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뭘 쓰거나 그린다.
남들처럼 술을 잘 먹지도못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풀지도 않는다.
술을 먹으면 심화만 쌓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생각이 증폭되어버린다.

언젠가부터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 재학중에는 4년 내내 일기를 썼다.
(지금 보니까 여자들 이야기밖에 없더라. 하기야 그 때 뭐 다른 생각 있었겠나.)

언젠가부터 혼자 책상에 처박혀서 글을 쓰고 있는거다. 인터넷으로 쓰던가 다른 매체를 동원해서 쓰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혼자 만화를 그리거나 이런 식이다.

글을 몰랐다면 뭘 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대한민국에서 글을 모른다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니까. 하지만 다른 남미 어느 부족같은 곳에서라면 뭘 하고 있었을까?
아무도 없는 밀림에 들어가서 나무가지나 부러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글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반의 반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빈 곳에 기호화시켜서 옮길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수 있지 않은가. 문자가 없었다면 인간의 사고는 퇴보했을게다.
기호를 시각화해서 그것에 일정한 사유의 대표성을 부여하여 기호의 조합으로 하여금 일정패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누리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거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것이 과연 기호가 내포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글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한다.
사랑합니다.
뭘?
내가 지금 사랑한다고 한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감정이라는것은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안에 섞여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과 기복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사랑한다는 말이 계량화된다면 100%  [사랑한다]는 말에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10%도 안되는 감정이 있지만 그것을 [사랑한다]는 말로 쓸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알래스카 에스키모가 100개가 넘는 [눈(雪)]에 대한 호칭이 있다지만 분명 100개만으로는 존재를 규정짓기 힘든 눈이 존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은 인간의 가진 정신상태를 100%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역할도 할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들을 쓴다는 과정은 그러한 의미의 오차과정을 축소시키고지속적으로 개인의 감성을 확장시키고 단련시켜서 그때그때 시의적절한 말을 찾아내어 필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타자에게 오해없이 이해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필자의 감정을 타인에게 옮길 정도의 능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완성이며 나중에 궁극적으로 발전하면 내가 쓴 글을 읽고 타인에게서 내가 느낌 감정 이상의 고양을 일으켜서 행동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Posted by 荊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