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JM군에게 ABE88권을 대여받고 근 5년을 애지중지 보관하다가 드디어 돌려줄 날이 다가왔다. 사실 책을 사는 것만큼이나 책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특히나 맘에 드는 책을 보다가 다시 줘야 하는 경우는 감상이 남다른데, 이럴 때는 내가 뭘 가장 재미있게 봤던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88권 모두 양질의 서적인지라 어떤 것을 가장 재미있게 봤는지 고르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누군가에게 가장 추천을 해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집을 것이다. 호르스트 부르거의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원제는 아마 [아빠는 왜 유겐트가 되었수] 뭐 그런 종류의 르포형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줄거리 자체가 20세가 되기 전에 2차대전을 겪은 잔인한 성장기가 기반이다.

히틀러 유겐트 뭐빠지게 쫓아다니다가 죽음 직전에 겨우 살아 돌아오는 소년병사 종생기.


 원제도 그럴듯 하긴 하지만 아마 저 제목으로 내가 접했으면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 이 제목은 이 책의 줄거리를 관통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현재의 아들이 나치였던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왜 유태인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대했습니까

2. 히틀러 유겐트라는 걸 왜 만들었습니까?   

3. 왜 어린애까지 전쟁에 참여했습니까?

4. 전쟁이 끝나고 나치즘은 사라졌나요?


난 솔직히 이 책을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내가 JM군에게 양도받기 전, 내가 ABE를 소유하고 있던 시절부터 합해서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게 고등학교 부터인지 대학생이 되어서인지 생각은 나지 않는데 하여간 그 정도는 읽었다. 1번부터 3번까지는 쉽게 읽혔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뻔한 내용 아닌가. 추석때 주구장창 들어주는 [레마겐의 철교]만 봐도 전쟁이 얼마나 병신같고 머저리같은 짓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이 당시에 단체로 정신나간 짓거리를 해 댔다는 것 정도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그 때까지는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불쌍하고 어리숙한 주인공의 바보같은 인생역정을 보면서 "지도자 잘못 만난 국민이 고생이 막심하네."수준의 감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4번째 질문이 나오는 챕터부터는 대체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그냥 사회부적응자의 이야기 같기도 설교 같기도 하니...내가 이해를 할 수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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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년 전부터인가.

갑자기 이 책이 무지하게 보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JM군에게 빌리자 마자 이 소설부터 다시 읽어봤다.


마지막 네번째 질문이 뭔지 다시 꺼내서 펴 보는데

서른 중반 넘어가는 나이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 책은 1976년에 발간된 소설이고, 부르거 선생은 75년에 책 출간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무덤속에서 고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을 난 이미 보았노라."

그제서야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 이미 부르거는 참여없는 민주주의의 몰락과 민주주의 1세대의 한계와 다시 튀어나올 파시즘의 광기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그 이야기가 뭔지 어렸을 적에는 몰랐던 것이며, 그게 무엇인지 몸으로 때운 뒤에야 선대가 써 놓은 경고문을 읽을 지혜가 생긴 것이었다. 


"국민이 사상의 자유보다 더 잘살기를 바랄 때 그런 사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지독한 일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옛날에 받은 교육의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꽤 많다. 고집 세고 싸움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도이칠란트를 또 다시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히틀러의 등장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집단의 광기에 대한 견제가 없고, 참여가 없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중을 바보로 만들고 그 바보는 다시금 괴물이 되어서 자기 몸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가 애들보는 동화에 실려 있었다. 1970년대에 나온 소설의 내용을 온 몸으로 경헙하고 있는 나는 지금 어디 동굴 속의 사람인가 아니면 독일 애들이 일찌감치 호되게 멍석말이를 당한 것이가.


각설하고, 이 책은 내가 나중에라도 한 권 별도로 사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이책은 꼭 읽히고 싶다.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 자식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체제에 적응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필요한 도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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