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해당되는 글 131건

  1. 2009.09.10 올망졸망 회사이야기 4
  2. 2009.08.09 2009/08/09 4
  3. 2009.08.04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까? 4
  4. 2009.07.22 좋은 글 7
  5. 2009.06.24 누구나 고독한 시대가 되었나봅니다. 1
  6. 2009.06.15 가말리엘의 변 2
  7. 2009.06.10 번외편 - America(2) 7
  8. 2009.06.05 혀 갈라짐 4
  9. 2009.06.03 죄인과 유혹자 2
  10. 2009.06.02 채근담 중에서 2
1. 일주일 날밤을 까면서 한 PT작업이 어제 심사에 들어갔고 보기 좋게 미끄러졌습니다.
   저야 하루에 최소 2-3시간 정도는 잤으니 상관없습니다만 디자이너들은 거의 2주 가까이 잠을 안 잤다고 봐도
   되겠지요. 예전 70년대 군사정권이 안재우는 고문을 했다던데 우리 디자이너들이 그 당시 반독재운동을 했으면
   참 잘 했을 겁니다. 형사들이 먼저 뻗었을걸요.
   말은 이렇게 해도 솔직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을 한 놈은 아무래도 권력의 개가 아니었을까.


2.
 아무리 열심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더라도 안 되는 때는 뭘 해도 안되는 겁니다.
 일이던 돈 버는 일이건 연애를 하는 일이건 말이죠.
 여자와 연애에 골인 할 시간에 로또에 5천원을 더 투자하는게 시간대비 효율면에서는 훨씬 월등합니다.
 우리는 그걸 모두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끝까지 하면 분명히 빛을 본다!]라는

 또다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거죠.
 40일 단식기도 하고나면 아들이 대학에 붙는다는 거하고 다를 바 없는 기복신앙입니다.
 그런데 위에 전술한 내용은 사람들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더군요.

 제가 봤을 때는[아무리 열심히 끝까지 해도 안 될 일은 죽을 때까지 안 된다]가
 세상사는 진실이거든요.


3.
그런데 1,2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기획자의 마인드입니다.
정작 디자이너들은 심드렁해요.
[안 되었으니 다음에 또 하면 되지]
라는 거죠.
안 되면 리뉴얼하고 다시 리뉴얼하고 리뉴얼하면 되는 거라는 겁니다.

밤을 샌 당사자들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제가 성격이 워낙 급해서 그럴 것일수도 있죠.

같이 있다보면
7주일 밤을 꼴딱 새고 줄담배를 피워대던 사람들은 아무런 인생걱정 안하는 반면에
난 왜 걱정을 하는 거지? 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모르죠.

열심히 끝까지 하면 성공한다는 인생의 신앙에서 강림하는 기적을 체험했다거나
그렇게 살아왔다거나 그것이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믿거나
아니면 진짜 그것이 진리이거나

아니면
길이 이것밖에 없으니 그냥 마소처럼 벼랑까지 묵묵히 가거나.

둘 중의 하나일지도.

4.
전 저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의심하게 되어버려서
어쩌면 인생의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에게 [선생님의 손바닥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리를 보지 않으면 못 믿겠습니다]
라고 해 놓고 정작 보지 않고 부활하심을 믿었지만

전 봐도
[뻥치시네]
라고 할 것 같아요.

사람이 좀 많이 팍팍해져 버렸네요.
Posted by 荊軻
,

2009/08/09

작은 방 한담 2009. 8. 9. 22:33

1.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장품을 다시 꺼내게 되면
   맨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감상과 심정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일전에도 소개했던
  건그레이브 에니매이션을 드디어 다 봤습니다.

 맨 처음 나왔던 게 2003년이었습니다.
 아무런 저작권 죄의식을 갖지 못하던 시절 불법으로 다운받아보던 시절의 그 만화는
 좋은 것도 있었지만 이상한 것도 참 많았어요.

"저 등장인물은 참 개연성이 없네."
"유치찬란한 말이로군"
"왜 저런 식으로 일하지?"

6년이 지난 뒤 DVD로 조용히 감상을 하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개연성은 여전히 없지만
왜 저렇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었달까요.

사람의 행동 중에 개연성을 가지고 행동의 결과까지 끄집어내는 경우가
인생의 몇 퍼센테이지가 될까요?
모든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이성이 아닌
세월의 앙금속에 빚어진 그 만의 양식으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순간.
저럴 수 밖에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모든 씨줄과 날줄이 하나로 얽혀서
하나의 테피스트리가 되고 그 안의 그림이 보여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군요.
살아온 시간의 경험과 감상의 두께가
사람의 보는 위치를 조금씩 뒤로 밀어보내서
다는 보지 못해도 나무가 아닌 숲을 어렴풋이 보게 되는 경험.

나이를 먹은 걸까요?

2.
벗들과 헤어지고 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동생 집근처부터 제가 사는 집 근처까지
도보로 30분도 안되는 거리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가 참으로 작다는 것을.
그런데 한 번도 그렇게 다녀본 적이 없었군요.

사람은
자기 주위환경에 대해서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이 동네 산 지 4년이 넘었는데
참으로 새삼스럽고 새롭습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볼수 있는 광경은
얼마나 크고 또한 작을지.
Posted by 荊軻
,
1.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서기 좋아하고 뒷끝없는 대신 떠들석하게 노는 것이 좋다. 자기가판단할 때 좋은 것이있으면 사람들을 같이 가자고 꼬드낀다. 일단 내가 좋으면 남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즐겁다.
최소한 속사정은 몰라도 겉으로는 늘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한 사람은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 만나는 걸 싫어한다. 혼자 먹고 마시고 혼자 생각하고 공상하는 것을 즐긴다. 어차피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이니 그들에게 내가 뭐라고 해 봤자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싫은 건 남에게 시키지 않는 스타일이다.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으니 남들도 자기에게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속사정이야 어찌했건, 이런 맘을 남이 신경 써 주는 것 조차 버겁다.

둘이 앉아 있으면 늘 삐걱댄다.
별반 영양가도 없는 일에 대해 뻥튀기를 하는 외향적인 사람을 내성적인 사람은 우습다고 생각한다. 엄벙덤벙거리면서도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나 싶어한다.  늘 혼자 뾰루퉁해 있는 내향적인 사람을 외향적인 사람은 불편하게 쳐다본다. 내가 뭘 잘못해서 늘 저런 인상을 쓰나 생각하고 뭔가 즐거운 걸 보여주면 나아지려나하고 이것저것 궁리를 해 본다. 하지만 뭔가 일을 벌릴수록 두 사람은 짜증만 늘어간다. 왜 시키지 않은 일에 행동거지는 저따위로 가벼운가. 왜 저 사람은 이런 걸 해 줘도 저렇게 인상만 쓰고 성질만 내나, 사람이 고생하면 빈말이라도 해 줄 것이지.


2.
두 사람이 있다.
마치 한 날 한시에 같은 유전자로 두 쪽이 된 듯 비슷한 유형이다.
싫어하는 것이 비슷하니 서로에게 권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같으니 별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둘이 앉아 있으면 무미건조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술을 먹어도 그만, 술을 안 먹어도 그만.
밥을 먹어도 그만, 밥을 안 먹어도 그만.
고민이 있어도 그 고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비슷하니 솔루션은 늘 거기서 거기.
어떨 때는 없어도 전혀 불편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편해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에게 화가 나면 그건 화가 아니라 적개심이나 증오에 가까와질 수도 있다는 원초적인 불안감도 갖는다.

그래서 가끔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과 일을 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3.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이 100%같은 사람과 100%다른 사람으로 나뉠 수는 없다.
1번과 2번을 왔다갔다하면서 세상사람들은 살아간다. 누구 말마따나
저렇게 둥글둥글 살다 깎여나가며 살아갈지도 모르고
평생 사람들과 모나게 부딪히다 일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와중에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난하기 그지없는 스트레스를.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살아가는 과정의 업이 삶보다 무거운 무게로 작용하면 그건 뭔가 잘못된 일일 터.

세상살이라는 건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사는 것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친구던, 직장관계던, 애인사이던.

Posted by 荊軻
,

좋은 글

수련장 2009. 7. 22. 14:56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맞는 말이야

좋은 글이 유려한 명문이라는 게 아니다.

가슴에 다가오는 글이 좋은 글이다.

냉철한 이성을 가졌더라도

내내 자기정당화에 변명만 지껄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한 줄로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각인시키는 글도 있다.

사람은

타인을 보듬지 못하면 결국 이기적인 야수인 게다.
Posted by 荊軻
,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잠을 자러 집에 들어오는 동안
혼자입니다.

꼭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존재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회사에서 만나는 동료, 그리고 회사나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 파생되는 여러가지 갈래의 관계가 있습니다만
사람은 늘 고독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많은 걸 합니다.
게임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죠.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공감의 개인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메신저, 네이트온, 트위터. 기타 비슷한 온라인 상의 확인 프로그램들을 통해
우리는 내 말을 개인적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을 원하지요.

가정해봅니다.
에드몽 당테스처럼 아무도 없는 토굴감옥 속에서 평생을 지내게 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간수가 삼시세끼 던져주는 밥그릇
혹은
어디선가 저 멀리 음성으로 전달되는 옆 방 동료의 소리일 것입니다.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음성은 공기로 비산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온라인의 텍스트도 수많은 스레드에 밀려 다시 조회하기 힘들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요?

언제나 사람은 고독했지만
현 시대는 사람을 스스로 고독해지도록 만들죠.
 
예,
말그대로
누구나 외로와지는 시대가 되었나봅니다.

Posted by 荊軻
,

가말리엘의 변

수련장 2009. 6. 15. 11:02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인간이 나온다.

예수의 제자도 아닌 주제에 꽤 많이 등장한다.

이 양반은 유대 랍비일파의 가장 큰 일문중 하나인 [힐렐 학파]의 한 사람이자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이나 기독교의 전파에는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란 이야기다.
그냥 유대교의 학식있는 스승이지.

그런데 이 양반, 학문에 있어서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를 꿰어맞춘 바울을 가르친 사람인데다
논리적으로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得道한 자가 얻을 수 있는 智의 탈한계]에 달한 사람 같다는 생각.

사도행전 5장 30절 하반부부터 나오는 이 양반의 말은 그런 이야기다.
기독교가 이단이네 전파하지 말아야 하네 하는 공의회 사람들을 한큐에 보내버리는 말을 하는데
"사람의 소관에서 난 것이면 크게 일어났다가도 사라지려니와 하나님의 일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그냥 냅두라"

어찌보면 이현령비현령식의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퇴계 이황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으니
뭔가 지식이나 수련에 극에 달하면
스스로 알지 못하여도 마음의 결정함이 바람에 물결이 쓸리듯 순리를 따라서 행하게 되는 모양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생각하는게
"내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소서"아닌가?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텐데.

알면 알수록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것이 이쪽 공부구나.
Posted by 荊軻
,

"헤이 Ken, 다운타운에는 가지 마."

"왜?"

"위험하다고."

뭔가 쓸만한 이름이 없어 Kenneth의 Ken을 썼다가
일본친구들의 동족 연대감이 섞인(?)애칭을 받으며
남부 캘리포니아 모 대학 기숙사에 6개월간 틀어박혔을 때의 일이다.

어차피 기숙사에는 돈없는 인간들이 모여서 눌러붙기 마련인데
한국인 나
독일에서 나타난 프란츠
일본친구 유이치
멕시코 친구 호세

뭐 이런 다국적군이 편성된 기숙사를 쓸 때의 일이다.
(본토 미국인은 인디언도 안 들어있는 이 기막힌 배치라니.)

매일 하는 일이라곤 밤에 일본 닭고기 라멘이나 데워먹으면서 Sci-fi 채널이나 보던
다국적 오덕들이었는데
어느 날 멕시칸친구가 술이나 사 오자더니 차를 빌려왔다.

"어디 가게?"

"다운타운!"

나랑 일본인 친구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죽고싶냐! 거긴 위험하다고!"

하루 아침을 여는 break news를 보면 당시 다운타운에서는 갱들의 전쟁이 한참이었고
그 작은 소도시에서 일주일에 한명씩은 꼬박꼬박 죽어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 멕시칸 친구는
"위험하다니? 전혀! 안 위험하다고!"

이 멕시칸 친구는 알바로 학교 Security를 서고 있었고, 게다가 아마레슬링 선수였다.
게다가 그 자신감있는 말투와 기숙사 작은 방에 쳐박힌게 물릴대로 물린 우리 동양인들은
(가만..프란츠는 어디간 거지? 다른데 갔나보군.)
마치 금단의 비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기적 어기적 다운타운으로 한밤중에 출발했다.

그리고 도착한 어둡기 그지없던 다운타운...
위험하지 않았다.
멕시칸들이 엄청나게 많았거든.
호세에게는 [위험하지 않았던] 거다.
호세 덕인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맥주를 잔뜩 사 싣고 다시 기숙사로 들어온 유이치와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끼리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글쎄..."

같은 일은 유이치와 LA에 같이 갔을 때도 있었다.

"리틀도쿄는 위험해!"
"LA에서 가장 안전해!"
"코리아타운이 더 안전하다고!"
"코리아타운이 제일 위험해!"

*---------------------------*

사람은 스스로의 굴레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마 그럴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와 다른 경우에 공포심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 때는 우린 다 젊었다.
적어도 그 때는 같이 가자면 차를 타고 같이 가 줄 담력은 있었다.

아마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공포심을 많이 느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내 주변에 등장한다면
아마 나는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고, 그들 역시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이미 나이를 먹었고
내 주변에 훨씬 익숙하고
내 주변밖에 모르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어쩌면
Territory를 가진
곰의 삶하고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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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갈라짐

투덜투덜 2009. 6. 5. 10:36
뭐 가끔 있던 일이긴 한데
이번엔 좀 심하당.

쓰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웹검색을 해 봤더니
길게 세로로 갈라진 것은 위암이고
세로로 짧게 갈라진 것은 심장에 이상이 있고
앞부분이 짧게 갈라진 것은 위장에 이상이 어쩌구...

-.-;;;

이래서
사람이 걱정이 많아지면 병을 얻는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 같은 걸 가지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그게 정말 큰 병이 된다니까.

-.-
이비인후과에 가 볼까...
(나름대로 소심함.)

Posted by 荊軻
,
사실
성경에서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한 일은
현행법상 아무런 죄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냥 저 선악과엔 말이지 뭐라뭐라 하는 소문이 있다대"라는 말을 퍼뜨려 놓았을 뿐이고
아담은 그말에 혹해서 자기가 제 발로 걸어가 죄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탄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왜?
순수한 악의를 가지고 상대를 조종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델로]의 이아고가 그러했고, [타이터스 앤드로니쿠스]의 아론이 그러했다.
차도살인, 자신의 손을 빌지 않고 상대방을 해치운다. 그것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유혹자에 넘어간 죄인은 보통 두가지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는 자신의 충동을 참던 중 누군가가 그 방아쇠를 당겨주어서.
하나는 무언가 더 나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와서.

누가 더 나쁜 놈인가에 대해서 현행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있고
근거가 마련되지 않는 죄악도 있다.
우리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으로도 유혹자에게
더 큰 죄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가 교활하여 절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면
그를 단죄할 방법 역시 없음을 알고 있다.
성문법으로는 치죄하지 못하는 그의 [분명한 죄악]에 대해서
우리는 분을 떨지만 어쩔 수 없이 무력함을 깨닫는다.
문명인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야만스러운 선택을 취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사람이 아래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그 시절보다 미디어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 외에
유혹자의 마음 씀씀이는 더욱 후안무치해지는 것 같다.

법과 언론이 발달하면, 사회적인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 고상한 모습을 보이고 뒤에서 쓰레기를 뭉개는 행위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미 온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일어나는지 뻔히 지켜보는 피해자들은
누가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명확하게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한 마지막 작품 [커튼]에 보면
황혼의 탐정이 이 범죄자를 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사적 집행과 자살]이라는 극단이었다.
이성적인 두뇌파 탐정은 자신의 탈이성만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옳은 방법일까.

아니, [옳은 방법일까?]라고 묻는 내 자신이 옳은 걸까?
세익스피어는
현명하기 그지없는 데우스마키나와 같은 재판관에 의해
유혹자까지도 처벌하도록 만들었지만

우리에게 있는 정의는
눈가린 창녀 외에는 없지 않은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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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중에서

수련장 2009. 6. 2. 22:51

徑路窄處 에 留一步與人行 (경로착처 유일보여인행)이요 

滋味濃的 은 減三分讓人嗜 (자미농적 감삼분양인기)하라.

此是涉世  一極安樂法 (차시섭세 일극안락법)이니라 

좁은 길에서 한쪽으로 비켜 남을 지나가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삼분을 덜어 남에게 맛보게 하라
이것이 세상사 제일 안락하게 사는 방법중 하나라.

*-------*
쉽지 않다.


2) 방금전 들어온 속보를 보니...현직 대통령과 가장 친한 회장의 영장이 기각되었구나.

棲守道德者는 寂寞一時(서수도덕자 적막일시) 
依阿權勢者는 凄凉萬古(의아권세자 처량만고)

達人觀物外之物(달인관물외지물)

思身後之身(사신후지신) 

寧受一時之寂寞(영수일시지적막)

毋取萬古之凄凉(무취만고지처량)

도덕을 지키는 자 일시적으로 적막하나
권세에 의지하고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통달한 이는 사물 밖의 사물을 보며
몸 뒤의 몸을 생각하는 것이니
차라리 일시적으로 적막할 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꼴은 취하지 말라


*------------------*
젊은 이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면
옛 성현의 말이라도 귀를 세우고 듣도록 해라.
육법전서만 외우면 뭣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
아...씨.

나라가 뭐 이래?

Posted by 荊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