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의 삶에 은원이란 깃털과 같지만 또한 천금과 같으니 이를 뭐라 한단 말이냐.
오랫만에 무협영화중에 딱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영화를 봤구나.


"사람이 사는 곳이 은원이 있고, 은원이 있는 곳이 강호인데 사람이 있는 곳이 강호이거늘
어찌 벗어날수 있단 말인가."

인재강호(人在江湖)라, [동방불패]의 이 명대사는 사람의 인생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2.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잊을 수 없을만큼 한이 사무치는 일이나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떠나서 생각하고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해탈하기 전까지는 어려우리라.

해탈을 염두해 두지 않는다면 오히려 일심으로 보수(報讐)에 진력함이 낫지 않으리.


3, 
사람도 찾기 힘들고 의리도 강호에 사라졌으되
미인(美人)은 예진작에 씨가 말랐구나.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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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투덜투덜 2011. 3. 27. 23:58
언젠가부터 인터넷에 무언가 말을 쓰는 란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내 말만 적어놓고 나오는 경우가 태반인 것 같다.

사실 의도적으로 그러는 부분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뭐라고 한 마디씩 써 놓는 것에
일일이 토를 달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나 자신의 생애 대한 이야기 하나씩은 책으로 낼 법한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말 들을 이유도 없지 않겠냐는 생각인 듯 하다.

소통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냥 고독한 듯.
사람들은 모두 같이 어울려 살면서 고독한 듯 한데
어차피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한 두 줄의 말에 의해
일희일비하고 싶지도 않고 찰나의 위안을 받고 싶지도 않기 때문인가보다.

어영부영 이렇게 시간은 또 지나가고
아뿔사
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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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시간에 정말 짧게 할애되어 있던 이슬람문명의 특색, 그 중에서도 유명저서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이븐 바투타]여행기라는 것이다. 이 양반은 탕헤르(탠지어)출신의 이슬람 율법학사로 
요즘식으로 쓰자면 [공무원 신분으로 세계일주]를 하신 양반이다.
북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아라비아왕조를 거쳐 인도 (여기서 벼슬까지 했다..능력자) - 중국을 거친 뒤
다시 집으로 왔다가 스페인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집으로 왔다가 사하라 사막을 남행하여 (뭐야 이 사람) 중앙 아프리카까지 돌아보고 온
요즘 세상이라도 하기 힘든 세계탐방을 30년간 한 사람이다. 그냥 교과서에서 지나가는 식으로 본 인물치고는
너무나도 광범위하지 않은가.

하여간 그렇게 돌아다니니 술탄이 그동안 보고 들은 거 다 적어보라고 해서 글을 쓰고, 그걸 시인이 다시 짧게 각색해서 내 놓은 책이 이 여행기이다. 당시의 이슬람 문화와 지명과 관직, 경제와 도시발전까지 이르는 중세 근동의 이야기를 굉장히 소상하게 써 놓았다. 아직 첫 원행의 처음부분을 읽고 있는 상태다.
정통 무슬림들의 이름이 너무 헛갈려서 진도를 빼지 못하는 것도 있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는 애들 장난이더라.

하여간 이 책을 나름대로 거금을 투자해서 읽고 있는데...서문에 이슬람 음차의 고유발음과 지명을 살리려고 애썼다는 역자의 설명이 장황하게 써 있고, 이슬람문자 간단히 읽는 법까지 써 있었다.
상당한 노고와 공이 들어간 책이구나 하고 역자 이름을 봤다. 정수일 교수.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정수일이라고 하면 잘 모른다.

[무하마드 깐수]라고 하면 알아도.

-2-
정수일. 무하마드 깐수
중국출생의 한국인.
북한과 남한 두 군데에서 대학교수를 역임한 사나이.
중동과 동남아에서 10년 넘게 교수직을 하면서 살아 온 학자.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 놓을 수 있는 중동연구가. 아랍통, 문명연구학자.
그리고 [간첩]으로 알려져 사형언도까지 받은 사내.

이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옥중에서 번역한 글이다.
5년이란 세월동안 그는 모국어로 아랍의 고전을 번역했다.
혹자는 그랬다. 이 분이 사형언도를 받고도 계속 감형이 되어서 복권이 된 이유는
북한과 10년 넘게 통신을 했지만 별반 중요한 정보를 준 것이 없는 것도 그렇고
더 큰 건 이 사람은 사형시키면 안되는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더 커서였다고.

아랍어를 포함해서 12개국어를 소화하고, 감옥 안에서 왕오천축국전과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초역해 내는 
경이로운 천재를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듯 하다. 어쩌면 남한 정부는 '분단된 조국을 위해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든 생각'이 간첩활동이었다는 정수일교수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분의 사상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직접 배워본 적도 없고 인연도 없으니.

하지만 나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을 믿는 편이다.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고대 아랍인들의 관용어구 하나하나를 다 번역해 놓은 그의 역저를 보면서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자 재사로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2003년 사면복권되셨고, 지금은 문화연구교류센터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아무나 사서 봐도 된다. 안 잡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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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줄을 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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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wan (2010)

見.聽,感 2011. 3. 21. 11:37


먼저, 난 이 영화를 절대 몰입해서 보지 못했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영화의 내용이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복도 건너편 줄에 앉아있던 여인네가 극장 안에서 쉴새없이
핸드폰을 깜박거리면서 문자질을 하는 통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저주있을 지어다 너, 정신빠진 여자여!
하여간 그 덕에 난 정서적 교감이 일절 차단된 상태에서 영화를 관조적으로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기본 틀은 언뜻 보면 [욕망과 파멸]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희구, 없는 것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 야망의 완성을 위한 희생 정도랄까.

하지만 멍하니 보고 있자니 영화의 주제가 전혀 다른 것이 되더라.
[각성과 회복과 성취]일 수도 있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관객의 기본적인 틀을 어디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하고 가냘픈 소녀로써 촛점을 맞춰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순진무구하고 가냘픈 소녀로 키워지도록 종용받은 마녀로 봐야 할 것인가.

나는 극 초반부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그 망할 휴대폰녀가 계속 깔짝대는 덕에 나탈리 포트만과 휴대폰녀를
거의 1:1의 비율로 장면전환하며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탈리 포트만이 여리여리하게 나오더라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극 초반 주인공에 동화되지 않은 탓인가? 그래서 그런지 백조에서 흑조의 연기를 원하면서 오디션을 보는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딱 그거였다.

[포텐셜이 터지지 않은 색녀]

뱅상카셀의 느글느글한 연기도 연기지만, 자꾸 장면들을 보면서 발레영화가 아닌 쥐스트 자킨의 [O양의 이야기]가 떠오르더란 말이다. SM조교스러운 면이 이리저리 보이는데 그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딱 하나.

"아, 저 아이 몸 속에 숨은 불꽃이 터지겠구나.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 천골천음지체란 말이지!"
 
그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영화가 경황없이 휘몰아치면서 막판까지 사람을 쫙쫙 쪼면서 달려간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나를 막는 것들을 없애야 하는 거 아니랴.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데, 나중에 절명의 카타르시스까지 가면서 엔딩이 내려올 때, 개인적으로 나는 깨달았다.

저 마지막 표정은 딱 그거로구나. 오호라 통했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남자가 여자랑 잔 다음에 머리가 명경지수처럼 냉정해지면서 담배무는 딱 그 느낌이로구나. 드디어 저 아이는 마지막에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거다. 라는, 지극히 형이하학적이면서도 관념적인 느낌이 들었다. 망할놈의 핸드폰녀, 너에게 감사하야 할까? 

뭐랄까, 아르노프스키 감독이 들으면 굉장히 화 내겠지만 고급에로에로영화를 하나 보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p.s)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아무래도 마법사 로드발트와 나탈리 포트만의 엄마가 자꾸 겹쳐져서 그런 것 같더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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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C. 클라크는 이미 SF계에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양반의 책을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나름대로 SF를 좋아한답시고 깝죽대놓고
정작 아시모프와 클라크의 저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양반의 책들이 이젠 책방에서 구하기 힘든 것도 그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어디서 모아야하나... 하여간 거장들의 SF를 다루는 시각은 결국 궁국의 시점에 가면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
수학의 궁극이 신학으로 이어지듯 SF의 사변적인 서술을 결국 우주의 생성과 그 가운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 혹은
신(神)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게 신인지. 다른 행성의 고등문명인지. 혹은 드래곤볼을 7개 모아주면 나오는 용인지 나메크인인지는 각 작가의 스토리텔링의 기법이지만 하여간 그렇게 귀결되는 듯 하다.

일전에도 인용했지만 어슐러 르 귄 여사는 SF작가, 혹은 저술가들은 문명사회에서 어떤 예언가나 천리안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는 그냥 헛소리담는 이야기꾼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에 대한 탐구와 지식의 축적은 작가들로 하여금 일정수준 이상의 견해를 갖게 한다고 본다. 르 귄 여사도 그냥 자기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고 겸손을 부렸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기존 문명사회가 작가들에게 갖는 경외감이라는 것이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닌 듯 하다.
특히나 이 책이 1953년에 나왔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뭔가 고리타분하고 현대에 와서는 맞지 않는 설정도 있지만서도 그 독창성이나 인간의 진보과정에 대한 성찰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역학은 나름대로 논리정연하다. 인간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우리 말고 다른 종족이 외계에서 온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나가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

이 책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중간선상에서, 절대자의 복종과 자유의지의 중간선상에서, 개인과 집단의 중간선상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뭔가 뜬금없이 이어지는 미국식 드라마 전개나 속도감이 맥을 놓게 만들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SF가 아닌 존재에 대한 함의를 가득 담은 채 끝나게 된다.
 이쯤되면 굳이 장르를 논할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명작들은 결국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필체와 어조로 탐구해 들어가는 과정을 갖게 되는 법이니까.

지금와서 말이지만, 
이 소설 일찍 읽은 양반들이 꽤나 많은 만화와 영화에서 오마쥬를 했구나 싶더라.

문체가 아니라
작가의 끊없는 사유와 탐구 속에서 빚어진 결과물을 부러워할 수 밖에 없는 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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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3 소사

작은 방 한담 2011. 3. 13. 23:19
1.
손톱깎이가 사라졌다.
애들이 물고갔나 싶어서 고양이들을 졸졸 따라다녀봤는데 전혀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것 아닌가.

하긴, 어릴때도 뭐 잘 잊어먹긴 했으니.


2.
요즘 고등학생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난 저 아이시절에 뭔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 사는 건 나나 얘들이나 별반 다를 바 없구나 싶으면서도
가끔은 전혀 다른 것들, 내가 그 때는 등한시하거나 접하지 못한 것들을 접하면서 사는 걸 보면
확실히 세상이 달라졌구나 싶다.

모사립고에 다니는 녀석은 클럽활동은 5개나 한다고 하는데
그 중에 국궁(國弓)을 배우는 시간도 있다더라. -0- 무지 부러웠다.
어떤 녀석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오아시스라고 하는 노땅(?)도 있고 (그런데 특활부는 Debate...토론부란다)

난 그 시절에 뭘 했더라.

내 고등학교 시절 CA는 뭐였나 생각해본다.
1학년때는 [희랍비극강독부]라는 괴상한 부서에 들어가서 일년 내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만 읽었던 기억.
2학년부터는 [불어회화부]라는 명목 아래 샹송 틀어놓고 한시간 내내 자던 기억 외에는 없다.

우리 때보다 훨씬 컨텐츠도 풍부해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더라.
좋아지는 걸까?
애들에게 조금만 더 여유를 준다면 참 바람직한 것 같은데.

여유, 한국인들에게는 천성적으로 부족한 것일지도.

3.

그렇게 오랫동안 읽는 걸 미뤄왔던 어슐러 르 귄 여사의 [어둠의 왼손]을 
오늘 하루만에 다 읽었다.
SF라고 하지만, 뭐랄까 내가 제목에서 유추했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인식과 실체, 공감과 비공감에 대한 연구를 가상공간을 통해 구현한 상황극이랄까.

어슐러 르 귄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SF를 가장한 의미론의 설파자라는 생각이 든다.
호칭과 사물과 언어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제가 빠지지 않는다. 이 사람의 소설을 읽다보면
나는 늘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난다. 확실히 공감하는 바가 있다. 
언어가 갖는 [사물에 대한 호칭]이라는 능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것은
주술적인 의미가 다분히 있어왔고, 의미론적인 측면에서도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을 넘어서는 심도가 
있다고 믿는다. 성경의 창세기 처음이 하나님이 말로 천지를 하셨다는 것은 비존재에 재한 존재성 부여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상징적이다. 하여간 요즘은 이런 고민들을 종종 하곤 한다.


4.
한 주간 체해서 죽을 뻔 했다. 
이제 맛난 것보다 소화가 잘 되는 걸 찾아다닐 때가 되었나보다
어이구 내팔자야


5.
일본인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난 솔직히 역사적인 가해자, 침묵의 방조자, 진실의 은폐자로써의 일본정부와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굉장히 혐오하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감정이 없다. 
[소년H]를 읽고 나서는 더 심해진 것 같다.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던간에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일반국민들은 정보취득에 무능하고 통제당한다.
이번에도 잘먹고 잘 살고 나라의 방향을 만드는 놈들은 죽은 놈 하나 없을 것이다.
그저 농사짓고 고기잡고 장사하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천재지변에 휩쓸려 희생당한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 청산을 원하지만, 그릇된 유산을 방패삼아 호가호위하지 않는 한
나는 연좌제를 반대한다. 

분명 그릇된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세우는 이들도 있을테지만...
원자로 노심도 녹고, 마을 하나가 다 휩쓸려 나가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지금 과거사를 반성하라고 다그치는 건 축생지심일 것 같다. 

그냥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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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누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즐겁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일이 구체화 된 서술의 형태가 되어서 시각적 묘사와 심리적 묘사가 들어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지 못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짐이 되고 있었다.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글쟁이로 사는 건 힘들것이라는 단념이 맘 속 깊은 속에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세상에 글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찬사와 비평이 같이 들어온다. 둘 다 마음에 짐이 된다. 어떻게 써야 한다. 이렇게 써야한다 라는 나름대로의 강박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강박관념이 생기면 걱정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면 일을 멀리하게 되고 일이 멀어지면 관심이 사라진다. 그렇게 일은 시들해지는 것이다.

오늘 우연하게 J.D 샐린저가 한 말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쓰는 이유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은둔해서 뭔가를 썼다. 작품을 발표할 성 싶더니 2010년 정월에 죽어버렸다. 뭘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뭔가 쓰고 있었다. 그는 즐거웠을 것이다. 머릿속에 까맣게 잊어버리고있던 공간에 다시 불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내가 좋아서 쓰는 거 아니었던가.

어슐러 르 귄 여사는 [어둠의 왼손]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더라.
"자기 안에 있는 신이 자기의 혀와 손을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는 것은 뭐란 말인가?"

그렇다.
모든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때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것들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빼앗기지 마라.

짐을 지우는 일은 굳이 찾지 않아도 세상에는 흔하니 네가 좋아하는 일을 [일]로 만들지 말라.

아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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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부 교사를 맡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진실이다. 아니 왜? 난 교사하면 안돼? 
그래, 안된다. 하지만 하고 있다.


사실 교회의 교육이라는 것은 성경과 교리공부지만
고등학생정도 되면 선생말 안 듣는다. 학교나 교회나 다를 바가 무어랴.
그리고 시간 많이 잡을 수도 없다. 아이들 학원 가야지 자기들 인생에 매달려야지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래봤자 15분정도다. 무슨 말을 하랴.
가뜩이나 기독교가 사회적 평판도 안 좋은데 잘 나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고등학교가 끝나고 대학부로 올라가거나 교회 청년부에 가면
교리공부는 끝. 그때부터는 정말 자기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신앙과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대학에서 많은 이들이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당연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민없는 신앙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그 곳에서 교회를 떠나는 애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신의 섭리다. 내가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가장 오소독스하고 비정치적인 교리문답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중에 자기들이 판단을 할 때, 최소한 비교할 수 있는 신앙적 근거를 남겨주고 싶으니까.

그런데 오늘 좀 실수했다.

창세기2장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이야긴데...
(아이들 이런 거 이야기하면 이런 야한 이야기를 왜 하냐며 발버둥...사내놈들이)
하여간 이런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혼전순결이니 동성애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너희들이 살면서 이것저것 배울텐데, 교회를 떠나서 인생선배로 이야기하자면
 첫째, 이성교제는 한 명에 꽂혀서 죽자살자 매달리지 말고 여러 사람 만나봐라.
둘째, 사람이 이성으로 통제 못하는게 마약과 섹스와 도박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개인의 행위를
형법으로 금지하는 유일한 세가지다. 너희들이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성적으로 판단이
가능할 때만 선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해라. 지나침은 아니함만 못하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우리반 강백호처럼 생긴 건들건들 거리는 녀석이
"아, 선생님 1학년 애들에게 섹스랑 마약이 뭐에용~"

"아...?"

"엄마한테 이를거예용~"

"시끄러~"

조용하게 듣고 있던 말없는 반 아이도 한마디

"....정말 남고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아이씨...우리반은 다 사내들 밖에 없어서 한 이야긴데....)

하긴 고등학교1학년이면 중3하고 별 차이 없는 애들인데
내가 너무 앞서나갔다는 생각이 말을 마치자마자 들었다.
이래서 선생은 애들하고 눈높이 교육을 해야 하는 법인데
사실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내 잘못인가. 

...아닌데....?
난 그때 다 알고 있었는데. 
이 급변하는 세상에 내 나이 또래보다 지금 애들이 빨리 아는게 정상 아니야?
교회 다녀서 다들 착한가?
아님 이놈들 밑장빼기 중인가?

하여간 애들이 꽁시렁꽁시렁 하길래
엄마한테 말하면 주거 하면서
오늘의 성경공부를 끝냈다

-.-a 다음부터는 정말 성경만 가르쳐야겠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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