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협 사상최악의 금융사고 발생.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건물이나 지어댈 줄 알았지 시스템에 투자하지 않기로는 예전부터 유명했던 곳 아닌가.
내가 거기 다녀봐서 아는데...(?)

이번 신용.경제사업 분리가 되자마자 전산장애가 터졌다는 것이 뭔가 의미심장하긴 하다.
어쨌건 박정희 시절 이후 반 강제적으로 농촌마다 들어가 있던 금융기관이다. 전국 장악력은 우체국과 함께 제일이라고 봐도 되는 금융기관. 하지만 시스템과 사람들은 박통,전통시절 이후 변화가 없는 공룡.

그리고 [금융기관]이라고 불려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회사.
감히 말하건데 타락한 너희는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받으리라.
농민들은 부채로 신음하는데 계속 봉급이나 올려대고 수익률싸움에나 눈 벌개진 너희들이 무슨 협동조합의 정신을 운운하냐.

크건 작건 뱅크런은 일어날 것이다. 
나도 얼마 남지 않은 돈 다 빼버려야겠다.
그동안 너무 정을 오랫동안 줬던 게다. 사실 빼 버릴 타이밍을 주저주저하고 있었던 게지.

월요일날 집 앞으로 옮기고 모든 이체자리를 정리한 다음 옮겨야겠다.

아디오스, 내 옛 직장.
아디오스, 벨라 세뇨리타 


2. 
 정말 이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난 영 입맛이 황이라 ...


3.
어떻게 힘들게 꾸역꾸역 초고를 쓰고, 다시 이젠 정리해서 한타싸움을 노린다.
과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돈 잘 주던 은행(?)도 때려치고 나온 지 벌써 10년.
무라도 잘라야 하는데 무 밭도 없다.
남들은 마늘밭에서 돈도 쑥쑥 캐내던데. 


4.
케이블TV에서 [시리어스맨]을 제대로 끝까지 봤다.

욥기를 다시 한번 제대로 정독해야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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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군대에서 사진기술을 배웠고, 사진기사로 꽤 잘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호 영화사에 구인공고가 떴을 때 촬영부로 입사원서를 넣었는데
창구에서 분류를 잘못해서 배우원서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배우가 되었다가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에게 발탁되어
일본 제일의 배우가 되었다는


정말 믿거나 말거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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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교통사고

수련장 2011. 2. 3. 12:35
아버지 집에 들렸다가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고속터미널 사거리에서 직진을 받아 들어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옆 차선의 고속버스가 쑥 밀고 들어오더니 쾅~하는 굉음과 함께 내 차를 들이받는거 아닌가.
방어운전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옆차가 밀고들어오는데 무슨 방어운전, 재수 옴 붙었구나 싶었다.순식간에 백머리 접히고 드드득 소리가 나는데 그 짧은 창졸간의 순간에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내 차~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ㅠㅠ

차를 옆으로 세워놓고 고속버스 운전기사가 내릴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운전을 어떻게 하시는 거요!"

"갑자기 오른쪽에서 차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죄송합니다."

가만 보니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센 기사분이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일단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한참 연배많은 분이 그러시니 소리질러놓은게 후회가 된다.
차는 서울 - 연무대. 연무대라. 
설에 연무대를 가는 사람들은 무얼까. 어차피 거기 사는 사람들도 있겠고
...그리고 아들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

"설날인데 조심해서 가십쇼."

"예"

대충 차를 보니 내 차에 난 흠집은 별로 없고, 버스에서 붙은 도료만 좀 붙어있었다. 생각보다 내 차가 통뼈인듯 별 이상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설날 아침부터 도로에서 드잡이질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버스 보내고 집에 차를 몰고 들어왔다.

내 옆에 누군가 타고 있었으면 더했을까. 아마 체면을 봐서라도 좀 더 뭐라고 실갱이를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화 내고 싶지가 않더라. 3년만 더 젊었더라도 불같은 성정을 주체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늘 일상은, 재난은, 복과 화는 내가 대비한다 하더라도 나를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는 것도 아니다. 일희일비하며 삶을 살아가기에는 세월이 너무나도 길고 짧다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화를 안 내고 그냥 보낸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내 스스로의 화를 참지 못하고 기분을 참지 못하면 모두에게 더러운 설날이 되었을 것이다. 손님들도 성질이 났을테고 기사는 정초부터 낙담을 했을테고 나는 왜 이렇게 인생에 더러운 일만 생기냐며 자학을 하고 있었겠지.

연산군이 이런 글을 남겼더랬다.

인생여초로 회합부다시라.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인생은 풀잎의 이슬같아 만날날이 많지 않구나.
어차피 그렇게 조금씩 만나며 지나갈 일,  미련을 두어 무엇하랴.

세상의 일체가 꿈이요 바람이요 거품이요 번쩍이는 번개와 같은 것일텐데



나도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가는 모양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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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죽는다. 
적금을 언젠가는 타듯이 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적금을 탈 떄는 기쁘지만 죽을 때는 별반 기쁘지 않을 것이다. 고생만 하다가 간다면 속 편할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 연예인 장례식을 가상으로 치룬적도 있지만
가끔은 내 장례식에 누가 어떻게 올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별로 없더란 말이다.

내가 사고로 급사하지 않는 한,
내 친구들도 고등학교 친구나 교회 선후배들인데 다 고만고만한 나이 아닌가.
자기가 북망산을 바라보는 나이일텐데 내 장례식에 몇 명이나 올까. 
우정이 빛바래지 않고 건강이 허락한다면 조문은 올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친구분들이 와서 서럽게 울던 10년전의 그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세월이 비껴가지 못하는 우정이란 참으로 고맙고 황금같은 것이지만 내 친구들이 밤을 새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 나이에 내 관짝을 지키고 서 있다간 도미노로 장례를 치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있을까. 어차피 고양이들은 나보다 수명이 짧으니 먼저 갈 것이고 고양이들에게 장례를 맡기는건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장면이니 배제하자. 
결혼을 안 하고 이대로 살다 죽으면 내 조카랑 사촌조카들이 내 장례의 상주가 되겠구나. 하긴 그 때쯤 되면 초코렛따위 찾으면서 형하고 쌈질같은 건 안 하겠지. 좋아. 상주는 있으니 됐고. 마누라도 없으니 유족도 없겠네. 내 동생하고 제수씨, 조카, 사촌조카들이 내 주위에 좀 있을 것 같다. 뭐, 이 정도면 그냥 흡족하진 못해도 그럭저럭은 되겠다. 교회의 [경조사위원회]에서도 몇 명 오겠지. 내가 고등부 교사를 계속하고 있으면 아마 대학졸업한 첫 제자들 정도는 문상하러 와서 일을 도와줄 지도 모르겠다. 음. 계속 봉사를 해야겠군.

묘지는 아마 우리 가족이 마련한 가족묘에 들어갈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일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이것인데, 집안 가족 누구 하나 돌아가시기도 전에 천안에 가족묘를 사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혜안이 아니실 수 없다. 하여간 나는 그 자리에 꼽사리를 끼면 된다. 죽은 뒤 묘자리도 있으니 끝.

절차와 결과도 어느 정도 되었으니 남은 문제는 장례식중의 분위기일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고 예측해 봐도 

"고생만 오지게 하다 죽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구질구질한 솔로 남정네였는데 성격이 더러웠어"
내지
"괴퍅하게 살더니 자식 하나 못 남기고 죽었네"
내지
"하는둥 마는둥 살더니 대충 가버렸네"

이런 종류의 발언을 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혼 없고 넋 나간 육신이 시체냉장고에 들어가 있겠지만 저런 말을 듣고 있자면 상당히 찝찝할 것 같긴 하다. 최소한 우리 할머니처럼 깨끗하게 살다 가셨네 혹은 그래도 복 많이 받으신 분이네 소리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아니라 우리 상주녀석들이 말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든다.
결국은 내 뒷 세대들에게 나쁜 모습을 남기고 죽고 싶지 않은 바램이랄까.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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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입사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던가 아니면 그 전이었던가
나름대로 뜻한 바 있어 대학원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서강대 언론정보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서류심사까지는 통과했다. 그리고 교수와 면담이 있었다.

그 날도 스산하니 추운 날이었다. 작은 정원만한 동산을 가로질러 외우기도 힘든 사람이름 붙은 건물 안에서 기다리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리고 교수와 만났다. 희한한 일이었다. 일대일의 독대였으니. 면접이 아니었던건가. 

하긴 그 당시엔 대학원을 가겠다는 사람들 자체가 드물었다.IMF가 터지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을 뿐 아니라 언론정보대학원이라는 곳이 미디어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뽑는 곳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때는 지원자 자체가 없었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난 그 교수와 함께 면담을 시작했다.

"이번에 저희 대학원에 서류를 넣으셨죠"

"예"

교수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말을 했다.

"아무래도 곤란합니다."

"뭐가요"

"입학 말입니다."

"무슨 결격사유가 있습니까."

"나이가...많지 않습니까."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교수는 날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어차피 대학원에서 졸업하고 나면 서른이 넘습니다. 그 뒤에는 취직을 해야지요. 하지만 이쪽업계에서 취직을 서른 넘어서 하기는 힘듭니다. 더군다나 저희 학부에서 가르친 사람이 취직을 못한다는 건 저희로써도 난감한 상황이고요. 그래서 아무래도 입학에 결격사유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10년 전의 일이다. 서른 살도 되기 전의 청춘에게 교수가 한 말이라는 것이.
그때는 참으로 순박하고 세상 허투루 살았던 듯 싶다. 교수의 그 한마디에 나는 그냥 고개만 숙이고 묵묵히 돌아서 그 학교를 나와버렸다. 지금 같았으면 일단 앞에 앉은 인간 옥수수 너댓 개는 출장보내고 다시 면담을 시작하거나 합의를 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겠지. 그런데 난 그냥 '다 어렵구나...' 이러면서 세상살이 힘들다는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그 때는 어려웠다. 취업이 학교를 좌우하는 시절이었을테니까. 각박함이 사회를 갉아먹던 초창기 시절 아니었던가. 좋게 봐줘서 교수의 속내는 그런 것이었을게다. 여기서 학업을 포기하게 되면 저 인간 그냥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서 돈 잘 벌지 않을까. 늦게 꾼 꿈의 끝이 마냥 달콤한 법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참으로 애석하게도
난 교수의 말과는 상관없이 퇴사하고 다른 길로 가버렸고, 그 길에서 직업을 구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그리고 연봉1100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길을 가는데 혼자 바닥바닥 바닥을 기어서 직업을 따내는 데 1년 반이 걸린거다. 그 시간이면 그 학교에서 웬만한 건 배우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서 못한다고 하는 법이란 없다. 더군다나 배움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제일 쉬운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길이 가장 진입하기 어려웠다. 

왜 바꿔서 생각을 못했을까.
저 나이 되어서 이 문을 두드릴 정도라면 이미 이판사판 각오를 하고 들어오는 사람이라는 것을.

작년에도 똑같은 일을 당하고 나니
딱 10년 전의 그 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

늦었다. 늦었다. 배우고 나면 이미 늦으리.

천만의 말씀.

계단으로 올려주는 수고를 덜지 몰라도. 산을 올라가려는 사람의 의지가 있다면 절벽을 파서라도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사람일진대. 단지 올라가는 시간이 한없이 더뎌질 뿐. 결국은 올라가고야 말 것인데.

-
사람마다 팔자라는 것이 있고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택시나 엘리베이터는 못 타고 도보나 계단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인생도 있는 것인 모양이다.
늦어진다고 어찌하겠는가. 그게 내 것이 아닌 것을.
중간에 힘들다고 울면서 다시 되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인데.

도달하고야 말 것인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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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생일을 맞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녀가
내 생일을 기념해서 모텔에서 섹스를 하겠다고 하면 그게 미친 짓 아닌가 싶다.

나 닮은 아들 딸이라도 낳고 싶은건가? 어차피 부부사이 아니면 콘돔 쓸 거면서.

오늘은 그리스마스 이브.
모텔을 찾아 추운 겨울밤을 성난(?) 청춘들이 방황하는 거룩한 밤.

벼락이나 맞을지어다. 아멘.


2.
인생의 중요한 갈래길은
생각보다 훨씬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절대로 큼지막한 일들은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만 보면 인생사에 경홀히 할 것이 없다.

이쯤에서 대충 접어도 되거나 관둬도 되거나 혹은 내멋대로 해도 되겠지 싶은 것들이
나중에 혹독한 부메랑이 되어서 날아오곤 한다.


3.
어서빨리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고 새 해가 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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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the pine trees linin' the windin' road
굽은길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들처럼

I've got a name, I've got a name
나도 이름이 있네, 나도 이름이 있네

Like the singin' bird and the croakin' toad
지저귀는 새들과 개굴대는 두꺼비처럼 

I've got a name, I've got a name
나도 이름이 있네, 나도 이름이 있네

And I carry it with me like my daddy did
나도 내 아비처럼 이름을 지녔지만

But I'm livin' the dream that he kept hid
난 그가 잊고 살던 꿈속에서 산다네



Movin' me down the highway
드넓은 길로  지나가세
Rollin' me down the highway
광할한 길을 달려가세
Movin' ahead so life won't pass me by
삶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움직이세 


Like the north wind whistlin' down the sky
하늘에 기적처럼 소리내는 북풍 처럼

I've got a song, I've got a song
나도 노래가 있네, 나도 노래가 있네

Like the whippoorwill and the baby's cry
쏙독새 울음처럼, 어린아이 울음처럼

I've got a song, I've got a song
나도 노래가 있네, 나도 노래가 있네

And I carry it with me and I sing it loud
난 노래를 지니고 다니며 크게 부르지만

If it gets me nowhere, I'll go there proud
성공못한다 한들, 나는 자랑스러울 거네

Movin' me down the highway
드넓은 길로  지나가세
Rollin' me down the highway
광할한 길을 달려가세
Movin' ahead so life won't pass me by
삶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움직이세


And I'm gonna go there free
그럼 나는 자유를 얻겠지


Like the fool I am and I'll always be
난 바보같고 항상 그럴테지만

I've got a dream, I've got a dream
난 꿈이 있네, 난 꿈이 있네

They can change their minds but they can't change me
사람들은 생각을 바꿀수 있지만 나를 바꿀 순 없네.

I've got a dream, I've got a dream
나는 꿈이 있네, 난 꿈이 있네

Oh, I know I could share it if you want me to
자네가 원한다면 꿈을 나눌 것이고

If you're going my way, I'll go with you
같은 길을 걷겠다면, 동행이 되겠네

Movin' me down the highway
Rollin' me down the highway
Movin' ahead so life won't pass me by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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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미첼은 세상에 단 한 권의 책을 내고 남편하고 길을 가다가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어 죽었다.
에밀리 블론테 역시 단  한 권의 책을 내고 병에 걸려 죽었다.
기형도는 시집을 내려다가 내지도 못하고 극장에 앉아서 죽었다.
이중환은 평생 귀양살이를 전전하다가 논문 하나를 남기고 죽었고
헤로도토스는 평생 전쟁사 하나만 파다가 죽었다.


마가렛 여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하나를 평생의 업적으로 남겼고
[폭풍의 언덕]으로 에밀리 블론테는 아직도 기억되고
기형도의 유고시집은 그 자체로 이미 시인들의 표상이 되어 있으며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대표하고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수많은 서양역사물의 시작점에 올라있지 않은가.

평생에 단 한 권이라도 사람들에게 남겨질 수 있는 것을 남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거운 노릇이 아닐까.

파랑새를 쓴 마테를링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은 한 권의 책이고 평생 단 한 번만 쓸수 있는 책이다.

너무나도 지리멸렬하고 중언부언하면서 내 책을 써 온 것이 아니었을까.
허탄하고 심란하고 의미없는 대사와 묘사로 지금까지 반절 이상을 채워온 것이 아니었을까.

단 한 권으로 끝날 것이라면 무언가 남겨야 할텐데.
남기지는 못할더라도
최소한 다른 이들에게 베개는 고사하고 불쏘시개라도 되지 않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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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mori

작은 방 한담 2010. 10. 25. 23:51
지난 주 토요일, 거진 몇년 간 찾아뵙지 못한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뵈러 천안까지 온 가족이 떠났다. 온 가족이래봤자 나랑 동생이랑 부모님이다. 그래도이렇게 가족이 모여서 차를 같이 타고 내려간 것도 오랫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딱 출발까지였다. 단풍을 보겠다는 행락객의 여파로 9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12시가 되도록 기흥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결국 천안까지 반절도 못 가고 다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야밤에 도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다음 주 쯤에 다시 가야한다. 

아버지는 요즘 계속 무덤을 들르고 싶어 하신다.
사람은 때가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물론 저러다가 한동안 더 장수하실지도 모르지만 속내가 급하신 게다. 가족들의 무덤을 보고 어디에 묻혀있는 지를 보고, 그리고 정리해 둘 것은 다 정리해 두고 당신도 떠나실 채비를 하려는 것이다. 그걸 맏이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차가 막힌다고 연발로 욕을 해대는 아버지를 옆에 두고도 나는 한소리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일순간이다. 
할머니 임종을 본 것이 어제 저녁같은데, 내 나이가 불혹에 다가간다.
누구나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고 흙으로 돌아간다. 내가 살던 자취는 몇 달 지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할 자는 기억하리라. 누군가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사라짐으로
우리의 후대들에게 인생의 필멸과 부질없음을 또한 깨닫게 할 것이다.

죽은자를 기억하라, 그들도 한 때는 우리처럼 청춘이었고 삶과 꿈에 모든 것을 걸고 밤을 새던 자들이었으되
지금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으니 모든 이의 인생이 그러한 것이다. 너른 하늘은 계속 움직이되 변하지 않으나 좁은 땅에 발 붙인 이들은 영원할 것같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다가 풀잎이 마르듯 소리없이 짧게 사라진다.

다음 주에 제대로 찾아가면 나는 할머니의 산소를 기억하려나.
그 수많은 무덤들 사이에서 조모의 묘소가 어디쯤 있는지 기억이 나려나. 

아마 이번에 가지않으면 그나마 실낱처럼 남아있는 기억도 흩어지겠지
기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기억해야 내가 기억될 것 같은 이 느낌이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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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심히 열심히
필설로 감히 설명하기조차 뭐하도록 열심히 살려고 아둥바둥 대는 녀석이 있다.
눈에는 독기밖에 안 남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 녀석
사람을 볼 때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볼 정도로
자신의 인생관이 이지러질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욕심많은 녀석.

실패. 또 실패
그리고 또 실패.

가끔 그 녀석을 볼 때마다
난 뭐라고 하기 힘든 서러움을 느낀다.

욕심이 사람의 길을 헛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굴곡진 그네의 팍팍한 인생과정이
과욕으로 실패를 부르는 것일까.
앞날이 어둡도록 눈을 멀게 하는 것일까

난 그렇게 부지런을 떨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건만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응당한 보상을 받는 길이라도
이 노력본위의 세상에서는 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뭐가 옳은 것일까
세상을 거쳐가는 문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그 문들이 모두 어디로 열려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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