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게 어차피 기나긴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여행자의 신분이라는 것일진대

오고가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자기를 보여주고 타인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
회자정리. 어차피 언제건 만난 사람들은 다시 헤어지기 마련인데
되도록이면 서로 흩어지면서 나쁜 그림자는 남겨두지 말아야겠다.

그게 내 뜻으로 되는가. 내 탓만 있겠느냐 하면서 살아가고
잊어버리고 한다마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안 좋은 발자국 지워버리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오랫만에 같이 놀던 사람 하나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듣는데
왜 그리 사람 사는 마당에 거추장 스러운 꽁무니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나 스스로가 찔려 반성한다.

차라리 쉽게 떠날 것이면 화사한 모습이나 보여주고 끝날 일이 찰나의 인연인 것인데.

소소한 연말의 회상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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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다른 사람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기소침함이라는 것이 생긴다.

[사람들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결핍],
그 결핍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걱정에서 해방되어 타인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노력은 대단한 욕망이 따른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많은 결함과 단점들을 그 문제에 귀결시켜버리기도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저것만 가지고 있었으면 이런 일은 오지 않았을 것이야"부터 시작해서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은 저것 때문이야!"로  결론지어버리기도 한다. 일종의 우울증. 그리고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일수도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겠지만 나도 남들 못지 않게(?)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는 요소들이 있다.

 
2.
나는 머리숱이 적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아예 대 놓고 적어지기 시작햇다. 급격하게 빠지기 시작한 건 가정사에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다. 당시에는 정말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빠졌다. 암에 걸리지 않았나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빠진만큼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오히려 그날 이후 여세를 몰아 대머리 그날까지 가열차게 머리카락들이 가출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있다.

이거 정말 짜증스럽다. 아예 배코를 쳐 버리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두상이 이뻐야 좀 봐줄만한 것이다. 내 소싯적에 울지 않는다고 그냥 멀뚱멀뚱 놔두었단다. 움직이지 않고 허공만 보고 있으니 어찌 되었겠나. 뒤통수가 납작이지. 행여 지금이라도 애가 있는 집안이라면 애 잘때 열심히 머리를 둘려줘라. 그래야 대머리인자가 있어도 부모를 덜 원망한다. 각설하고, 하여간 점점 숱이 없어지는 꼬라지가 영 보기 싫어서 결국은 병원을 한 번 찾아보았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데 나름대로 방귀좀 뀐다는 대한민국의 모발시술 실력자 세명을 만나봤다.

첫번째 의사 : 일단 가격 불러주고, 맡기면 알아서 심어주겠단다. 나름대로 실력은 인정받는다.
두번째 의사 : 심지말란다. 모발 자체가 힘이 없으니 나중에 심은 부분 빼고는 다 없어질 것 같단다. 
세번째 의사: 약으로 현재 있는 부분을 지속시키고 모자란 부분을 심잔다.

세 사람 다 같은 스승아래에서 배웠다는데 말하는게 삼인삼색이다. 미칠 노릇이다. 내 머리털이 화수분도 아니고 함부로 쓱싹할 자원도 아닌데다가, 한 사람은 묻지마 시술, 한 사람은 하지마, 한 사람은 조건부. 그러면서 가격들은 거의 경차수준. 이 정도라면 사람이 허탈해진다.


3.
사실 개인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두고 움직인다. 그래서 두번째 의사의 말을 나는 가장 신뢰한다. 긍정은 세상을 이겨가는 힘이라지만, 실제 인생에서 해피엔딩은 동화에서밖에 더 있겠나. 다른 건 필요없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보면 안다. 긍정의 힘은 생명연장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차피 빠질테니 그냥 멍하니 있자"라는 것도 못할 노릇 아닌가. 이것저것 생각해 봐도 남는 방법은 정력감퇴에 그렇게 좋다는 탈모억제제를 먹으면서 심던가. 아니면 배코로 치던가 둘 중 하나로 귀결될 것 같다.


4.
살면서 새삼스러운 것들을 부러워 한다. 알콜달콩 부인과 사는 삶을 부러워한다. 안정된 직장이 있는 삶을 부러워 한다. 머리카락이 줄어들지 않는 친구들을 부러워한다. 비염이 걸리지 않는 친구들을 부러워 한다. 잠을 잘 자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두통으로 고생하지 않는 친구를 부러워 하며, 소화가 잘 되는 친구들을 부러워 하며, 뭔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시 웃을 수 있는 활력이 남아있는 친구들을 부러워 한다.

커다란 쓰나미가 아니라 잔 매에 서서히 무너지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커다란 거 하나의 성공이 아니라 자잘한 거 여러개가 성공하는 삶을 꿈꾼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엎어치나 메치나 결과는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하긴 나만 그럴까? 모든 이들의 삶이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에 대한 자학일텐데.

이제는 좀 벗어나고 싶다. 삶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가항력에 밀려서 표류하는 삶에 대해서 더 이상 한탄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머리카락이 붙어있건 사라지건, 사람들이 주위에 있건 말건, 재물이 있거나 말거나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지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삶에 대한 내 고민이 집착과욕망이라면 그 모든 것이 다 끊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삶이라는 것은 불타가 말한 것처럼 고집멸도의 방법 외에는 없는 듯 하다.
평안과 행복이라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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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몇년 전 이야기다.
촛불시위가 한참일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뛰쳐나가던 시절이야기다. 한 사내가 있었다. 어디 포목상을 한다던가 하여간 그쪽에서 일하는 양반이었는데 이 분이 참 열심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자신이 자비 부담해서 촛불 사고 행사 있으면 옷 구매하고 하여간 여러 사람이 단체로 행동할 수 있는 물품들을 만들어서 보내는 데 들어가는 일들에 앞장서서 나섰다. 돈도 솔찮게 깨졌으리라.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는 꽃까지 몇 박스 준비해서 조계사에 아예 놔 두기까지 한 양반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했다. 결국 이 양반은 그동안 들어온 성금들과 새로 돈을 모아서 회원들명의로 불우이웃돕기까지 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 양반 사업체가 부도를 직격으로 맞았다. 같이 일하던 놈이 돈을 들고 중국으로 튀었다. 사람이 흔들린 모양이다. 사흘 굶은 사람에게 떡집 지키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지킬 지 모르겠지만 이 양반은 굶어죽을지언정 지조를지키기에는 절박했던 모양이다. 급한 김에 모금통장에서 돈을 일부 인출했다가 다시 채워넣었다. 그런데 그걸 다른회원들이 알아내었다. 

법적으로 심판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 사람은 다시 채워넣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건 엄연한 횡령이었다고 떠들더라. 고결하기 그지없는 회원님들께서 아주 사람 하나를 짓이기고 조각조각을 내버렸다. 형사에 가니 어쩌니 하면서 떠들던 와중에 결국, 회비는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불우이웃에게 기부를 했고, 그 양반은 그 모임에서 찍혀나가다시피 하며 떨궈져 나갔다. 그 사람을 죽이겠다고 덤벼들던 도덕론자들에게는 그래도 명분이 있었다. 공공의 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당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
세월이 지난 뒤 곽노현 교육감이 선의로 2억을 줬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사전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고 떠든다. 본인의 입으로 선의로 줬다고 시인하였다. 하지만 검찰은 선의와 법치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그를 구속하려고 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같은 모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검찰을 욕하더라. 이것은 대놓고 사람 죽이기 아니냐고. 그냥 멍하니 그 모습 보고 있다가 코웃음이 나더라.

독립언론이지만 언론이 교육감을 응원하고, 그가 교수 출신이고, 그릇된 정권이 대척점에 있는 아이콘이기에 핍박을 받으면 안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선의로 줬다고 말까지 한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구속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몇년 전의 그 양반도 자신이 돈을 잠깐 빼 썻지만 기부 전에 다시 채워넣었다. 뭐가 다르길래 그 때는 이빨 내 놓고 찢어발긴 주제에 지금은 [선의로 더 큰 거금을 준]사람에게는 한량없는 자비를 베푸는 건가. 포목상 그 양반은 선의가 없었다는 건가?

3.
난 사람을 애초부터 믿지 않는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인간들은 더  믿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여론이라는 것을 믿고 경험해 봤기에 더더욱 그렇다.  난 곽노현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가 권력의 개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동류에게 쳐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번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면. 만약 그 사람이 처맞지 않아도 된다고 사람들이 믿는다면 예전에 그렇게 엄격하게 사람 하나를 골로 보냈던 인간들은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죽을 떄까지 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인간은 가지고 있는 신분이나 위치나 금액에 의해 다른 평가를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갈대 아니랴?
난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절대로 인간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생물이라고 믿는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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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이렇게 했으면 어떠했을까
저렇게 했으면 어떠했을까

결국 그런 생각의 실타래 끝에는 현재에 대한 낙심만 존재할 뿐이다.

흘러간 시간을 담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영속되어 보이는 것일 뿐. 그곳에 구태여 얽매여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해체되어야 할 요소들로 불안하게 조립되어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것이 유지되는 기간에 불과할 뿐. 수직으로 밀집하여 쌓여있던 것들이 드넓은 공간으로 환원되어 날아간다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유가 멈춘다고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니 후회는 그만.
그저 현재의 내 모습에 불쾌한 상상만을 더해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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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8전

작은 방 한담 2011. 8. 2. 00:35
사람의 삶에 [성공]이라는 두 글자나 [성취]라는 단어를 자신의 일대기에 새겨넣을수 있는 사람이 과연 태어나서 몇이나 될 것인가 상상해본다. 내가 하는 일은 참으로 작은 일들인데 이 일에서도 그런 단어를 찾아내는 것이 힘들다. 뒤돌아 생각해 볼 때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그 많은 위인들과 기인들은 그들의 삶 이면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그들은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뒤돌아보기에는 참 힘들게 버텨낸 시간들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뭔가 힘써서 내달리던 길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승점에서 얻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한 낭패가 어디있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하고, 내가 마지막까지 생을 달려갈 때 내 손에 한 줌 쥐어지는 것이 없을까봐 두려워한다.

아니,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 삶의 종장에 가서야 그 가치를 입증받는 것이 더 두려울지도 모른다.
평생 일구고 열매를 맺어놓았는데 정작 열매는 따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농사꾼이라니. 참 불쌍해보이잖아. 

그래도 달려가는 것 외엔 길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어디로 가야하나 하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 길을 계속 가야하나. 아니면 뭐 다른 곳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어차피 어디로 가던 넘어지는 것을 같을텐데.

인생은 7전8기가 아니라 7전8전,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기어서 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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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말한다.  젊은이들은 노력과 끈기가 부족하다고.
어른들이 늘 말하는 걸로 봐서 젊은이들은 늘 노력과 끈기가 부족하다가 어느 날 머리가 벗겨지고 정력이 떨어지면서부터 노력과 끈기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노력이건 자신감이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심리요소가 사람의 인생과 행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이 없는 남자는 여자가 좋아하지 않는다.
옳은 것만을 말하고 고아한 품성을 지닌 소심한 사내보다는
매일 돈이나 꾸러다니고 입에 거짓말을 달고 하는 대범한 남자를 여자들은 더 좋아한다.

(사실이다. 관찰자적 시각에서 충분히  목격한 바니까 토달지 마라. 네 주변에 다 그런 년놈들 밖에 없는거다고 말한다면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내 비천한 환경을 욕하라)

노력과 자신감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가 빼앗아 가는 것이다.

정기충천하고 세상에 거칠 것 없는 남자도 딱 여자에게 열 번만 차이면 그 남자는 연애에 관한 한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노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기를 쓰고 작업한 거 열 번만 리턴되서 들어오면 사람이 소심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환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짐승은 안 그럴까. 첫째 고양이가 다리를 다친 뒤에 새로 생긴 표정이 하나 있다. 고개를 죽 빼고 눈만 위로 떠 올린, 말 그대로 [불쌍해 보이는]표정을 가끔 짓곤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기 힘들다던가. 예전에 올라간 곳을 못 가던가 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거다. 최소한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과거를 느낄 수 있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자신감과 노력의 상실이라는 짐을 지게 마련인 듯 하다.

결국 자신감와 끈기라는 것은 그러한 슬럼프를 벗어나는 것 외에도
꾸준히 자기자신에게 무언가 성취욕을 계속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거나 향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양이에게 계속 딸랑이를 흔들어주다가 마지막에 고양이가 잡도록 만드는 것처럼.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성취욕을 만족시키는 것도 하나의 훈련이 될 것 같다.
매일 실패하는 인생만큼 불쌍한 게 어디 있을까. 내가 노력하는 만큼의 효과가 나올 거라는 자기암시를 꾸준히 걸어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자문제는 이거 쉽지 않네. 돈이나 많으면 술집 아가씨라도 꼬셔볼텐데 그것도 안되는 재정적 난망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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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에 대한 결과

수련장 2011. 6. 11. 00:55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두가지 일을 끝임없이 하고 있다.

하나는 글쓰기다. 정말 투입분의 산출량이라는 것에 있어서 이렇게 채산성이 안 맞는 일이라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타인의 눈에 좋게 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을 뿐더러 나이를 먹을수록 언어의 조탁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생활속에서 쓰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 차에 문자로 남겨야 할 말글의 핍절함 앞에서는 뭐라고 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회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 조차 희박하기 그지없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필생을 들여서 할만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하루에 한 두번 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는
믿지 않겠지만 연애시도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지사. 성직자라도 그럴진대 사지 멀쩡한 사내가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이 일은 전술한 글쓰기에 비하면 정말 허공에 발길질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허망한 짓거리가 있나 싶을 정도다. 내가 불타는 마음을 가지면 뭘 하나. 상대가 차가운 마음을 가지면 그만인 걸. 내가 정열에 가득하면 뭐하나, 상대가 경멸에 가득하면 그만인걸. 사람 상대하는 장사가 가장 어려운 일일진대. 그 중에 마음장사가 가장 힘든 법이다. 열심히 해 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만한 대가가 꼭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증명한다.

노력하면 성공하고 노력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혹자들은 말한다만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써 내려간 역사서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얻은 것을 중시하고 기억한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얻지 못한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럴리 없다. 우리가 갖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피와 눈물과 땀을 뿌려가면서 일에 매진했건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경험을 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미련때문이다.
어쩌면 오기고, 갈고 닦으면 도가 트일것이라 믿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허망한 전승 때문이고
나는 할 수 있으리라 믿는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이다.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전술한 저런 것이 삶의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자기최면일 지언정 저것이없다면 아무것도 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암시를 거는 것이다. 그러다가 수백수천가지 시도 중 하나가 걸려서 내가 만족할수 있는 현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그것이 요행이랴?
아니다. 그게 노력인 것이다. 요행의 인생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뤄지지 않은 수많은 목표들에 노력을 기울여 왔으니까.
함부로 삶에 요행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어차피 인생은 확률의 변동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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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일하게
고등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저녁에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다.

멀리 나가기 싫어서 근처 삼계탕집에서 보았다.
불원천리 마다 않고 달려와서 봉투 하나를 건넨다. 청첩장.
남은 한 번 갔다가 다시 끝내고 그 과정을 잊을 때 쯤 되어서 장가를 가는구나.

"좋으냐."

"아니."

"뭔 소리냐. 아가씨 보면 좋지 않으냐."

"좋기야 하지. 하지만 예전같지는 않다."

"그러냐."

"우린 나이를 먹었잖아."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자식이 있으니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가정의 평범한 일상의 바퀴를 굴리고 그렇게 조금씩 나이를 먹는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

뭐하는지를 묻는다.
이래저래 갈 길을 잡는 중이라고 했다. 기실, 나는 수많은 장애물과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한 치 앞을 안 보여주는 미래라는 놈을 없애고 싶은 마음 간절하건만, 그 녀석은 나를 보는 눈이 또 다르다.

"난 말이야. 때가 되면 말이지. 아무도 없는 섬에 내려가서 펜션을 하고 싶다. 정말이야.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펜션을 하고 싶어. 가끔 들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싶어. 그냥 바다를 보고 싶다. 아는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한 잔 반주에 말문을 연다. 자를 사람이 없는 회사에 다니는 녀석이 얼마나 사람에게 치였으면 저런 말을 하는 가 싶다. 나도 한 때 몸 담았던 곳이다. 그 녀석이 받는 돈은 부럽지만 그 삶은 추억하고 싶지도 않은 곳이다. 힘들것이다. 힘들거야. 장가갈 생각을 하니 더 암담하겠지. 앞으로도 십몇년을 그 곳에 시간을 묻어야 할 테니까.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이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을 걱정하고, 장가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인생은 감동을 뺏아간다. 우리는 더이상 청춘이 아님을 실감한다.

"일단 장가가면 애부터 낳아라."

"필요하냐?"

"내 경험으로는 필요하더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그 녀석은 결혼식날 보자며 총총히 개찰구로 사라지고, 나는 다시 젖은 지하철 계단을 올라와 집까지 터덜거리며 돌아갔다. 내가 편한 것인가 그 녀석이 행복한 것인가. 둘 다 아니겠지.
그래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유일하게 
직장에서 서로 우울하게 보냈던 청춘의 기억을 나눈 사내인데.

아무쪼록 순탄한 미래가 두 사람 앞에 열리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결혼 축하한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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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여 오라

작은 방 한담 2011. 5. 20. 02:29
세월의 지남과
사람의 끌림에 의해
남이 갖다주는 거 원하지 않으니

봄이여
내 봄이여

어서 오너라
어서어서 머리풀고 미친 년처럼 오거라

남들이 다 받아주지 않아도
나는 내 봄이니 가없이 맞아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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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서 커피수업을 듣고 있다.
나름대로 유명한 분 밑에서 수업을 듣는 중이다. 상당히 자유분방하게 가르치는 분인데 어디 얽매이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특화된 커리큘럼보다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훨씬 좋긴 하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지만,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교수법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면모와 유대가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괜찮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양반은 너무 인간적이다.

"사람들은 이상한 게 있어요."

가끔 하는 말이다.

"커피  잘내리거나 유명한 사람들 있잖아요. 사람들은 뭔가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죠. 그 사람이 완성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다고 생각해요. 숭배를 하죠. 어떤 분야에서 완성이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완성된다고들 생각하나봐요. 아니예요. 커피바닥에도 유명한 사기꾼들 많아요. 장인의 경지에 올라도 성질 더러운 사람 많아요. 저도 성격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죠."

배우라는 커피에 관한 이야기는 귀에 잘 안 들어오고 저런 이야기만 귀에 들어온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화가던, 가수던, 소설가던, 건축가던.
어떤 분야에서 일반의 격을 넘어선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들의 가진 기예의 극(極)에 도달한 결과물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이지
그 사람에 의한 감동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데 우리는 가끔 그 결과물을 그 사람의 전인격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갖곤 한다. 동양적인 사상일까?
내가 가끔 쓰는 말중에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고 글과 사람이 같은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글 잘 쓰는 놈중에도 인간성 개차반인 놈들 많지않은가.
노래 잘 불러도 엉망인 인간들 많고, 연주자 중에 미친 놈  많고, 요리 잘하는 놈들도 개잡종인 놈들 많다.
 
도덕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은 지루하고 소득없는 수련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특별하게 시간을 들이고
자신이 생각해야만 사람이 야수에서 인간으로 정화되는 것이지. 하루종일 음표보고 도마 위에서 칼썬다고
어느 순간 완성된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혹은 어느 날 자고자만하며 살다가 크게 한 대 맞은 뒤에
스스로에 대하여  준열한 반성을 갖게 되는 인생이 되던가. 

바꿔 말하면
사람들에게 보일 실력만 충분하면 내가 인격적으로 모자란 놈이라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소리가 된다.

이게 무서운 일인가아니면 흥겨운 일인가? 
우리는 모두 모자란 위인들이니 위안이 될 법한 소리겠지만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라는 자문을 했을 때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갈팡질팡 하게 된다.

에전같았으면 사람답게 살자 했겠지만 살면 살수록 인생의 꽃밭은 줄어들고 돌밭만 늘어나지 않는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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