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해당되는 글 131건

  1. 2008.12.04 떳떳한 사람 누구 있으랴 4
  2. 2008.12.02 잡설2 12/2 2
  3. 2008.12.01 headache 4
  4. 2008.11.30 re-interior
  5. 2008.11.28 내가 글을 몰랐다면 5
  6. 2008.11.23 와각지쟁(蝸角之爭) 6
  7. 2008.11.22 컨닝에 관한 기억 2
  8. 2008.11.19 LIE
  9. 2008.11.19 꼼지락꼼지락 4
  10. 2008.11.17 아침 2
살면서 이리저리 [죄]라는 것을 짓는다.
종교적인 담화로써의 문제가 아닌, 말 그대로 현실상황에서의 죄.
내가 어설프게 굴었던 행동으로.
내가 무심코 내뱉었던 말로
어쩌면 내가 아무 느낌없이 노려본 시선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받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괴로와하거나 화를 냈을테지

다 [죄]아니랴.

사람은 원래 가냘프고 여리고 깨지기 쉬운 존재들일 뿐인데
누구는 허세를 부리고, 누구는 응석을 부릴 뿐.

어쩌면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고
타인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누가 떳떳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떳떳하지 못하다.

빠삐옹의 앙리 샤리에르는 꿈에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세상을 경홀히 보며 시간을 허비한 죄]

13번째 전사에서 이븐 파할란은 이렇게 기도한다
[ 생각해야 했으되 생각하지 않은 모든 것,
  말해야 했으되 말하지 않은 모든 것.
  행해야 했으되 행하지 않은 모든것을 용서하소서]

깡패만 세상의 밝은 빛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나는 밝은 곳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르지. 원래 천성이 그러했으니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굴 원망하고 탓하랴. 세상은 어차피 시궁창에 가깝고 인간은 선(善)보다는 한없는 악(惡)에 더 가깝게 물들기 쉬운 존재다.
타는 불꽃을 향해 눈이 멀어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읽으면서 괴로운 글이고 쓰면서도 괴로운 글이다.
타인에게 이런 글을 보여주는 것 역시 죄가 아닐까 싶다.

누가 하늘 아래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까보냐마는

참으로 괴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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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2 12/2

투덜투덜 2008. 12. 2. 15:28
1. 광고주가 게스트로 끼어들어가는 2008년 OOO 사랑의 송년 바자회에 물건을 대 주고 설치를 하고 왔다.
   행사 참여부스를 보니 상당한 규모였다. 먹는 것부터 전자기기, 화장품까지 꽤나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행사를 해 주는 곳은 국가기관이었고
   그 국가기관은 일반인들의 주택가나 쇼핑센터나 지하철 역이나 사거리같은 인구밀집지역이 아닌
   기관들이 밀집된 곳에서도 한적한 곳에 떨어진 말 그대로 [독립형 기관]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 바자회라는 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기업이나 가정에서 쓰던 물건이나 중고를 가져다가 싼 값에 
   팔고 수익금을 가져다가 누굴 돕는다던가 재활용에 취지를 둔다던가 그런 거 아닌가?

   내 삐딱한 소견으로는
   그 국가기관의 공무원들이 정가보다 싼 값으로 새 물건을 구매하는 기회를 갖는 것 외에는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일반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민원인이 미쳤다고 거기까지 가서 물건을 사 오랴?

  그냥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헛웃음만 났다.

  요즘은 그냥 아이들도 속지 않는 허언(虛言)을 액자에 담아두고 진짜라고 말을 하면
  그걸 진짜라고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나이먹은 양복쟁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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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ache

작은 방 한담 2008. 12. 1. 11:25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섞어 마시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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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terior

작은 방 한담 2008. 11. 30. 00:03
필요한 것들을 내 보내고 정든 것들을 보내버리는 과정.

무언가 익숙치 않은 것들로 다시 내 안의 것들을 채우는 과정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허하겠지.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늘 그렇지만...바뀌면 바뀌는 대로 익숙해진다.

전에 공간을 채웠던 것들이 모두 나간 뒤면
여백이 남을거다.

여백 안에 다시 뭘 채울까
아니면 그냥 비워둘까.

알지 못할 일이다.

살다보면 분명 나는 공허한 부분을 다른 것으로 메꾸려고 할것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그냥 허해보여서 비슷할 걸로 찾아 메꾸는 짓]따위가 되어선 안되겠지.

진짜 내가 필요하고, 전과는 다른 환경을 만들수 있는 요소를 집에 들여놓을 것이다.
그것도 나와 같이 변화하고 나도 그것과 같이 변화해서
어느날 문득 눈을 떠 보니 예전부터 내 몸에 붙어있었다고 느낄 만한 걸 찾아내야지.

더 좋아질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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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뭘 쓰거나 그린다.
남들처럼 술을 잘 먹지도못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풀지도 않는다.
술을 먹으면 심화만 쌓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생각이 증폭되어버린다.

언젠가부터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 재학중에는 4년 내내 일기를 썼다.
(지금 보니까 여자들 이야기밖에 없더라. 하기야 그 때 뭐 다른 생각 있었겠나.)

언젠가부터 혼자 책상에 처박혀서 글을 쓰고 있는거다. 인터넷으로 쓰던가 다른 매체를 동원해서 쓰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혼자 만화를 그리거나 이런 식이다.

글을 몰랐다면 뭘 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대한민국에서 글을 모른다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니까. 하지만 다른 남미 어느 부족같은 곳에서라면 뭘 하고 있었을까?
아무도 없는 밀림에 들어가서 나무가지나 부러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글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반의 반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빈 곳에 기호화시켜서 옮길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수 있지 않은가. 문자가 없었다면 인간의 사고는 퇴보했을게다.
기호를 시각화해서 그것에 일정한 사유의 대표성을 부여하여 기호의 조합으로 하여금 일정패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누리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거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것이 과연 기호가 내포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글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한다.
사랑합니다.
뭘?
내가 지금 사랑한다고 한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감정이라는것은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안에 섞여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과 기복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사랑한다는 말이 계량화된다면 100%  [사랑한다]는 말에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10%도 안되는 감정이 있지만 그것을 [사랑한다]는 말로 쓸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알래스카 에스키모가 100개가 넘는 [눈(雪)]에 대한 호칭이 있다지만 분명 100개만으로는 존재를 규정짓기 힘든 눈이 존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은 인간의 가진 정신상태를 100%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역할도 할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들을 쓴다는 과정은 그러한 의미의 오차과정을 축소시키고지속적으로 개인의 감성을 확장시키고 단련시켜서 그때그때 시의적절한 말을 찾아내어 필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타자에게 오해없이 이해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필자의 감정을 타인에게 옮길 정도의 능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완성이며 나중에 궁극적으로 발전하면 내가 쓴 글을 읽고 타인에게서 내가 느낌 감정 이상의 고양을 일으켜서 행동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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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질없는 짓거리임 아니랴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당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혼자서 감내하지만 어떤 경우는 혼자가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여의치 않다면 다시 걸음은 제자리도 돌아가는게다.
인간은 칠정육욕을 스스로가 조절할 수 없는 불완(不完)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에 동승하고 편승해주기만을 바란다. 특히나 그가 힘들고 무언가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고독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정치(政治)가 생긴다. 편을 가르고 남을 끌어들이고 급기야는 개인의 투쟁이 집단의 투쟁으로 바뀌면서 그 안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는 일이다. 그 때에는 오직 증폭된 감정과 감정에 맞게 개선된 대의명분의 힘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눈 뜨고 뒤로 물러서서 한숨을 쉬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저 중에 누가 너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고지옥에 같이 가 주겠는가? 그것은 또한 다른 일이다. 세상에 자신의 처지를 힐난하는 자라 해도 막상 종당에는 같이 지옥에 가줄 이도 있는 법이고 옆에서 기운을 북돋아준다해도 그가 나와 함께 인생을 걸거라는 희망 또한 아침이슬 같은 법이다. 사람에게서 기대를 하는 것은 초급이고 초급에서 시작하는 일은 하류의 일이 되기 십상인데 어찌하려 지나간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서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며 달팽이 뿔 위에서 논쟁하는 것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천하에 사람이 없어 십리를 가고 천리를 가도 내 몸을 의탁할 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처한 일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천리이고 순리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러한 내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인생의 종막까지라도 같이 하리다 맹세해 준다면 그것이 기연(奇緣)이고 받아들이기힘든 축복일텐데 너무나도 쉽게 세상살이에 더불어 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가볍다. 

세상 일의 팔할은 뜬 구름같아 눈을 감고 한 잠 청해보면 어느샌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는 것을 느끼는데 굳이 그것에 얽매여 개인의 세운 뜻을 뒤섞을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그것이 옳으면 그만이다. 천하에 많은 이들이 모두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평탄대로를 백발이 되도록 걸어가며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험로에 홀로 던져진 채 남들보다 힘들게 길을 걸어가는 일 뿐이다. 인생의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인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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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딱 한 번,
그것도 일생일대의 자리에서 나는 컨닝을 해 본 적이 있다.

학력고사 날이었다.
솔직히 컨닝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적도 없고, 해 볼 생각도 없었고 그 뒤에도 컨닝은 해 본 역사가 없다. 대학교 때는 내가 쓰는 답이 정답이고 교수가 틀렸다고 믿는 [왕재수]가 나였기 때문에......아, 이야기는 이게아니고 내가 왜 컨닝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돌아가보자.

그 때가 3교시였나 하여간 제2외국어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내 제2외국어는....흐흠, 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불어였다. 지금은 꼬망딸레부 트레비엥 정도밖에 못 하지만 그 때는 상당히 열심히 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막히는 것 없이 술술 문제를 다 풀고 주관식 5개를 쓰기만 하면 되었는데

3번 문제가 아리까리 한 것이었다. 악상떼기가 붙는지 그라브가 붙는지 뭐 이런것부터 시작해서 뭐가 뭐더라 한참 고민을 하다가 문제를 일단 적어두고 다른 답을 맞춰보고 있었는데
내 앞에 앉은 여학생이 갑자기 기지개를 켜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팔을 슬쩍 어깨위로 올린 순간
나는 그 여학생이 쓴 불어 주관식 답안지의 3번문제를 보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3번 문제에 진짜 대빵만하게 적어놓은 그 아가씨의 답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아가씨 답이 정답이었다.

악상떼기고 그라브고가 아니었다. 내가 쓴 답이 전적으로 틀리고 그 답이 전적으로 맞는다는 확신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저 답이 맞다.
100% 맞는 답이다.

한 5분 정도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쨌건 컨닝을 했는데 그 답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근데 저걸 내가 쓴 답으로 써야 하나?

눈 질끈 감고 현실과 타협했다. 아가씨 미안하우. 우리 나중에 합격하면 내 밥이나 사주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난 붙고 그 아가씨는 떨어졌다.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보여서 쓴 것이긴 하다만
내가 맞춘 문제 하나 때문에 그 여자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지금도 마음이 가끔 뒤숭숭하다.

이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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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

수련장 2008. 11. 19. 17:20
무언가 진실을 말하면 어그러질 것 같은 상황이 존재한다
시간을 더 벌면 해결이 가능하고 한술 더 떠 거짓말을 하면 내게 이익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공공선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인가?

진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쓰디쓰고 결과가 안 좋고
한 번의 거짓으로 그 결과를 영원히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연히 볼 필요도 없이 거짓말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두 가지의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생각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악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 상황판단을 즉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또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거짓을 선택한다. 굼뜨기보다는 [진실말을 말한다]라는 것이 체화된 유형이다.
누굴 좋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이 적재적소에 있지 못하면 낭패를 볼 뿐.

솔직히 거짓이라는 것이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는 세상.
어찌보면 세상을 제3자의 눈으로 보느냐 내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참이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은
내가 내 눈으로 봤을 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 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진실이 냉혹하다는 것은 그냥 세상이 흘러가도록 봐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참도 거짓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종교인들은 Credo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일임하고 거기에 도덕율을 맞춘다.
일반인들은 자연법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일임하거나 자신의 철학에 도덕율을 맞춘다.
만약 두 집단 사이에서 참과 거짓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상대방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도덕율을 포기하고 거짓말을 선으로 포장해서 할 수 있는가?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고 다 그러하다.
파고들어가면 곤란해져버릴 일이지만 늘 무언가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고.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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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운운 어쩌고 하더니 정말로
출근도 안 하고 집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어저께 오후부터 배가 살살 아파서 집에 일찍 들어왔는데
그나마 바깥보다 집이 좋다는 걸 몸이 알아챘는지 그냥 퍼저버리려고 마음먹었나보다.

내 생리적인 현상이야 내가 제일 잘 안다.
난 그냥 풀어두면 녹아버리는 스타일이라
늘 고삐잡듯이 몸을 끌고 다녀야 안 아픈 사람인데
정작 마음은 놀며지화자를 외치고 있으니  그것도 쉽지 않아.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사서 집에서 읽고 있는 중이다.
혼자 세상과 단절된 채 글을 쓰다가 미쳐버리는 작가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일고 있으니 겁이 덜컥 나서 누군가를 만나서 놀아야한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

나이를 먹으니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뭔가 기대심리가 작용하는 모양이다. 순수의 시대는 끝난 걸까? 순수함에 기대치가 더해지면 세상물을 먹었다고 이야기들 한다. 그냥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지만 그건 참으로 요원하고 불가함을 소망하는 신기루 앞의 여행자가 되는 기분이다.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고 좋은 인연이 올 거이라고 주위에서도 이야기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하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가다가다 안 되어 포기하고 그냥 주저 앉은 곳을 내 스스로 자조하고 자족하며 [이것이 내 소산이고 내 좋은 날이고 좋은 인연이로세]하며 살아가게 되지는 않으려나?

앞날에 대한 미래의 희망감과 불안감이 반반인 나이는 지난 모양이다.
확실히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두려움이 커진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지킬 것도 별로 많지 않은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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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작은 방 한담 2008. 11. 17. 09:54

1. 머리가 아프길래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 이거 아무래도 감기같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흑
   (근데 왜 아픈것도 생각을 해 봐야되지?)

2. 난 늘 계쩔이 바뀔 때마다 고민을 한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어차피 내 장롱에 들어있는 옷의 색깔은 모두 단일하기 때문에
   뭘 입던 똑같지만 나름대로 고민은 한다.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긴 시간을 고민할 것이다.
  
  결국 오늘 입고 나가기로 한 건 검정 폴라티에 검정조끼 그리고 검정 노스페이스 패딩잠바.
  바지는 검정 바지를 빨았으니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나가야겠다.
  더 추워지면 검정 쿠드로이바지를 입어야지...우리 땐 골덴바지라고 부르지 않았나?

3. 우리 집 소라게가 2년이 넘은 채 3년 가까이 홀로 생존을 하고 있다.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르는 행운목과 함께 존재하는
   우리 집에 사는 인간 외 2개 생명체 중 하나.

  절대 죽지 않는 녀석이다.  인간도 견디기 힘든 우리 집의 0% 통풍환기 구조에서 다른 소라게들이 다 죽어갈 때도 
  나무껍질을 벗겨먹으면서도 살아남은 녀석이다.
 
아예 이름을 바꿔서 부른다.
이제 이 녀석의 이름은 [가츠]다. 베르세르크의 원작 주인공도 이 놈만 못할 듯.

오늘 아침도 이 놈을 보면서 난 불굴의 생존의지를 느낀다.
그래, 오늘도 나가서 생존하러 가야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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