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산업동력이자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비]라는 계층은 그 존재와 처우에 대해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관조적인 위치로 보이는 집단이기도 하다. 갑오 경장 이후, 모든 사람들이 신분제가 혁파되기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성씨를 가지고 있고 그 성씨의 연원은 번쩍번쩍한 귀족이거나 왕족, 심하면 신화속의 인물까지 소급된다. 이런 형편에 100년 전에 살던 내 조상 노비가 누구인지 알 필요성도 없고 그 계층이 조상인지 뭔지 관심조차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 조상이 현실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보다 언젠가부터 내 이름 앞에 붙는 성씨로 인해 붙는 비현실적 족보를 탐구하는 것이 우리 정신건강에 훨씬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조선시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노비의 삶을 사료와 더불어 정리하고 있다. 가벼운 야사들과 민담을 몽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구체적인 부분은 정사와 통계를 통해 실증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한마디로 조선은 노비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갑자기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달라진다.
조선은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돌아가는 국가였다.
국방부터 경제에 이르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선은 노비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곳이었다. 정부는 그래서 노비를 꾸준히 증가시켰고, 양인의 수를 억제했으며, 국가의 소유와 양반의 소유로 노비들을 묶어두는데 전력을 다 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법률은 노비를 어떻게 하면 계속 양산하며 [무한동력]을 끌어 내 체제의 존속을 가져오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양반 못지않은 권세를 지닌 노비도 있었고 학문을 하는 노비도 있었지만 결국, 노비는 생산력의 원천으로 존재 의의를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뒤 드는 생각은 기묘했다.
지금 내 처지와 조선시대 노비의 처지는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정부의 일관된 정책은 신분제 고착을 통한 체제유지였고, 체제유지를 통한 엄혹한 형벌이 주가 되었으며, 경제활동과 세수확보를 위한 끊없는 회수작용,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원한 착취]기 그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이 정확하게 통제된 성문화된 법에 의해서 움직였고, 조선의 시스템은 소름끼치도록 체계화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노비로 산다는 게 당시에는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대부분이 그렇게 사는데 뭐가 억울하지? 옆집도 앞집도 나랑 똑같이 살고 내 부모도 그렇게 살다 갔는데 말이다. 세금이야 당연히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내는 것이고, 재벌들과 권력가의 집안이야 나하고 팔자가 다른 집안인데 비교가 가능이나 하냐 그 말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발전 과정은 지구상 어떤 나라들보다도 후진성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이런 기괴한 의문이 들게 하는 책. 노비에 대한 책. 내 조상들에 대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