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해당되는 글 131건

  1. 2010.03.03 만들어진 길 3
  2. 2010.03.01 어울리지 않음 2
  3. 2010.02.27 춘향전 한 구절 2
  4. 2010.02.17 궁즉악(窮卽惡) 2
  5. 2010.02.11 할 일을 찾아 걸어간다는 것은 6
  6. 2010.01.20 하고 싶은 일 6
  7. 2010.01.07 우정으로 하늘을 뚫는다 하지만 4
  8. 2010.01.07 두런두런 2
  9. 2009.12.28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6
  10. 2009.09.21 bachelor

만들어진 길

투덜투덜 2010. 3. 3. 15:18
선대의 지혜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내려오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수 세대 혹은 수 많은 시간의 시행착오 후에 그나마 괜찮을 것들을 추려서 후대에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그 길을 따라 간다는 건 싫더라.

어쩌면 그냥 예전에
얼굴도 모르고 사주단자 받아서 
이 여자 만나서 애 낳고 살아라 하면
얘 알겠습니다 하고 살던 시절이 훨씬 능률적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면부지 여자하고 애 낳고 사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안 될 게 무언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게 논리적인 것이었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나중에 북망산천 보고 가며 썩어 문드러져 한 줌 흙이 됨은
고래의 어떠한 인간이든 빗겨나갈 수 없는 운명이니
여기서 뭘 하자 저것 하자 해 봤자 다 덧없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길
그냥 좀 더 밀어붙여 봐야하는 거 아닐까.
자식새끼 나을 요량이었으면 애시당초 그럴법한 사람 만났겠지.

지금 와서 괜시리 방향틀며 사는 게 싫단 말이다.
"내 이럴 줄 알았네, 진작에 그리 할 것이지" 라는 말을 듣는게
죽기보다 싫은게다.

어차피 뉘 말처럼 정상인의 범주에서 망가진 삶인데
좀 더 망가진들 어떠리?

Posted by 荊軻
,

어울리지 않음

투덜투덜 2010. 3. 1. 20:23
모임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가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것이라면 내가 그들과 처한 상황이 좀 다르다는 것 뿐이다.
어차피 아는 이들이니 내 편의를 봐줄 것이리라.
편의를 봐 주기 싫어도 가식으로라도 봐 줄 사람들이리라.

하지만 모두가 무언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자리에 결핍한 요소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쓸데없는 주목받음이나 소외가 싫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공통된 것을 가지고 말하게 되는 법인데
그 자리에 혼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고 싶지도 않았고
그걸 좋다고 감내할 성질도 아니다. 그래서 난 사람들하고 만날 때 둘 이상은 솔직히 껄끄럽다.

여하튼간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끼리의 모임도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처지가 달라지니
영 꺼림직한 분위기를 스스로 느낀다니.

자괴감이라 불려도 좋겠지만
아마 난 오늘 갔더라도 당연히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전화조차 한 통 오지 않는 처지에 언필칭 친구라니.
그건 호사로세.
Posted by 荊軻
,
백주(白酒)는 황인면(黃人面)이요, 황금(黃金)은 흑인심(黑人心)이라.


흰 술은 사람의 얼굴을 누렇게 만들고
황금은 사람의 마음을 검게 만드느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가는 데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데는 그 지닌 욕심대로 살면 그만이니라.


Posted by 荊軻
,

궁즉악(窮卽惡)

수련장 2010. 2. 17. 16:50
사람은 유한한 능력을 지녔을테니
언젠가는 힘과 기가 다 해서 사면초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보통있는 절망이야 시간이 지나면 손 툭툭 털고 쓰린가슴 부여잡으면
그냥저냥 대충 잊고 살아갈 수 있다지만
앞이 정말 캄캄할 정도로 삶의 벽에 부딪힌다면
사람 맘 속 깊은데 감춰진 검은 것이 뭉글뭉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른다.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 하는 성악설을 따른다 해도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사는 동네에서 그 속내를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정말 어려우면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이 궁해지면 통한다고 하는 궁즉통이라는 옛 말도 있지만
어쩌면 그만큼 악해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희망한다.
즐거움에 빠져 어려웠던 적을 잊지 않기를 희망하며
동시에 너무 지난하게 힘들어
사람의 길이 아닌 명부마도를 걷지 않을 것도 희망한다.

사는 것이란 정말 그 자체로써 수련이고 고행이고
내가 생의 끝까지 인간성을 놓치지 않는 노력의 연속인듯 하다. 
Posted by 荊軻
,
그동안 무언가를 해야 할 일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단 호구지책에 대한 염원 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 매진할 것을 찾고 있었는데
아주 어렴풋이 그 길로 가는 초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쉬운 일도 아니고, 전혀 가 보지 못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뒤돌아 생각컨대, 내 그동안의 짧은 살아온 길에서 내 스스로 정해서 갔던 길 중
끝까지 걸어가서 무언가 성과를 얻어내었다 할 만한 것은 지극히 적고 손에 꼽을만한 것이었다.
그 중 몇몇은 정말 천운이 닿지 않아서 중간에 관둔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내 심기가 불안하고
겁에 질려 도중에 관두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지내온 삶이 앞으로 살 날만큼이나 차 오른 뒤에야
또 다른 길을 하나 또 발견하였다.

늘 새로운 길을 가는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앞이 어둑어둑하고
초행길에 대한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으면 또 가야하는 것이 인생 아닐까.

좀 더 유하게 지난 날을 살펴보면, 그 동안 엎치락 뒤치락 헤메며 걸어왔던 길이
결국 이 길을 가기 위해 둘러왔다 생각해보니 그리 나쁜 여정은 아니었던 셈이다.

비단 이 일뿐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내 삶에는 빈 자리가 많고 그것들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남은 삶일 것이다. 그 동안 두들기고 두들겨서 나름대로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모양을 잡고 오롯하게 남은 것들을 담아낼 시간인 것이다.

안 보이더라도 끝까지 가 봤으면, 그리고 그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얻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내 스스로 먹고 살 일에 대해서도 하루빨리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욕심을 하나 더 내 보자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손잡고 같이 갈 이 하나쯤 있어도 좋으리.
Posted by 荊軻
,

나중에 늙어 육신이 땅에 더욱 가까와지면 흙을 밟으면서 살고 싶다.

아흔아홉간 짜리 고대광실이 아니더라도 지붕과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창을 열면 앞과 뒤가 바람으로 통하고  비가 오면 젖지 않을 뿐 빗속에 들어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에 살면 좋겠다.

그러다 때가 되고 날이되면 청산에 같이 육신이 흘러들어

작은 나무의 나뭇잎이 되었다가

장마지면 장마를 따라 물에 잠기고 겨울이 오면 눈이 쌓여 같이 얼고

따스한 봄이 오면 얼음과 함께 녹아 갓 생긴 개울에 흘러들어

멀리멀리 산천을 따라 유람하다 커다란 바다로 나가고 싶구나.




Posted by 荊軻
,

나이 먹어서 사람을 만날 때
그 돈독함이 젊은 시절 친구만 못함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비록 나이 먹어 만난 사이가
두 사람 친분이 어렷을 적 막역지우를 만난 듯 하더라도
금새 사안에 따라 언제 봤냐는 듯 돌아설 수 있음도
다 나이를 먹어서가 아닌가.

사람 사이 틀어짐은 겁이 많고 셈이 많아서일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 지레짐작함이 두렵고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저 이는 곡해할 것임이 두렵고
저이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내 이런 것이 손해보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도 다 똑같았다.

기분 나쁘게 말하는 친구는 늘 있었고
셈이 빨라 자기 잇속 차리는 친구도 늘 있었고
친구는 친군데 어디 갔는지 찾지 않으면 안 뵈는 공기같은 친구(?)도 분명 있었으니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일 뿐.

[저 인간이 이랬으니 더 이상 보지 않으련다]
라는 마음이 어렸을 적에는 거의 들지 않았고
그런 건 원수간에나 하는 줄 알았을 뿐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친구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도 되고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도 되고
오랫 시간 같이 한 이를 잘라도
인생에 별 문제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저 그러한 것인가보다.
[정도와 범위를 벗어나지 않음]에 대해서 어렸을 적에는 알거니와
나이를 먹으면 그 모든 것을 다 깨버려도 삶이 유지됨을 알기에 스스로의 삶이 피폐해짐이니.

바꿔 생각해보면
북망산천이 내려다 보이는 황혼에 서로 만났다 치더라도
[관계의 파탄]을 염두해 두지만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낼수 있음 아닌가.

물론 서로가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겠지만
예의를 벗어났을 때 얼마나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한계는
내 맘속에 어떤것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가 [그런식으로 나온다면] 인가.

Posted by 荊軻
,

두런두런

작은 방 한담 2010. 1. 7. 00:55
뭔가를 집중해서 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만
집중해서 뭔가 한 다음에는 허탈함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그 일을 성취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도전하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들을 한다.
일견은 맞는 말이다. 사람은 족함을 모르는 동물이다. 
도전은 도전을 낳고 목적은 목적을 낳는다. 욕망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작은 구멍이 뚤린 풍선같은 것이다. 쪼그라들지 않게 만들려면 계속 숨을 불어넣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커지게 만들려면 지금 부는 숨보다 더 크게 불어야 한다. 
대부분은 구멍뚫린 풍선이 터지기도 전에 숨이 차 죽을테지만
사람들은 풍선이 한없이 커질거라고 생각한다.

난 오늘 죽을지도 모르고 내일 오전에 죽을지도 모르고 내일 이맘 때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세상의 이치는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사람은 그에 반해서 공고한 것을 원하지만
결국 세상에 영원히 내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법이다.

돈을 원하고 안락한 가정을 원하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혹은
저 모든 것과 바꿔도 좋을만큼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원할지도 모른다.

산의 정상과 계곡의 밑바닥
사람은 양극을 모두 원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결코 살아가면서 만족함이라는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최소한 이런 시절에는.

현실을 충실히 사는 것은 아프리카 사바나의 사자나 얼룩말이 나보다 충실할 것이다.
먹기 위해 기를 쓰고 잡아먹고 살기위해 기를 쓰고 도망치니까.

과연 사람은 뭘 위해 사는 걸까.
욕심만이 동물과 나와의 변별을 가져오는 걸까?


Posted by 荊軻
,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선호가 있고
그것에 맞춰서 다른 모든 일들이 움직이기를 바란다.
직장이건 목표던, 인생의 끝으로 향하는 과정이건.

하지만 이 문제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게 들어가면 정말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나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람은 살아가기 때문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취향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일어났습니다]와 같은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는 바,
특히나 가족간의 경우라면 살아가면서 일상다반사로 겪게 되는 일이다.

젊은이는 반항과 패기와 열정으로 거부하고
늙은이는 연륜과 경험과 고집으로 강요한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둘이 잘 조율하면 끝날 일이긴 한데
그렇지 못한 경우일 때는 일이 마무리 된 뒤에도 그냥 평행선을 가는 일이 허다하니.
그냥 한 쪽이 세게 나올때는 숨죽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중에 한 사람이 택한 행동의 결과가 거지같을 때는
뒤에서 슬쩍 일어나서 
[내말 안 듣더니 그럴 줄 알았지. 우헷헷헷]같은 블랙코미디같은 엔딩도 나온다. 새드엔딩 아닌가.

그렇다고
사람 한 번밖에 살 지 못하는 인생에
실수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고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타인의 취향을 맞추며 살아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나이를 먹으면 이제 그런 일은 없다 싶었는데 
계속 일어나는 걸 보면 나는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로다.
Posted by 荊軻
,

bachelor

작은 방 한담 2009. 9. 21. 00:30
어떻게 살고 있냐는 동네교회후배친구의 질문에
나는 웃으면서 다 이야기해주었다.

결국 듣는 사람이 당혹스럽고
말하는 나는 웃을 수 있더라.

상을 당해도 6개월정도 지나면 다시 웃을 수 있는게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경험해보라고 권장할 짓은 못 된다.
죽는게 낫지.

감정은 가고 흉터는 남는다.
Posted by 荊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