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나이먹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도 학생시절의 일이 선연하게 머릿속에 잡힐 듯 생생한데, 이미 내 생체시간은 저 멀리 인식의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배운 노인네들의 쓸모없는 수구 패역질이 어찌 가당하냐 여겼던 내 무식의 소치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혈기왕성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는 나 만큼이나 말이다.
정신과는 상관없이, 육체는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이어받기에, 쓴 만큼 망가지기 마련이다. 허리가 먼저 망가졌고, 그 다음은 머리가 빠졌고, 그다음은 소화기관이며, 그 다음은 관절이다. 엊그제부터 아프기 시작한 무릎은 갈수록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물까지 차게 되었다. 오늘 병원에서 주사기로 무릎에서 뽑아낸 물만 해도 30CC에 육박하였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 몸에서도 향상되는 것이 있었으니,망가지는 몸뚱이만큼 고통에 대한 인내력은 증가하는 듯 싶다. 아마 고등학교 때 주사기를 몸에 찔러넣고 물을 뽑는다고 하면 고문이라 했을 터이나, 나는 응당 내 부서지는 몸에 대한 고육책임을 통감하고 생면부지의 의사에게 몸을 맡겼더랬다. 언젠가부터 그러려니 하면서 고통에 몸을 맏기게 되었다. 서글퍼 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게 어디 될 일이랴.
이미 2세를 보았고, 나는 내 체세포가 다른 인격으로 분화하여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사실 자연의 섭리로 따지자면 이미 나는 내가 육신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친 것 아닌가. 인간은 홀로 지고하고 교만하여, 조물주가 자연에게 내린 순환과정을 애써서 연장하고 파괴하여 자신의 삶을 허위허위 지탱해간다. 나도 어느 새 몸뚱어리를 지탱하는 실험군에 속해있다. 이제 하루이틀 더 지낼수록 하나 둘 망가지는 곳은 늘어날테지.
몸이 안 좋아지니 마음이 분주하다. 무엇을 더 해야 할 것인지. 종생하기 전에 무엇을 더 준비해야 안락하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 것인지를 찾는다. 기실, 이 모든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고, 그저 나무 안에 천조각에 둘러진 채 머리 위에 흙을 이고 그 위에 뗏장을 덮고 눕는 일에 불과하건만, 참으로 머리가 생각하는 일은 번잡하기 그지없다. 에둘러 생각해보니, 내 육신과 달리 생각은 여전히 세월을 건너편을 헤엄치고 다니며 기억의 편린들을 줏어 모아 스스로 자족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거를 돌아보며 즐거워 하면 이미 늙은 사람이라 누군가 말을 하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애써서 과거의 추억을 돌아보지 않으려 하며, 앞에 놓은 얼마 안되는 삶을 경주해보려 애쓰긴 하지만 가끔 이렇게 몸이 안 좋고 맥을 풀리는 날이면 머리가 번잡해지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다. 누구나 그러할까?
한 때 거친 서부의 호한으로 뛰어난 명연기를 보여준 마초 사나이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늙어가면서 뛰어난 제작물로 자신의 노년을 충당하고 있다. 스스로 밝히기를 보수주의자며 마초라고 하는 그 사내가 내어놓은 이 작품은 어쩌면 자신의 영화속 페르소나를 그대로 연장시켜 놓은 선상에 위치한다. 아니, 오히려 더 단순하다.
별다른 갈등구조 없이 '자신과 자신과 대립하는 적수를 상대하는' 일차원의 메타포를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이 영화는 스토리나 작법을 봤을 때 그냥 초기 존웨인의 서부극을 21세기에 리메이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씁쓸함을 곱씹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영화가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거부감이 드는 요소는 바로 주인공 크리스 카일이다. 그는 보수적이며 종교적인(비록 성경은 한 줄도 안 읽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텍사스 출신의 노동자이다. 거칠고, 강인하며, 그 강인함으로 주변인을 보호하는 사명을 타고 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족이 부당한 일을 당한다고 느끼자 바로 총을 잡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간다.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은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채용되지 않는다. 단순함에서 나오는 내러티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주인공의 사이드킥이나 강인한 적수로 나타나는 법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을 차지한다. 그의 생각은 직선적이고 정치적인 고뇌나 가족에 대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순간 머리를 찌르는 편두통처럼 그를 맞서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인으로써의 맹세와 동료의 목숨이다.
크리스 카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전사의 신념이다. 고대 노르드인과 조조의 청주병, 일본 전국시대의 사쓰마번과 같은 인종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에게 삼촌 클로디어스의 등 뒤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갈등같은 것은 그저 사치이고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자신의 일족 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본다면 그는 피에 굶주린 악마일 뿐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름은 이 모든 것을 참으로 무미건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입대 전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 같던 행실의 소유자가 입대 후 살인기계가 되어 칭송을 받고, 그 칭송을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 무대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고, 그 인물로 살아가다가 마지막까지 후회없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의 일대기가 투영된다. 거북하기 그지 없던 시작이 마지막까지 거북하게 끝난다. 영화가 끝난 뒤 크리스 카일은 전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냥 신념에 충실한 인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량은 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솔직함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에 있다. 이 영화는 미국 내에서는 훌륭한 애국영화가 될 것이지만 바다 반대편에 서 있는 내게는 출륭한 반전영화요 좀 더 나간다면 반미영화였다. 미르미돈의 생애는 끝까지 미르미돈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내적 갈등과 극적 감동은 이라크 내전에 참가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튀어들어온 가족있는 저격수 무스타파가 훨씬 많이 소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크리스 카일이 주인공이기에 던져준 불편함을 종내 주진 못했으리라.
2001년, 9.11 테러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미국이 아닌 전 세계의 질서를 파괴했다. 무역센터에서 죽은 3000명의 목쑴 뿐 아니라 그동안 세계를 가까스로 돌려오던 무형의 공식을 파괴했다. 세상이 냉전 후 어떻게 돌아갈 것이다라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던 기시감과 가능성이 모두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들이었다. [충격과 공포]라는 말은 어찌 보면 적절한 비유였다. 2001년 이후, 사람들은 세계질서의 흐름에서 이성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범세계적인 무력과 경제적 침탈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맹종자가 생겨났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전사들의 집단이 고대로부터 다시 되돌아왔고, 역사의 불쾌한 역전이 발흥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춘추시대의 강자 초장왕이 송나라를 칠 때의 일이다. 이 때 송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던 대장군 화원은 초나라 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특식으로 양고기를 지급했다. 그런데 이 때, 그는 그의 전차를 모는 양짐이라는 기수에게 양고기를 주지 않았다.
병사들이 그 이유를 묻자, 화원은 " 싸우는 병사들이나 먹는 것이지, 마차 모는 사람에게 양고기가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양짐이 듣고 마음 속에 담아 둔 것은 물론이다.
다음날 초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화원은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며 초나라연합군에게 돌격했는데, 양짐이 갑자기 적 한복판으로 마차를 단기로 몰고 들어간 덧이다. 화원이 깜짝 놀라서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니까
"양고기 배식은 네 재량이지만 이 마차 모는 건 내 재량이야." 하고 양짐이 말하고는 그대로 초나라 연합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순식간에 대장군이 잡히니 송나라는 지휘계통을 잃고 대패를 해 버렸다. 참으로 쪼잔한 장군과 1호차 운전병의 최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도 각자위정이라는 말은 서로가 협심단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많은 언론들은 양짐의 이기적인 행동을 힐난하며 총화단결하여 난관을 넘어가자는 말로 이 고사성어 소개를 마무리 짓곤 한다.
*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대도 바뀔 만큼 바뀐 상황 아닌가.
문제의 중심은 양짐이 아니라 화원이다. 전국시대의 마차라는 것은 chariot, 한마디로 군사용 돌격전차인데 그 중에서도 자신을 모시고 전장을 누비는 사람이라면 중요도가 여느 병사 못잖은 사람일 것이다. 1호차 운전병이면 그 대우가 남다를 것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보면 그냥 내 운전수는 양고기 따위 안 먹어도 된다고 화원은 생까지 않는가. 이건 무엇인가.
화원이 병신이라 1호차운전병이 비전투병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게다. 명색이 대장군인데 그럴리는 없다.
이건 그냥 경멸이다. '내 밑에서 기는 놈이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라는 사고방식 아닌가. 무슨 일이 있어도 1호차는 잘 달려간다는 믿음, 같은 차를 탔으니까, 운명공동체니까. 나 때문에 살고 있는거니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 전차는 그저 내 소유물이라는 태도. 이것이 화원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생각한다.
화원에게 양짐은 그냥 마부석에서 이리저리 방향전환을 하는 일종의 [물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신이 양짐에 의해 생사여탈권을 박탈당하고 적의 포로가 된 뒤에야 박살이 나게 되었으리라. 다른 인간을 경멸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같은 눈높이에서 보게 되는 경우는 자신이 경멸을 당하게 되는 순간일 뿐이리라.
나는 그 쪼잔한 양짐의 행동이 100%는 아니더라도 50.1%는 이해가 간다. 요즘같은 갑을의 시대일수록 그 심정이 무엇인지 공감을 크게 할 수 있으리라. 각자위정이라는 말에서 사회가 도출해내는 교훈은 참으로 폭압스럽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왜 그렇게 그 사람이 행동했는 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최근 1년 9개월 정도 써 왔던 핸드폰을 새로 나온 핸드폰으로 과감하게 교체를 해 버렸다.
원래 전에 쓰던 핸드폰이 당시 최고의 스펙이라고 모두 뻥을 치지 이 제조사 개객기야 여겨지던 폰이었고, 그 폰을 구입하던 당시 사장이 "내가 핸드폰을 바꾸니까 팀장 너도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것이 사대의 의리 아니냐?" 하면서 말도 안되는 즉흥구매를 행했던지라. 별로 크게 선택을 하지 못하던 처지였다.
그래도 80만원 가까운 거금의 핸드폰이었다. 난 원래 상거래에서 흥정을 안 하는 사람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면서 일을 할 때도 그랬고, 다른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금액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원들이 제시하는 가격이라면 이 가격이 모든 업계에 당연히 통용되는 비용이라는 생각 하에 가격을 지불한다. 난 그게 신뢰이자 공감대고, 그것이 경제활동의 가장 빝바닥에 깔리는 내용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난 틀렸더랬다. 최소한, 핸드폰 시장에서는 그게 틀렸다.
나보다 훨씬 어린 내 부하직원들이 왜 그렇게 비싸게 샀느냐고 계속 말들을 하더라. 이 정도 가격이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제 값 주고 사는 핸드폰]이 어디 있냐는 거다. 말 그대로 공시가격으로 사는 핸드폰이라는 것은 정보 어두운 노인들이나 아무 것도 보르는 직장인들이 어수룩하게 통신사 가서 사는 것이지, 요즘은 인터넷으로 그 절반 가격, 3/4 가격, 심지어는 공짜로도 번호이동으로 산다는 거다 (이쯤되면 필자가 얼마나 어수룩한지 알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의 반은 이런 빙신을 봤나 하면서 이 글을 읽고 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원래 장사라는 것이 이문을 남기는 것이니까 어느정도 마진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에서 파는 핸드폰 가격이라는 것은 매장에서 파는 핸드폰 가격이라는 것과 너무나도 큰 괴리가 있더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매장에서 사는 것이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거다 (아니며 온라인이 밑지고 파는 거겠지) 그런데 내 주변의 대부분 젊은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수리가 토끼 낚아채듯 타이밍을 골라가며 값싸게 핸드폰을 집어가고 되팔고 다시 갈아타기를 반복하더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 아니면 세상이 내가 아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장 짜증이 나던 것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거래하는 것이 아무런 장점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같은 피조물을 대할 때 신의성실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화한다는 대전제가 이미 소용이 없더라. 어느 정도의 이문에 대한 암묵적인 보장을 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상거래일텐데, 오히려 그것은 얼굴을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만 의사표현을 하는 온라인에서 더욱 활성화가 되어가고. 정작 얼굴을 맞대서 사람들에게 물건을 구하러 오는 이들은 바보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목격했달까.
아마 핸드폰에 국한된 이야기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정부에서 핸드폰에 대한 가격을 규제해서 더 이상 온라인에서 그리 쉽게, 오프라인에서 그리 비싸게 팔지 못하게 만든다고 제한을 걸어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문을 정부가 알아서 메꿔주는 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내가 뭘 모르나, 하긴 이쪽으로는 문외한이지). 이윤추구를 정부가 정해주고, 오프라인에서는 소비자를 벗겨먹고, 온라인에서는 알아서 각자도생하는 것이 장땡인 시대.
점점 시대가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개개인들은 이윤의 흐름에 대해서 알 수 없어질 것이다. 정보의 중앙에 위치하여 매일매일 변하는 이익구조를 접하지 않는 한, 언젠가 개개인은 사회의 흐름에서 멀어진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예전에는 몇 세대를 지나서 움직여야 했던 상황이 한 개인의 인생 속에서 몇 번을 바뀔정도로 세상이 급속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람들의 바람보다 훨씬 느리고 둔감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하여간, 나는 지금 그래서 여지껏 행해온 내 상거래 방식을 버리고 다른 인터넷 쇼핑몰에서 빤스 사는 것처럼 휴대폰 하나를 생각외로 저렵하게 구입하게 되었다. (사람들 말로는 내가 규제 전 끝물 탔다고들 하는데...솔직히 뭐가 끝물이고 시작물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이게 고장날 즈음이 되면 그 때는 또 어떤 방식으로 거래를 터야 할까? 이젠 하나한 바뀌는 모양새가 슬슬 무서워지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 I giorni dell'ira, 미국말로 [분노의 날](어, 한글이네?) 라고 번역된 이 서부극은 꽤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뛰어난 배우들이 만들어낸 영화다. 편집력과 연출만 좀 더 받쳐줬더라면 굉장한 마스터피스가 될 법한 영화였는데 아쉽게도 연출력 그거 하나가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봐도 참신하고 즐겁고 묵직한 맛이 스파게티 웨스턴의 정수를 보여주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주연은 [황야의 은화1불]로 유명한 줄리아노 젬마, 그리고 그 상대역은 말이 필요없는 냉혈한 총잡이의 대명사 리 반 클리프. 이 두 사내의 갈등구조가 2시간여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서부극이라기보다는 부조리극에 가깝다.
- 영화의 주인공은 [똥 푸는 사나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직업이 그렇다. 서부극 사상 전무후무한 직업을 가진 이 사나이는 마을의 천덕꾸러기로 술집 작부의 아들로 태어나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허드렛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이. 서글서글한 용모에 심성도 착한지라 매일 구박만 받는다. 사람이 허고헌날 구박 멸시 받으면 당연히 주눅들고 분노가 생기는 법, 이 사내는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당연히 쌓인게 없겠는가. 유일한 취미는 말똥치우다가 옆에서 권총뽑기 연습을 하는 것인데...사람들은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말고 똥이나 치우고 바닥이나 쓸라고 구박한다.
-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을에 진짜배기 총잡이가 들어온다. 간단하게 사람 하나 쏴제끼고 시작하는 이 분은 말 그대로 거칠 것 없는 무법자 양반. 그런데 어쩌다가 이 양반이 이 [똥푸는 청년]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청년은 이 총잡이 양반에게 대충 인생 사는 법을 사사받게 된 뒤 (무법자의 길이다.) 총을 하나 선물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 이 다음부터 마을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벌어진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분노의 날]인가 이해할 수 있는 대목, 그동안 쌓였던 똥사나이의 분노가 불꽃의 쇳덩이가 되어 쏟아지고 그걸 지켜보던 무법자 총잡이는 뒤로 얄팍한 계산을 따로 한다. 그리고 마을의 기득권을 지키던 이들은 이 미친 똥쟁이랑 무법자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된다. 이 정신나간 삼각관계가 영화 끝까지 이어지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각 그룹의 인물들은 서부극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저열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정말 인간 막장이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조금 만 더 심층적으로 캐릭터들을 분석했으면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 못지 않은 웨스턴이 하나 나왔을 것 이라고 공언한다.
- 줄리아노 젬마의 멍해보이는 순진한 인상의 연기, 그리고 언제 봐도 잘 벼려진 칼같은 리 반 클리프의 협연은 지금봐도 명연이다. 연출력이 조금만 붙여졌으면 진짜 끝내주는 영화였을 것이다.
- 이 영화는 굉장히 클래식하고 특별한 [화승총 결투]가 나온다. 전장식 소총을 가지고 마상결투하는 기괴한 장면, 굉장히 임팩트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영화와 별개로 굉장히 유명하고 멋진 작품이다. 가장 최근에 알려진 것으로는
퀜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언체인드]에서 삽입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ps) 2014년에 내가 쓴 포스팅이 여기저기 멋대로 옮겨 다니며 자기가 쓴 글처럼 포장되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그냥 좀 웃기다. 어디서 가져왔다고 말이나해 주던가...
미국의 정통 서부극과는 다른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이태리 출신의
감독들이 만들고 유럽에서 로케를 한 것이 많은데다 (속 석양의 무법자의 화려한 마지막 공동묘지 장면은 스페인에서 촬영된 것이다) 유럽의 정서상 우익보다는 좌익성향의 색채가 조금씩 묻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은
1. 돈에 매몰되는 건맨들, 즉 영웅들의 생사여탈권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그리고 있고
2. 배금주의에 의해 망가지는 사회배경이 나타나며
3. 노동자들과 무산계층 찬가 내지는 동정심이 기저에 깔린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집대성 된 역작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옛적 서부에서]인데, 이 영화는 지금 보더라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걸작 서부극이다. (자그마치 헨리 폰다가 애를 쏴버린다! 요즘은 개도 못 쏘는데!)
그와 더불어 스파게티 웨스턴의 걸작을 뽑아내던 감독이 여기 포스팅을 하는 세르지오 코르부치다.
이 사람이 만든 서부극은 지금도 이름이 금빛으로 남아 찬연히 전해지는데 그 중 몇몇을 이야기하자면
[장고], [나바호 조] [표범, 황혼에 떠나가다] 같은 명작들이다.
사실, 장고와 나바호 조 정도가 가장 유명하긴 해도...이미 두 작품 서부극의 상궤를 약간씩 벗어난 작품이다.
장고는 주인공 주제에 악당처럼 기관총을 상대방에게 갈겨대며 썩은 군부를 난도질하고
나바호 조는 아예 인디언이 주인공으로 나와 백인들 머리가죽을 벗겨댄다.
하지만 이 영화만 할까. 이 서부극은 상궤가 아니라 아예 선로를 깔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위대한 침묵 (the great silnce) - 동명인 수도사들의 침묵영화와 헛갈리지 말자] 이다.
네바다의 눈덮인 산맥, 물산이 핍절한 산골 주민들은 고육지책으로 강도떼가 된다. 그들을 없애려고 바운티 헌터들이 그들을 찾아 온다. 산골 주민들은 킬러를 고용한다. 그 중간에서 보안관은 이도저도 안된다. 그리고 갈들이 폭발하고
사람들은 떼거지로 죽는다. 그리고 살아남는 자는 살아남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서부극 사상, 유일하게 뿌연 먼지대신 하얀 눈벌만 잔뜩 나오는 영화. 배경부터 범상치 않은 것처럼 이 영화는 모든 서부극의 틀을 부숴버리고 결말마저 뒤틀린 채 끝나버린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일반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부류이다. 이 삐딱하고 냉소적인 시선은 주인공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봐도 악당인 클라우스 킨스키와, 선역이라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 사일런스 장 루이 트렝티냥의 대결은 기이한 대결로 시작해서 기이한 대결로 끝난다. 아마 개봉당시에도 말이 많았는지 아예 얼터 엔딩이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헝가리 출신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코른골드의 동년- 아니면 바로 그 아랫세대에 해당하는 미클로스 로자는 상업적 창작과 순수창작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전형적인 후기 낭만주의의 관현악을 구사하면서도 바그너 풍의 등장인물 별 도입동기를 가져와 후대의 영화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특히나 그의 절제되고 웅장한 대관현악풍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회자대는 명작들을 '명작의 반열'에 오르도록 한 일등공신이다.
안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한 번 미클로스 로자의 음반을 가지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미친듯이 한 번 질러보라는 지름신이 몰아닥쳐 그냥 충동적으로 이 양반의 음반을 하나 구매했다. 어차피 좋아하는 음악가라면서 음반 하나 없는 애호가라는게 말이 되나.
솔직히 내가 이 중에 본 것이나 익숙한 노래라고 해 봤자 [벤-허]나 [엘 시드] [왕 중 왕]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CD무지막지한 3CD 안에 그동안 미클로스 로자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노래들을 컴필레이션격으로 때려넣었다. 22분에 달하는 스펠바운드 콘체르토를 실어놓는다던가, 바그다드의 도둑, 페도라같은 이제는 연주되지도 않는 상황이니 좋은 선택이었다.....
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
[벤허]의 테마를 듣는데 이거 내가 귀에 듣던 곡이 아닌 것이다. 엘시드의 노래도 내가 듣던 노래만 뭔가 차이가 있는데...아뿔사, 나중에 웹을 뒤져봤더니 미클로스 로자 음악 해석에 있어서는 최악이라고 말하는 리하르트 뮬러가 지휘한 노래가 수두룩 빽빽하게 들어있는 것 아닌가. 더 웃긴건 [엘시드]의 경우, 서곡과 메인 테마를 리하르트 뮬러가 지휘한 것과 엘머 번스타인(레너드 번스타인이 아니다. 7인의 신부를 작곡한 그 분)의 지휘곡이 같이 들어 있는데 엘머 번스타인의 곡 해석이 훨씬 매끄럽다는 것.
돈버렸다고 혼자 슬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한 번 들어보자고 마음먹고 하나를 더 질러버렸다.
소니에서 만들어낸 괴작CD, 벤허 스코어를 원작자 미클로스 로자의 지휘한 음반이다. 문제는 이게 2CD라는 것. 영화 하나에 들어간 노래가 무슨 2cd냐고 투덜댔는데, 이 음반은 첫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나온 음악을 고스란히 다 집어넣었다. 장면전환에나 나올 법한 10초짜리 변주곡까지 다 넣어 둔 음향소스에 가까운 버전이다. 덕분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장면을 음악과 함께 다시 감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음악과 원곡과는 조금 다른 것도 있더라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