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임신 10주가 넘었다. 임신했다고 울먹이면서 전화하던게 어제같은데 벌써 10주가 넘었으니 나이를 먹을 수록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부모님들도 와서 축하해준다. 당연한 일이지, 이 나이에 후사(?)를 보게 생겼으니 어찌 감사할 일 아닌가. 옛날 조선시대 같으면 거의 할아버지가 막내 낳는 나이다.


그나저나, 어머니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아내에게 이런 저런 덕담을 하고 간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날 밤, 갑자기 아내가 책을 읽어달란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이 아니라 종교경전, [잠언]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잠언은 솔로몬이 그 자식에게 훈계한 내용을 적어 둔 지혜의 서. 31장으로 되어 있어서 하루에 한장 씩 읽으면 한 달이 홀짝 가는 참으로 [XXX의 아침편지]만큼이나 효율적인 경전이다. 좋은 말들이니 읽어서 아이 태교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읽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산모가 읽는게 더 낫지 않나? 하여간 남편이 읽어주는 게 좋다니 그냥 내가 읽기로 했다.)


그런데 '책 읽어주기'란 생각외로 묘한 일이다. 혼자서 소리내어 읽는 강독과는 또 다른 감성의 울림이 있더라. 어머니들이 아이들 책을 읽어주는 것을 무심하게 지나가곤 했었는데 그게 나름대로 뜻이 있는 일이다. 그냥 주문처럼 아무 감정없이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안에 사람의 감성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낭독의 대상이 내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 감성은 굉장히 고양되거나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록키2가 있다. 비평가들은 [록키1]편과 [록키 발보아]를 높이 치지만 난 개인적으로 록키2편을 제일 높이 쳐 준다. 가장 흔하면서도 어려운 게 있는 재료 가지고 맛난 음식 만들기인데 록키2는 그렇게 본다면 꽤나 훌륭한 조합을 만들어 낸 영화다. 

각설하고, 내가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록키와 아폴로가 피터지게 권투하는 장면이 아니고 훈련 빡시게 하는 장면도 아니다. 아내 아드리안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록키가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다. 록키는 이 영화에서 문맹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투의 스탤론이 병상에 누워서 듣는지 마는지조차 모르는 아내를 위해서 더듬더듬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당시 KBS 더빙은 이정구씨였는데 거의 신이 내린 더빙이었다. 더듬으면서 책을 어두운 방 안에서 읽어주는데...난 왜 그 장면을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혼자였고 애를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혼수상태에 빠질 마누라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지금 내 아내에게 글을 읽어준다.

 록키처럼 더듬으면서 읽지 않는다. 아내가 아프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내가 그 영화의 어눌한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 대해서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다. 하나하나 손으로 더듬으면서 나가는 기분이다. 어떤 두려움과 더불어 잘 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깃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나이가 되어서 어른이 되어간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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