고 어리숙한 주인공의 바보같은 인생역정을 보면서 "지도자 잘못 만난 국민이 고생이 막심하네."수준의 감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4번째 질문이 나오는 챕터부터는 대체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그냥 사회부적응자의 이야기 같기도 설교 같기도 하니...내가 이해를 할 수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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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년 전부터인가.

갑자기 이 책이 무지하게 보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JM군에게 빌리자 마자 이 소설부터 다시 읽어봤다.


마지막 네번째 질문이 뭔지 다시 꺼내서 펴 보는데

서른 중반 넘어가는 나이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 책은 1976년에 발간된 소설이고, 부르거 선생은 75년에 책 출간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무덤속에서 고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을 난 이미 보았노라."

그제서야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 이미 부르거는 참여없는 민주주의의 몰락과 민주주의 1세대의 한계와 다시 튀어나올 파시즘의 광기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그 이야기가 뭔지 어렸을 적에는 몰랐던 것이며, 그게 무엇인지 몸으로 때운 뒤에야 선대가 써 놓은 경고문을 읽을 지혜가 생긴 것이었다. 


"국민이 사상의 자유보다 더 잘살기를 바랄 때 그런 사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지독한 일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옛날에 받은 교육의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꽤 많다. 고집 세고 싸움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도이칠란트를 또 다시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히틀러의 등장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집단의 광기에 대한 견제가 없고, 참여가 없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중을 바보로 만들고 그 바보는 다시금 괴물이 되어서 자기 몸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가 애들보는 동화에 실려 있었다. 1970년대에 나온 소설의 내용을 온 몸으로 경헙하고 있는 나는 지금 어디 동굴 속의 사람인가 아니면 독일 애들이 일찌감치 호되게 멍석말이를 당한 것이가.


각설하고, 이 책은 내가 나중에라도 한 권 별도로 사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이책은 꼭 읽히고 싶다.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 자식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체제에 적응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필요한 도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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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산업동력이자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비]라는 계층은 그 존재와 처우에 대해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관조적인 위치로 보이는 집단이기도 하다.  갑오 경장 이후, 모든 사람들이 신분제가 혁파되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성씨를 가지고 있고 그 성씨의 연원은 번쩍번쩍한 귀족이거나 왕족, 심하면 신화속의 인물까지 소급된다. 이런 형편에 100년 전에 살던 내 조상 노비가 누구인지 알 필요성도 없고 그 계층이 조상인지 뭔지 관심조차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 조상이 현실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보다 언젠가부터 내 이름 앞에 붙는 성씨로 인해 붙는 비현실적 족보를 탐구하는 것이 우리 정신건강에 훨씬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노비의 삶을 사료와 더불어 정리하고 있다. 가벼운 야사들과 민담을 몽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구체적인 부분은 정사와 통계를 통해 실증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한마디로 조선은 노비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갑자기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진다.

조선은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돌아가는 국가였다.



국방부터 경제에 이르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선은 노비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곳이었다. 정부는 그래서 노비를 꾸준히 증가시켰고, 양인의 수를 억제했으며, 국가의 소유와 양반의 소유로 노비들을 묶어두는데 전력을 다 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법률은 노비를 어떻게 하면 계속 양산하며 [무한동력]을 끌어 내 체제의 존속을 가져오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양반 못지않은 권세를 지닌 노비도 있었고 학문을 하는 노비도 있었지만 결국, 노비는 생산력의 원천으로 존재 의의를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뒤 드는 생각은 기묘했다.

지금 내 처지와 조선시대 노비의 처지는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정부의 일관된 정책은 신분제 고착을 통한 체제유지였고, 체제유지를 통한 엄혹한 형벌이 주가 되었으며, 경제활동과 세수확보를 위한 끊없는 회수작용,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원한 착취]기 그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이 정확하게 통제된 성문화된 법에 의해서 움직였고, 조선의 시스템은 소름끼치도록 체계화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노비로 산다는 게 당시에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대부분이 그렇게 사는데 뭐가 억울하지? 옆집도 앞집도  나랑 똑같이 살고  내 부모도 그렇게 살다 갔는데 말이다. 세금이야 당연히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내는 것이고, 재벌들과 권력가의 집안이야 나하고 팔자가 다른 집안인데 비교가 가능이나 하냐 그 말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발전 과정은 지구상 어떤 나라들보다도 후진성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이런 기괴한 의문이 들게 하는 책. 노비에 대한 책. 내 조상들에 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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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見.聽,感 2012. 12. 29. 14:24

빅토르 위고 원작의 레미제라블은 이미 국민학교 시절부터 읽었고, 그 때도 참 구구절절한 인간사로구나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조금 뒤 청소년기에 들어가서 교회생활에 심취해 있을 때에는 '아 주님의 은혜는 이렇게 죄인의 삶을 통째로 바궈주시는구나."하면서 감동하며 읽었다.


그리고 지금 중년의 삶이 왔을 때는 역사적인 배경이 보이더라. 혁명 이후 다시 반동의 세력이 정권을 잡고 그 기나긴 시간동안 일과가 되어버린 투쟁의 나날, 타파되었다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계급의 그늘, 살기좋은 세상을 찾아 일으킨 혁명으로 점점 빈곤해지는 일상사와 약유강식. 아마 빅토르 위고는 이것을 기반으로 신앙적 바탕 안에 극적 장치를 설정했을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공화주의자였다. 복고의 시절을 견디지 못해 망명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본 프랑스의 형국은 절대로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초장이 아니었으리라.


어저께 뮤지컬을 각색한 영화 [레 미제라블]을 봤다. 나름대로 발성좋은 배우들의 연기였으니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오히려 뮤지컬에서 볼 수 없었던 구도와 클로즈업의 묘미가 극적 감동을 더 가져왔달까. 재미있었다. 남의 나라 혁명과 거지의 이야기니까 극장에서 봤지 이게 대한민국 극작가가 쓴 글이었다면 아마 그 작가는 구속되거나 지금쯤 코렁탕을 먹고 있을 법 하다.


각설하고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책으로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 하나는

남주인공 [마리우스]가 관여했던 학생운동은 처절하게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책을 동화판으로 봐서 그랬나 아니면 로맨스에 몰입해서 숲이 안 보였던가? 아무런 고통과 회환도 없이 그저 슬쩍 지나가 버리는 혁명과 운동의 실패. 빅토르 위고도 별 다른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 뮤지컬이 축약을 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덤덤하게 지나가 버리는 혁명의 실패는 뒤 이어 나오는 코제크와 마리우스의 혼약에 묻혀버린다.


아마도 한국이었다면 불굴의 의지로 혁명이 성공하며 피에 물든 태극기를 날리는 민중들의 아우성으로 영화의 대망이 끝났겠지만 레미제라블은 그렇지 않았다. 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을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왜 그랬을까.


아.

결론은 우리나라의 축약된 역사였다. 

프랑스는 혁명만 80년 가까이 끌어오면서 민주주의를 가져온 나라다. 사사오입해서 백년간 자국의 투쟁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는 19년을 망명으로 보냈다. 한 두해 한다고 성공하고, 한 두명 대통령 민선으로 뽑힌다고 짜잔 나타나는게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흐름에 대한 인내, 희망에 대한 장구한 믿음이다. 피가 흐르고 흘러서 겨우겨우 맺히는 게 민주주의의 씨앗이거늘. 우리는 기껏해야 20년 아닌가. 아직도 60년이 남았고, 두 세대가 더 가야 하는 것인데.


언젠가 그 날이 오리라. 희망으로 노래하던 레미제라블의 엔딩이 오늘 아침에서야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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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이 후생하여 너 나되고 나 너되어

내 너 그려 긏던 애를 너도 날 그려 긏여보면

이 생에 내 설워하던 줄을 너도 알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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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에서 조공으로 팔려갔던 기씨 처자가 황제의 눈에 들어 기황후가 된 뒤에 갑자기 바뀌게 된 고려의 위상 (씨발...이게 자랑인가. 하긴 전엔 사위의 나라였다지.) 덕에 문물의 교류가 많아지자 당시 역관들에게 원나라 생활중국어 교범이 생겨났다. 이것이 [박통사]라는 것이다. 이 책은 나중에 계속 증보 번역되어서 조선시대에도 역관들의 TOEIC교재가 되었다. 읽어보면 별 말 없다. 헬로 스미스 하우아유 파인, 하우머치 이스 디스, 갓 댐 베리 익스펜시브 같은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당시의 풍습과 인물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랄까...그런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글이다.



기자들의 취채기는 재미있다기 보다 "이걸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양지에 사는 이들에게 음지의 실상을 알려주는 일은 참으로 거북한 일이다. 유영철 사건이후의 챕터를 읽어보려다가 잠시 덮었다. 주진우는 우상이 아니고, 그 역시 언제 타락할 지 모르는 연약한 인간유형이다. 그러나 그가 만나보고 취재한 음지의 인간들(하지만 모두 햇볕 아래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성공한 인간들이라는 게 문제지)을 지면으로 봤을 때 나오는 토악질이라는 게 만만치않다. 기자라는 직업은 장수하기에도 힘들고, 지조를 지키기도 힘들고 건강을 지키기도 힘든 직업이다.

진짜 기자라면.


중국도시사 (시바 요시노부: 서경문화사) - 중국의 기이한 도시형성과정을 서사적으로, 도시행정학적으로 풀어낸 학술서. 중세 유럽의 성문화나 별반 다를게 없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지는 것이 강하유역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상권과 객가인의 군집성. 그리고 도저히 기록에 남길수도 없는 수많은 이합집산의 중국인의 흐름. 그냥 성곽문화라고 중국을 이해하는 게 빠를 듯 싶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어려 성의 합일체이다.



복장과 배경, 풍경에 관해서 오타구의 범위를 넘어서 강박증까지 보이는 모리카오루의 작품.

전작 [엠마] 에서 산업사회 영국 메이드의 생활을 손에 닿을듯이 그린 작가가 이번에는

중앙아시아의 새색시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린다. 꼬마신랑과 아리따운 새색시 이야기.


아 그런데 너무 매력적이야. 이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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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그 위대한 언어.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활동은 인간이 활용하는 사회적 의사표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기에, 반대급부로 음성이 없는 상황의 의사소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은 그렇게 이루어져왔고, 그 안에서 꽃핀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오페라나 연극이나 가면극이나 산대극이나, 결국 음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통사적 문화발전 속에서 '무성영화'라는 장르는 인간이 만들어낸 수 많은 예술장르 중 정말 묘한 위치에 있는 녀석이다. 무언극이나 종교적 함의를 지닌 특정계층의 문화활동이 아닌 대중예술이며 발명에 의해 태어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술의 한계에 의해 음성을 같이 싣지 못해 음악과 배우들의 표정, 그리고 시각효과인 자막에 의지한 장르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일반 연극보다 훨씬 스피디한 편집과 전개. 연극배우들이 갖지못하는 무성영화배우들의 과장된 연극적 표현, 더불어 자막과 화면이라는 시각에만 의지하는 관객의 상상력 고양이었다. 그 덕에 무성영화 배우들은 눈과 입매에 짙은 화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흑백의 명암 속에서 확실한 감정표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겠지.) 이목구비의 선이 굵은 명배우들이 당시 은막을 선도했다.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 아티스트의 주인공 [조지 발렌틴]의 이름은 여기서 온 것 같다.)

2.
나는 찰리채플린의 영화를 참 좋아했었다. 씨네하우스가 강남에 남아있을 당시, 동생을 꼬드껴서 매일 채플린을 보러 갔었다.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코미디는 긴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대사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단점이면서 엄청난 강점을 지닌다. 관객의 집중도가 엄청날 뿐 아니라, 자막으로 나오지 않는 시퀀스의 대사는 자기가 머릿속으로 다 혼자 상상하는 것이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장면마다 엄청난 풍성함을 관객에게 안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단점이었다. 놓치면 뭔지 모른다. 설레설레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보게 되는 거다. 그래서 보다 '친절'하고 '혁신'적인
[유성영화]의 시대가 온 것일게다. 아티스트에 나오는 존 굿맨의 이야기처럼 "관객은 스타의 목소리를 듣고싶어!" 하는 가외적인 이유도 있을 테고 말이다.

3.
이 영화는 그 중간 시절, 잘 나가는 무성영화 배우와 새롭게 떠오르는 유성영화의 신예 사이에 꽃피는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영화다. 채플린 이후 처음 보는 진짜 무성영화였다.
그런데 풍성하더라. 어릴적과 같은 시퀀스의 짜임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더라. 내가 주연배우의 말을 상상하고 흑백 전경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꿈같은 체험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나오는 음악소리가 현실로 돌아가라는 알람처럼 들려서 신경이 날카로와질 지경이었다.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호연은 보너스였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침묵 사이에 울려퍼지는 스크립트의 풍성함. 말 없이 은막 밖의 관객에게 말하는 배우의 표정. 그리고 여백을 채우는 나 자신.

즐거웠다는 말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 올라갈 것이다. 어쩌면 상상보다 많은 부분을 수상할지도 모르겠다.
고향 집에 돌아간 이국에서 만들어진 조상의 사진첩이니까. (감독과 주연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원래 허리우드의 일대기 아닌가. 그리고 미국사람들...역사가 짦아서 그런지 전통이라면 또 꿈벅 죽으니까.

한 번 기대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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