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軻宿'에 해당되는 글 1419건

  1. 2014.03.12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사들
  2. 2014.02.07 친구
  3. 2014.01.05 2014년
  4. 2013.12.18 안녕들 하십니까
  5. 2013.12.17 연습
  6. 2013.11.21 아무리 좋다한들
  7. 2013.11.05 안다는 것과 가르치는 것 1
  8. 2013.09.20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 호르스트 부르거 2
  9. 2013.07.31 책 읽어주는 남자 3
  10. 2013.06.26 신의없음 3

1. 지난 달 12일자로 나도 아빠가 되었다.

   이건 개인적으로 우주만큼 큰 일이니 소사(小事)라고 하기는 뭣한 감이 있지만, 현재 지구에는 초당 4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있으니 범지구적으로 보건 국가적으로 보건 그리 큰 일은 아닐 성 싶다. 한 생명의 탄생이 계량화되면 정말 별 볼 일 없어지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수미산 같은 것이 떨어진 기분이다.


2. 아이가 쉽게 나오지 않아 난산을 거듭했다. 지금 뒷머리도 혹이 나오고 여기저기 구불구불하고 하여간 그렇다. 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제왕절개를 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고, 이렇게 힘들게 낳고 돈이 깨질 줄 알았다면 태아보험을 들것을 그랬다고 후회한다. 뭐 어쩌랴. 인생은 원래 내가 빼먹은 과거지사에 대한 후회의 연속인데. 어쩌다 보니 내 첫 아들은 부부의 후회속에서 아둥바둥 탄생하게 된 꼴이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회한을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시작하는 법인데 내 자식은 아예 생득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철 든 상태에서 커 나갈지도 모르겠다.


3.  이것저것돈 들어갈 일은 많고, 회사는 때려치기로 마음 먹고, 글은 제대로 써 지지 않는데 정작 집에 오면 아이때문에 쉴 수가 없으니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기운 나는 시절은 아니다. 아내는 아이를 보면서도 왜 울적해 하느냐며 우울해 한다. 하지만 이게 내 천성인 걸 어쩌랴. 기쁜 마음도 들지만 그 전에 내 주변 환경에 대한 긴장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되니 어쩔 수 없다. 난 어렸을 적에 서른이 넘어가면 인생의 나머지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 풀릴 줄 알았다. 서른이 되었을 때는 마흔 정도 되면 반 정도 해결될 줄 알았다.


마흔이 되니 모든 것이 미련한 상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4. 뭔가 계속 쓰고 끄적대는 것도 훈련이다. 10년을 한 길로 매진하면 최소한 그 분야에서 밥은 먹고 못 살지언정 어디가서 헛소리로 한나절을 제낄 정도는 되어야 한다.(그렇게 믿는다.) 그러면 뭐가 되었건 계속 쓰면서 나 자신을 연마하는 수 밖에 없다. 어찌보면 인생이란 게 이런 부질없고 기약없는 단순반복적인 행위가 모여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창조하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늙어가는 것일지도 모르지. 내가 어찌 아나. 아직 마흔밖에 안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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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작은 방 한담 2014. 2. 7. 00:33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원래 사회성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몇몇, 정말 말 그대로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선에서 끝나는 내 우정의 한계는 그래서 그런지 뭔가 모를 집착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사는 결혼을 한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 같다.


예전 젊은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어떠면 이 짦은 찰나의 순간 가운데 가장 영원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황금문자로 칠해진 내 인생의 유일한 부분 - 우정일 것이고 그것은 절대로 퇴색되지 않을 것이고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이제 우리의 삶은 부드러운 감촉이 다 하고 닳고 늘어붙어서 팍팍하고 거친 면들이 계속 나오고

가족이라는 또 다른 울타리로 내 삶이 둘러쳐지고

내가 꾸려가야 하는 삶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차안대가 씌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 친구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풍문으로 들었다.

뭔가 해 주고 싶은 생각이 가슴 속에 있는데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이 없고

이제 우리는 선의를 선의로 곱게 받을 수 없는 자존심이 있는 가장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무언가 진심은 통하지만

그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알 때


우정이라는 것 또한 사랑만큼이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걸 보게 된다.

이건 단순한 상실감의 슬픔이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아픔인 것 같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상실감보다 강하다는 것을

늘 깨닫고 깨닫는 순간


누구나 겪는 인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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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작은 방 한담 2014. 1. 5. 23:24

허위허위 살다보니 벌써 2014년이 되었다.

40년이 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40년이 넘도록 뭐 하나 이룬 것이 없을 거라고

내 젊은 시절 언제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올 해 다행스럽게도 자식이 태어난다.

평생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 세운 계획대로 인생이 이뤄질 것을 희망하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일은 드물고, 예상치 않았던 일에 대비하는 지혜를 갖추는 시간은 제 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닥친 일중에 헤어나지 못할 일 또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아니, 이것은 지혜가 아니라 학습일 것이다.


2014년은 아무쪼록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일어나고

내가 행할 일들이 과하지 않을 것을 바라며

내가 원하는 것들의 십분지 일이라고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소망하는 것들이 더 이상 작아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여전히 넓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겁먹고 소극적이 되는 것을 철이 든다는 미명으로 포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이 존속하기를 또한 소망하고, 개들은 어둠으로 꺼지고 사람이 양지로 나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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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전후시절, 50-60년대 살아가던 내 아버지 시대의 사람들은 인사가 이러하였습니다. 밥은 먹었습니까.

그 뒤 군사 쿠데타와 군사정권을 살아왔던 내 윗 시절의 사람들 인사는 이러하였습니다. 밤 새 안녕하셨습니까


민생고의 핍절함으로 인해 생존의 여부가 달렸던 시대에 밥을 먹었느냐는 말은 말 그대로 잘 살아 하룻밤을 넘길 만큼 건강하냐는 이야기였고, 억압과 폭거의 시대에 둥글게 살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안위가 어떻게 될 지 모르던 시대에 밤을 잘 넘겼냐는 말은 그만큼 처신을 잘 했냐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 인사는 개인의 실존과 관련됩니다. 의식주의 한계와 사상의 자유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계속 지키면서 살 수 있었냐는 인사입니다.

밥은 먹었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2013년 겨울, 우리는 다시금 묻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밥을 굶지 않습니다. 영장없이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가는 시대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안녕하냐고 묻습니다. 무엇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안녕을, 실존을 묻는 발언은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한 개인이 허공에 대고 쓰다시피 한 대자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봇물 터지듯 하늘에 대고 외치는 이 물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은 말 그대로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 실존의 개체와 주위의 환경이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50년대부터 줄기차게 저항하여 왔던 민중들의 승리로 인하여 여기까지 올라 온 우리들의 자존심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갑자기 도래한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경제적인 성과와 민주적인 성취를 통해 올라 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이 어느 순간 모두 허물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처해있습니다. 가계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고용은 살얼음보다 얇은 두께로 겨우 지탱되며, 나라의 성장은 위기에 처해있고, 기간산업은 되도않는 모습으로 외국의 자본과 재벌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선배들이 피와 죽음으로 만들어 낸 민주화는 어느 순간 그들을 뒤에서 방관하고 저주했던 노추들의 집권으로 인해 모든 것이 역행되며, 사람의 말과 행동의 자유를 이념과 사상으로 옭아 매고 자신과 뜻이 다른 이들을 사상위반으로 몰아대고 있습니다. 공공재는 효율이라는 이름하에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잘려서 판매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민주화라는 단어는 철없는 홍위병들의 선동아래 광대의 춤사위가 되었습니다. 지역감정은 살아나고 힘없는 자는 밥 한끼를 위해 자존심을 팔아가며, 예술가들은 입을 막히고 눈을 가리우며 펜대를 쥔 자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 잉크에 독을 묻혀가며 사람들의 머릿속을 찔러댑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가 걸쳐 아침에 이웃과 나누었던 모든 안위의 말을 종합한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습니까?

당신의 자식은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선배들이 노력한 결과물 아래에서 더 나은 삶의 질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만큼 발전하고 있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아니오.

우리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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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작은 방 한담 2013. 12. 17. 09:54

무협의 클리셰, 무가의 격언으로 내려오는 말 중에

백일도(百日倒),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는 말이 있다.

도는 최소 백일을 수련해야 도의 길을 안다 하는 것이고

창은 천일을 수련해야 창을 잡는다 할 수 있고

검은 만일은 수련해야 검을 이해한다 하는 말이다.


각 병기의 운용에 대한 짧은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국 기예에 대한 연습을 어느정도 해야 하는가를 함축적으로 말한 것일수도 있다. 도의 단조로운 공격법에 비해서 창의 길이와 회전에 대한 운용은 더 시간이 걸리며, 도와 창을 합해놓은 것 같은 양날무기인 검의 경우는 더욱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이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까 먹을 것이 많다는 말도 여기 포함된다. 연습이라는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다듬고 닦아 놓은 지식과경험을 지속적으로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연습을 하는 것은 퇴보를 막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어디에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이제 여기까지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은 필요없다 라고 느끼는 인생의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이 되었건 자기계발이 되었건 애정전선이 되었건 모든 것에 내가 한발짝 물러서서 쉬고 싶어하는 부분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요즘 글 쓰는 것이 느려지고 많이 게을러졌다.

회사 일이 바쁘고, 가정사가 바쁘고 짬을 내기 힘들다보니까 하고 나 자신을 자위해보지만

결국 연습 없는 답보는 정지상태가 아닌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나는 노력을 해서 정상에 올라가는 [드래곤볼]류의 인생역정을 참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시지프스도 아니고 매일 끊임없는 노력을 해서 두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느냔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만히 있다보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더라. 드래곤볼같은 성취는 못하더라도 돌멩이 하나라도 손에 쥐고 살아야 못을 박든지 남의 뒷통수를 후려치든가 하지 않을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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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산해진미로 만한전석을 차려놓고 먹으라 하면 그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윽박지르며 강권하여 먹으라고 한다면 그게 항상 맛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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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가장 부족해지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다.

내가 나이를 먹은 만큼 얻어지는 경험과 지식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함부로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서서히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생각보다 이 부분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자기 자신의 이해도와 관계없이 실수는 종종 

일어나는 법인데,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과  그동안 인생에서 알게 모르게 성취해 온 자기자신의 

밑바탕이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모르는 부분을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

그가 가진 지식에 또 다른 지경을 넓혀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철저히 객관적이어야 하며

그것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사감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교육자들이 갖는 가장 큰 딜레마중 하나인데 

어떻게 해야 자신의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주입하여 학생들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을 향상시키느냐에 대해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이고 학생도 인간이데 어찌 사감이 들어가지 않으랴?



나이를 먹을수록 남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많아지는 반면

어떻게 타인의 배려하며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고양시키느냐에 대한 생각은 적어지는 듯 하다.


최소한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난 그렇게 되지 말자.

그들의 삶은 어차피 그들의 삶 아닌가. 사람은 사람을 교정시킬 수 없다고 난 믿는다.

어쩌면 이 믿음도 교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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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JM군에게 ABE88권을 대여받고 근 5년을 애지중지 보관하다가 드디어 돌려줄 날이 다가왔다. 사실 책을 사는 것만큼이나 책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 특히나 맘에 드는 책을 보다가 다시 줘야 하는 경우는 감상이 남다른데, 이럴 때는 내가 뭘 가장 재미있게 봤던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88권 모두 양질의 서적인지라 어떤 것을 가장 재미있게 봤는지 고르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누군가에게 가장 추천을 해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집을 것이다. 호르스트 부르거의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원제는 아마 [아빠는 왜 유겐트가 되었수] 뭐 그런 종류의 르포형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줄거리 자체가 20세가 되기 전에 2차대전을 겪은 잔인한 성장기가 기반이다.

히틀러 유겐트 뭐빠지게 쫓아다니다가 죽음 직전에 겨우 살아 돌아오는 소년병사 종생기.


 원제도 그럴듯 하긴 하지만 아마 저 제목으로 내가 접했으면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네가지 질문을. - 이 제목은 이 책의 줄거리를 관통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현재의 아들이 나치였던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왜 유태인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대했습니까

2. 히틀러 유겐트라는 걸 왜 만들었습니까?   

3. 왜 어린애까지 전쟁에 참여했습니까?

4. 전쟁이 끝나고 나치즘은 사라졌나요?


난 솔직히 이 책을 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내가 JM군에게 양도받기 전, 내가 ABE를 소유하고 있던 시절부터 합해서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게 고등학교 부터인지 대학생이 되어서인지 생각은 나지 않는데 하여간 그 정도는 읽었다. 1번부터 3번까지는 쉽게 읽혔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뻔한 내용 아닌가. 추석때 주구장창 들어주는 [레마겐의 철교]만 봐도 전쟁이 얼마나 병신같고 머저리같은 짓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고, 독일국민들이 당시에 단체로 정신나간 짓거리를 해 댔다는 것 정도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그 때까지는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불쌍하고 어리숙한 주인공의 바보같은 인생역정을 보면서 "지도자 잘못 만난 국민이 고생이 막심하네."수준의 감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4번째 질문이 나오는 챕터부터는 대체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재미도 없었다. 그냥 사회부적응자의 이야기 같기도 설교 같기도 하니...내가 이해를 할 수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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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년 전부터인가.

갑자기 이 책이 무지하게 보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JM군에게 빌리자 마자 이 소설부터 다시 읽어봤다.


마지막 네번째 질문이 뭔지 다시 꺼내서 펴 보는데

서른 중반 넘어가는 나이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 책은 1976년에 발간된 소설이고, 부르거 선생은 75년에 책 출간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무덤속에서 고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을 난 이미 보았노라."

그제서야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다. 이미 부르거는 참여없는 민주주의의 몰락과 민주주의 1세대의 한계와 다시 튀어나올 파시즘의 광기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그 이야기가 뭔지 어렸을 적에는 몰랐던 것이며, 그게 무엇인지 몸으로 때운 뒤에야 선대가 써 놓은 경고문을 읽을 지혜가 생긴 것이었다. 


"국민이 사상의 자유보다 더 잘살기를 바랄 때 그런 사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지독한 일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옛날에 받은 교육의 단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꽤 많다. 고집 세고 싸움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도이칠란트를 또 다시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히틀러의 등장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집단의 광기에 대한 견제가 없고, 참여가 없는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중을 바보로 만들고 그 바보는 다시금 괴물이 되어서 자기 몸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가 애들보는 동화에 실려 있었다. 1970년대에 나온 소설의 내용을 온 몸으로 경헙하고 있는 나는 지금 어디 동굴 속의 사람인가 아니면 독일 애들이 일찌감치 호되게 멍석말이를 당한 것이가.


각설하고, 이 책은 내가 나중에라도 한 권 별도로 사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이책은 꼭 읽히고 싶다.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 자식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 체제에 적응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필요한 도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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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임신 10주가 넘었다. 임신했다고 울먹이면서 전화하던게 어제같은데 벌써 10주가 넘었으니 나이를 먹을 수록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부모님들도 와서 축하해준다. 당연한 일이지, 이 나이에 후사(?)를 보게 생겼으니 어찌 감사할 일 아닌가. 옛날 조선시대 같으면 거의 할아버지가 막내 낳는 나이다.


그나저나, 어머니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아내에게 이런 저런 덕담을 하고 간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날 밤, 갑자기 아내가 책을 읽어달란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이 아니라 종교경전, [잠언]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잠언은 솔로몬이 그 자식에게 훈계한 내용을 적어 둔 지혜의 서. 31장으로 되어 있어서 하루에 한장 씩 읽으면 한 달이 홀짝 가는 참으로 [XXX의 아침편지]만큼이나 효율적인 경전이다. 좋은 말들이니 읽어서 아이 태교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읽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산모가 읽는게 더 낫지 않나? 하여간 남편이 읽어주는 게 좋다니 그냥 내가 읽기로 했다.)


그런데 '책 읽어주기'란 생각외로 묘한 일이다. 혼자서 소리내어 읽는 강독과는 또 다른 감성의 울림이 있더라. 어머니들이 아이들 책을 읽어주는 것을 무심하게 지나가곤 했었는데 그게 나름대로 뜻이 있는 일이다. 그냥 주문처럼 아무 감정없이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안에 사람의 감성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낭독의 대상이 내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 감성은 굉장히 고양되거나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록키2가 있다. 비평가들은 [록키1]편과 [록키 발보아]를 높이 치지만 난 개인적으로 록키2편을 제일 높이 쳐 준다. 가장 흔하면서도 어려운 게 있는 재료 가지고 맛난 음식 만들기인데 록키2는 그렇게 본다면 꽤나 훌륭한 조합을 만들어 낸 영화다. 

각설하고, 내가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록키와 아폴로가 피터지게 권투하는 장면이 아니고 훈련 빡시게 하는 장면도 아니다. 아내 아드리안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록키가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다. 록키는 이 영화에서 문맹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투의 스탤론이 병상에 누워서 듣는지 마는지조차 모르는 아내를 위해서 더듬더듬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당시 KBS 더빙은 이정구씨였는데 거의 신이 내린 더빙이었다. 더듬으면서 책을 어두운 방 안에서 읽어주는데...난 왜 그 장면을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혼자였고 애를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혼수상태에 빠질 마누라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지금 내 아내에게 글을 읽어준다.

 록키처럼 더듬으면서 읽지 않는다. 아내가 아프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내가 그 영화의 어눌한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 대해서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다. 하나하나 손으로 더듬으면서 나가는 기분이다. 어떤 두려움과 더불어 잘 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깃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나이가 되어서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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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삶이지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에 대한 호오의 기준이 세워진 터이다. 

각자 많은 기준들이 있을지언정 세상사람들의 기준이나 나의 기준이나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원래 이기적인 동물이요, 그들이 모여사는 것이 사회이니 사회에서 만나서 호감을 갖는 방법이라는 것이 결국 이기적인 둥물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일종의 도리같은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회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류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처지가 바뀌더라도 흰소리 아쉬운소리 아무때나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요. 신뢰한다는 것은 아무리 처지가 바뀌더라도 저 사람이 나에게 다른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반대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언제봐도 자기 속내 먼저 챙기고 아쉬울 때만 연락하고 자기 편하면 생까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이기심]을 극대화 시켜 일신의 평온만을 추구하는 것이요,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언제 저렇게 보일까 주려워 전전긍긍하는 터이니 이것을 가리켜 선조들은 [염치]라고 불렀다.


하물며 개인의 삶이 이러한데 국가의 삶이나 단체의 삶이 또한 다르랴.


북한이 계속 욕을 처먹는 이유가 자신의 보전을 위해 국제 사회의 규약을 조변석개하면서 무력시위를 일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시장패의 왈짜나 하는 짓이요 자신의 평안을 위해 타인을 겁박하는 짓이니 사해평화에 호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집단인 법이다. 체제유지를 위해 타국민들을 괴롭히니 세계 제국의 눈총을 받고 제재를 받음에 하나 억울함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근자 우리 나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라의 법이 있고 외교의 도리가 있는 법인데 자신의 정치적 처지가 위태롭다 하며 전직대통령의 비밀외교문서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파렴치한 말종들이 생겨났다. 외교라는 것은 엄연히 혀로 하는 검투요, 그 안에 수많은 책략과 모사가 춤추는 법이건만 어줍지 않은 율사들인양, 철부지 신학자인양 함의가 산더미같은 대화록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며 멋대로 유추하여 전혀 다른 사달을 만들어내니, 이것이 어찌 다 성장한 어른들의 짓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 큰 문제는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기준이나 다름없는, 외교가의 묵언을 깨 버리고 만천하에 비밀을 까발리는 작태를 보인 정치가들이다. 이것은 천하 각국에 '우리는 당신네들과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비밀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북괴와 대화할 때만 이럴 것이고 다른 나라와는 그렇지 아니하오"라고 항변해봤자 그게 타인에게 받아들여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꿔서 생각해보라. 돈꿔가서 안 갚는 놈이나 알던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이건 저 인간에게만 하는 일이고 당신과는 하지 않아"라고 말해봤자 그 말을 실제로 믿는 놈이 누가 있단 말인가?

"말이야 저러지만 인간의 근본이 애초에 틀렸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법 아니랴. 세상 이치가 이와 같고 국가간의 위치가 이와 같다.


결국, 이번 사달은 그나마 이어지던 외교가의 염치를 벗어던지고 대한민국이 천하의 건달에 왈짜요, 수틀리면 판을 엎어버리는 불한당국가라는 명함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정권은 나라를 양아치로 만들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가진 자들이

이런 일을 벌였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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