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 위대한 언어.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활동은 인간이 활용하는 사회적 의사표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기에, 반대급부로 음성이 없는 상황의 의사소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은 그렇게 이루어져왔고, 그 안에서 꽃핀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오페라나 연극이나 가면극이나 산대극이나, 결국 음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통사적 문화발전 속에서 '무성영화'라는 장르는 인간이 만들어낸 수 많은 예술장르 중 정말 묘한 위치에 있는 녀석이다. 무언극이나 종교적 함의를 지닌 특정계층의 문화활동이 아닌 대중예술이며 발명에 의해 태어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술의 한계에 의해 음성을 같이 싣지 못해 음악과 배우들의 표정, 그리고 시각효과인 자막에 의지한 장르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일반 연극보다 훨씬 스피디한 편집과 전개. 연극배우들이 갖지못하는 무성영화배우들의 과장된 연극적 표현, 더불어 자막과 화면이라는 시각에만 의지하는 관객의 상상력 고양이었다. 그 덕에 무성영화 배우들은 눈과 입매에 짙은 화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흑백의 명암 속에서 확실한 감정표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겠지.) 이목구비의 선이 굵은 명배우들이 당시 은막을 선도했다.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 아티스트의 주인공 [조지 발렌틴]의 이름은 여기서 온 것 같다.)
2.
나는 찰리채플린의 영화를 참 좋아했었다. 씨네하우스가 강남에 남아있을 당시, 동생을 꼬드껴서 매일 채플린을 보러 갔었다.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코미디는 긴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대사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단점이면서 엄청난 강점을 지닌다. 관객의 집중도가 엄청날 뿐 아니라, 자막으로 나오지 않는 시퀀스의 대사는 자기가 머릿속으로 다 혼자 상상하는 것이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장면마다 엄청난 풍성함을 관객에게 안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단점이었다. 놓치면 뭔지 모른다. 설레설레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보게 되는 거다. 그래서 보다 '친절'하고 '혁신'적인
[유성영화]의 시대가 온 것일게다. 아티스트에 나오는 존 굿맨의 이야기처럼 "관객은 스타의 목소리를 듣고싶어!" 하는 가외적인 이유도 있을 테고 말이다.
3.
이 영화는 그 중간 시절, 잘 나가는 무성영화 배우와 새롭게 떠오르는 유성영화의 신예 사이에 꽃피는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영화다. 채플린 이후 처음 보는 진짜 무성영화였다.
그런데 풍성하더라. 어릴적과 같은 시퀀스의 짜임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더라. 내가 주연배우의 말을 상상하고 흑백 전경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꿈같은 체험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나오는 음악소리가 현실로 돌아가라는 알람처럼 들려서 신경이 날카로와질 지경이었다.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호연은 보너스였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침묵 사이에 울려퍼지는 스크립트의 풍성함. 말 없이 은막 밖의 관객에게 말하는 배우의 표정. 그리고 여백을 채우는 나 자신.
즐거웠다는 말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 올라갈 것이다. 어쩌면 상상보다 많은 부분을 수상할지도 모르겠다.
고향 집에 돌아간 이국에서 만들어진 조상의 사진첩이니까. (감독과 주연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원래 허리우드의 일대기 아닌가. 그리고 미국사람들...역사가 짦아서 그런지 전통이라면 또 꿈벅 죽으니까.
한 번 기대해 보련다.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활동은 인간이 활용하는 사회적 의사표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기에, 반대급부로 음성이 없는 상황의 의사소통은 상상하기 힘들다.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은 그렇게 이루어져왔고, 그 안에서 꽃핀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오페라나 연극이나 가면극이나 산대극이나, 결국 음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런 통사적 문화발전 속에서 '무성영화'라는 장르는 인간이 만들어낸 수 많은 예술장르 중 정말 묘한 위치에 있는 녀석이다. 무언극이나 종교적 함의를 지닌 특정계층의 문화활동이 아닌 대중예술이며 발명에 의해 태어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술의 한계에 의해 음성을 같이 싣지 못해 음악과 배우들의 표정, 그리고 시각효과인 자막에 의지한 장르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일반 연극보다 훨씬 스피디한 편집과 전개. 연극배우들이 갖지못하는 무성영화배우들의 과장된 연극적 표현, 더불어 자막과 화면이라는 시각에만 의지하는 관객의 상상력 고양이었다. 그 덕에 무성영화 배우들은 눈과 입매에 짙은 화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흑백의 명암 속에서 확실한 감정표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겠지.) 이목구비의 선이 굵은 명배우들이 당시 은막을 선도했다.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 아티스트의 주인공 [조지 발렌틴]의 이름은 여기서 온 것 같다.)
2.
나는 찰리채플린의 영화를 참 좋아했었다. 씨네하우스가 강남에 남아있을 당시, 동생을 꼬드껴서 매일 채플린을 보러 갔었다.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의 코미디는 긴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대사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단점이면서 엄청난 강점을 지닌다. 관객의 집중도가 엄청날 뿐 아니라, 자막으로 나오지 않는 시퀀스의 대사는 자기가 머릿속으로 다 혼자 상상하는 것이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장면마다 엄청난 풍성함을 관객에게 안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단점이었다. 놓치면 뭔지 모른다. 설레설레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보게 되는 거다. 그래서 보다 '친절'하고 '혁신'적인
[유성영화]의 시대가 온 것일게다. 아티스트에 나오는 존 굿맨의 이야기처럼 "관객은 스타의 목소리를 듣고싶어!" 하는 가외적인 이유도 있을 테고 말이다.
3.
이 영화는 그 중간 시절, 잘 나가는 무성영화 배우와 새롭게 떠오르는 유성영화의 신예 사이에 꽃피는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영화다. 채플린 이후 처음 보는 진짜 무성영화였다.
그런데 풍성하더라. 어릴적과 같은 시퀀스의 짜임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더라. 내가 주연배우의 말을 상상하고 흑백 전경 너머에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꿈같은 체험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마지막에 나오는 음악소리가 현실로 돌아가라는 알람처럼 들려서 신경이 날카로와질 지경이었다.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호연은 보너스였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침묵 사이에 울려퍼지는 스크립트의 풍성함. 말 없이 은막 밖의 관객에게 말하는 배우의 표정. 그리고 여백을 채우는 나 자신.
즐거웠다는 말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에 올라갈 것이다. 어쩌면 상상보다 많은 부분을 수상할지도 모르겠다.
고향 집에 돌아간 이국에서 만들어진 조상의 사진첩이니까. (감독과 주연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원래 허리우드의 일대기 아닌가. 그리고 미국사람들...역사가 짦아서 그런지 전통이라면 또 꿈벅 죽으니까.
한 번 기대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