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荊軻宿'에 해당되는 글 1419건

  1. 2011.02.12 2011.2.12 소사 2
  2. 2011.02.09 다짐 8
  3. 2011.02.06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오 (They call me Trinity. 1970) 13
  4. 2011.02.03 설날 교통사고 6
  5. 2011.02.02 오랫만에 미친 지름 10
  6. 2011.02.01 좋은 사람 2
  7. 2011.01.31 내가 삐딱한 놈 같지만서도 6
  8. 2011.01.28 한국인의 민족성 4
  9. 2011.01.28 TV 옮기기 4
  10. 2011.01.28 뒤돌아보기 2

2011.2.12 소사

작은 방 한담 2011. 2. 12. 21:03
1.
벌써 2월인데 아직도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내년은 올 해 보다 더욱 추워질터인데 걱정이 태산이구나.
물가는 오르고 삶은 고달파지고, 계절은 사람은 도와주지 않는다.

사람사는 일이 원래 걱정과 고민으로 점철되어 있는 법. 죽어서야 모든 근심이 사라질터이지만
점점 팍팍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날이 풀리고 구제역때문에 죽은 소들이 썩으면 더더욱이 어떻게 될지.


2.
남을 비방하고 근거없는 말로 중상모략하면
다 그게 자기자신과 후대에 화를 미치게 되는 법이다.

누군가를 근거없이 자신이 가진 재주로 비방하던 이가
비방하던 대상이 죽은 지 6개월도 안 되어 병에 걸려
고생하다 이번에야 졸했으니

삼갈진저, 하늘이 사람의 행위를 보느니라.
개관논정. 함부로 살아갈 일이 아니다.

Posted by 荊軻
,

다짐

작은 방 한담 2011. 2. 9. 01:45
나도 굶어죽을지언정 끝까지 쓴다
Posted by 荊軻
,
(아...결국 동영상이 잘렸군. 언젠가는 잘릴 줄 알았지만)

서부극 영화중엔 안 잊혀지는 명장면이 많다.
대부분이 멋진 결투나 대결장면, 놀라운 화면의 편집등으로 이루어진 것인 반면
정말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장면도 몇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트리니티 시리즈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로 우리나라엔 알려진)의 첫번째 작품이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 주인공 트리니티가 거지꼴로 등장해서 멕시코 음식점에서 콩요리를 말 그대로 게걸스럽게 퍼 먹던 장면이다. 내가 이걸 초등학교시절 공중파로 맨 처음 본 것 같은데 어린시절에 얼마나 인상이 깊었는지 미국 콩통조림만 보면 저 장면이 늘 생각난다. 실상 따 먹으면 별 맛 없는데  주인공 테렌스 힐은 정말 구경하는 사람도 침 넘어가게 잘만 먹더란 말이다. 그래서 콩 통조림을 보면서 늘 생각해보곤 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후라이팬에 콩 통조림을 데워먹어봐야지."

그리고 오늘 점심을 그렇게 먹었다. 벼르고 벼르다 해 본 거긴 한데.
일단 그냥 콩 통조림 하나하고 
그냥 먹기 뭐하니까 냉장고에서 놀고 잇던 정체불명의 고기를 좀 잘라서 넣어주기로 했다.
아,이미 호화판으로 가는것인가? 아냐아냐. 저 고기는 더 두면 못먹어...혼자 변명을 하면서 재료를 넣었다.
(병아리콩이 찬조출연했다. 그런데 저 놈이 왜 우리집에 있는건지 모르겠네.)


잘 몰라서...그냥 같이 넣고 볶기로 했다. -.-a 
사내의 요리라는 게 다 이런거지 뭘...그리고 항간에는 통조림 요리 너무 많이 먹지 말라더라.
남성의 생식능력에 안 좋다나 어쩐다나. 내가 알게 뭐야? 어차피 쓸 데도 없는데. 그냥 한통 다 넣었다.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깡통에 들어있을 땐 무지하게 없어보였는데 프라이팬에 넣고 돌리니까 그나마 뭔가 있어 보인다. 고기도 좀 보이니까 성의도 있어보인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끈적함은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더라. 모짜렐라 치즈라도 넣은건가.



완성, 마땅한 빵이 없어서 동네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 왔다.
나도 프라이팬 째 국자로 떠 먹어보기로 했다. 음핫핫!

시식 결과는...

아, 배부르다.
도저히 혼자 못 먹는다
1/3은 버린 것 같다.
맨 처음엔 새콤달콤하고 빵이 씹히는 맛이 나는게 고기도 씹히니까 좋더라~ ^0^

그런데
1/3넘게 먹으니까 지금 내가 뭘 먹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그냥 프라이팬 설거지해야 하는데 좀 더 많이 먹어야 해 라는 생각 밖에 안 났음. 

내가 넣은 콩이 [스위트 칠리소스]기반이라 새콤달콤해서 많이 못 먹은 걸까. 다음엔 집에 있는 햄소스 콩통조림으로 해 볼까..우욱,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하다. 콩이 속에서 불어나는 것 같아.

결론: 트리니티처럼 먹다가는 배 터져 죽는다.


Posted by 荊軻
,

설날 교통사고

수련장 2011. 2. 3. 12:35
아버지 집에 들렸다가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고속터미널 사거리에서 직진을 받아 들어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옆 차선의 고속버스가 쑥 밀고 들어오더니 쾅~하는 굉음과 함께 내 차를 들이받는거 아닌가.
방어운전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옆차가 밀고들어오는데 무슨 방어운전, 재수 옴 붙었구나 싶었다.순식간에 백머리 접히고 드드득 소리가 나는데 그 짧은 창졸간의 순간에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내 차~ 뽑은 지 얼마나 됐다고 ㅠㅠ

차를 옆으로 세워놓고 고속버스 운전기사가 내릴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운전을 어떻게 하시는 거요!"

"갑자기 오른쪽에서 차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죄송합니다."

가만 보니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센 기사분이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일단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한참 연배많은 분이 그러시니 소리질러놓은게 후회가 된다.
차는 서울 - 연무대. 연무대라. 
설에 연무대를 가는 사람들은 무얼까. 어차피 거기 사는 사람들도 있겠고
...그리고 아들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

"설날인데 조심해서 가십쇼."

"예"

대충 차를 보니 내 차에 난 흠집은 별로 없고, 버스에서 붙은 도료만 좀 붙어있었다. 생각보다 내 차가 통뼈인듯 별 이상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설날 아침부터 도로에서 드잡이질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버스 보내고 집에 차를 몰고 들어왔다.

내 옆에 누군가 타고 있었으면 더했을까. 아마 체면을 봐서라도 좀 더 뭐라고 실갱이를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화 내고 싶지가 않더라. 3년만 더 젊었더라도 불같은 성정을 주체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늘 일상은, 재난은, 복과 화는 내가 대비한다 하더라도 나를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는 것도 아니다. 일희일비하며 삶을 살아가기에는 세월이 너무나도 길고 짧다는 걸 느끼는 중이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화를 안 내고 그냥 보낸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내 스스로의 화를 참지 못하고 기분을 참지 못하면 모두에게 더러운 설날이 되었을 것이다. 손님들도 성질이 났을테고 기사는 정초부터 낙담을 했을테고 나는 왜 이렇게 인생에 더러운 일만 생기냐며 자학을 하고 있었겠지.

연산군이 이런 글을 남겼더랬다.

인생여초로 회합부다시라.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인생은 풀잎의 이슬같아 만날날이 많지 않구나.
어차피 그렇게 조금씩 만나며 지나갈 일,  미련을 두어 무엇하랴.

세상의 일체가 꿈이요 바람이요 거품이요 번쩍이는 번개와 같은 것일텐데



나도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가는 모양이다.






Posted by 荊軻
,
예전에 토요명화 시즌을 장식했던 장르 중 
고대신화 블럭버스터가 있었다.
[clash of titans], [long ship],[jason and the argonauts] 같은 것들이었다.

잘 생긴 허리우드 배우들이 그리스식 투구와 무구를 입고, 튼실한 허벅지를 내놓고 데굴데굴 구르며 싸워서 많은 여심들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여성 주인공들은 커텐자락인지 옷인지 모를 얇은 거적데기 하나로 몸을 가리고 여신입네 공주네 하면서 그리스 신화를 마구난도질하던 영화들. 
사실, 허리우드 영화를 보고 그리스신화를 보게 되면 이건 완전히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 수준이 되어버리곤 하는데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런 장르의 영화를 어디서 보냔 말이다. 당시 애들 눈높이에 딱 맞았다. 이런 걸 보면 헐리우드 사람들도 그냥저냥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롱쉽]은 좀 예외적인 이야기다. 저건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니 그렇다 치고 (참고로 이 영화의 살인도구 '철마'는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타이탄 족의 멸망]과 [아르고 황금대탐험]은 지금 봐도 꽤나 아기자기한 특수촬영씬이 들어있다. 

물론 눈높이가 올라간 지금 보면 실소가 나오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특수효과 감독이었던  레이 해리하우젠이 두 영화의 효과를 맡았다. 이 양반의 주특기이자 성명절기는 바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하나하나 컷을 찍어서 활동사진으로 만들어내는 부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나온 걸작 중의 하나가 [아르고 황금대탐험 (jason and the argonauts)]

요 아랫장면이 그 영화 클라이막스 중 하나인데... 꽤나 TV에서 많이 보던 거 아닌가!

(아씨 님들아, 자손들이 제삿상 안 차려줌? 왜 나한테...)


서설이 너무길어졌다...
사실은 영화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고...
충동적으로 국전에 놀러갔다가 이 놈을 데려오고 말았다.


(웰컴 백 미스터 앤더슨...아니 해골선생)

그냥 무심코 있는지 물어봤는데 있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 데려왔다.
덕분에 내 설날은 거지신세. 이 작은 놈이 왜 이렇게 비싸...


(내가 미쳤지! 돈이 어디서 난다고 이걸 질렀나!)

그냥 밥 굶고 이번 명절은 해골바가지랑 놀아야 하는 신세.


Posted by 荊軻
,

좋은 사람

작은 방 한담 2011. 2. 1. 02:37
살면서 종종 만난다.

사람이 얄궃게 굴어도 그 얼굴만 보면
그냥 마냥 인생이 살만하구나 싶은 착각에 잠시 머물게 해 주는 사람.

이건 엄밀히 말해서 현실이 아니다.
옥시토신의 분비와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가  한 개인에게 상정해 놓은 분위기의 쾌락일 뿐이다.

실체와는 다른 내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보고 내가 기꺼워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혼자 끄적거려 써 놓은 시를 보고
"아아 이런 절묘호사를 내가 짓다니!" 하면서 엉엉 울어대는 것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그런 게 있으니
사람들이 서로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그렇게 세대를 이어가며
인생을 자기가 알지 못하던 것들로 채워가는 것 아니랴.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어느정도 되느냐의 문제인데
살면서 조금씩 두 사이의 접점을 좁혀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어느덧 정신 차리고 나를 보면
그 둘 사이에는 천길 억겁의 절벽이 존재하고 있더라.

결론:  이래서 연애하겠나.
Posted by 荊軻
,
며칠 전 어디선가들은 설교말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젊은 학생들에 대한 기도였는데

여러분, 여러분은 언젠가 주님에 의해 물질적인 축복과 명예를 얻을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을 잊지 않겠다고 기도하십시오.

라는 기도제목이 나왔다. 얼핏 들으면 참 고결한 기도제목이고
사실, 저런 기도제목이라는 것은 굉장히 고풍스러운 것이다.
스스로 자고함을 떠나서 신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기도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 세상에,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
주님을 믿는다고 물질적인 축복을 얻을 자가 거기 모인 수 많은 학생들 중 몇이나 될까.

여러분, 여러분은 언젠가 돈과 세상의 일 앞에 쪼들려 빈곤과 걱정이 삶을 짓누르겠지만
그 때에 주님을 잊지 않겠다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맞는 기도제목 아닐까.
하지만 이런 기도제목을 목사님이 자라나는 청소년들 앞에 이야기하기도 그럴 것이다.
꿈은 꾸라고 있는 것이고, 꿈을 꾸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게 또한 아이들이니까.
그리고 나도 모든 아이들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평안을 얻으며 살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물질적인 축복이라는거, 그 무시못할 유물론적 혜택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내가 40년 가까이 싸워온 것은
그 혜택을 누리고저 함이 아니었던가?

우리 반 학생 중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
"참 저희 교회에는 대단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요. 기업사장이나 판사, 변호사 같은 분들만 있고
성공하지못한 분들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네 앞에 서 있는 이가 안 보이느냐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단다. 단지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거야. 신께서 보시기에는 삼팔광땡이나 망통이나 다 그놈이 그놈이란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교회 선생이라는 자가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어쩌면 했어야 할까. 신앙은 핑크빛 로맨스, 백마탄 왕자의 기다림이 아니야. 겉은 그럴지언정 발은 미친듯이 물속에서 장구질을 헤대는 백조의 헤엄과 같은거야.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 좀 두렵다.
요즘 애들은 피상적으로는 세상 모든 일을 어른들 못지않게 알고
심층적으로는 우리 초등학생 때보다도 못한 정서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우리가 하던 기도는 어디에 갔을까
하나님 제가 풍요로와 주님을 잊지않게 하시고
제가 빈곤하여 주님을 원망치 말게 하소서. 

어려운 일이다. 신앙이던 삶이던.
Posted by 荊軻
,
누워서 침뱉기고
다된 죽에 코 빠뜨리기지만

강원도지사 판결과 스폰서 검사판결 및
지난 5년간의 정권행태와 언론행태를 보고 나서
난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하나로 규정짓는 단어가 무언가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 말이다.
민족성 말이다.


[탐욕]









Posted by 荊軻
,

TV 옮기기

믿거나 말거나 2011. 1. 28. 20:44
어느 평온하지만 무료한 아침에 사건은 시작되었다.
뜬금없이 걸려 온 전화. 아버지 전화였다. 보통 난 주중 아버지 전화를 그렇게 기꺼워하지 않는 편인데...보통은 후사 걱정이거나 직장 걱정이거나 나도 모르는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결국, [내가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것]에 대해서 나를 채근하는 내용인지라 별다른 솔루션을 줄 수 없으니 나도 답답한 대화라 피하는 것. 그런데 이번 전화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너 TV를 팔자."

"아니 왜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하여간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쩌다가 PDP가 싸게 생겼는데 이미 본가에는 있으니 나를 주겠다고 하시는 거다. 그러자니 내가 가지고 있는 옛날 TV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냥 누가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걸려 얻은 거라 수거해 가지도 않는 것이고...치우긴 치워야 하는 것인데...사람을 사던가 어떻게 알아봐야 겠네요 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아버지의 뜬금없는 폭탄선언.

"내가 보자기 가지고 갈께 둘이 나르자."

아니, 시방 이것이 뭔 소리랑가. 뭔 소리여유, 무삼 말이런가.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있는 TV가 컴퓨터 모니터만한 줄 아시는 것인가. 그래도 30인치가 넘는데. 더군다나 어떤 놈이 디자인했는지 몰라도 양 옆이 날개처럼 벌어진 얄궃은 물건이다. 100kg가 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보기만 해도 팍팍 오는데

보자기라니.
그리고 둘이 나르자니 뭔 소리 하시는 건가
아버지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것 같은데요

하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이미 출발하셨다. 이 저주받은 가문에 흐르는 불같은 성급함이라니!

혼자 투덜대고 있던지 10분 뒤 아버지가 오셨다.

 (뭐...그 그렇죠. -.-;;)

대충 보시더니

"이 정도면 들 수 있어!"
그리고는 보자기를 아래 펼쳐놓으신다.

"자, 이제 들어서 이 보자기 위에 놓는거야!"

아 제발 이게 꿈이었음 좋겠어 웅얼웅얼 하지만 이것은 현실.
둘이 들어서 끙 하고 자리에서 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엇? 이런 쒸@!(&@(&!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내가 무겁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보자기 위에 놓고 아버지는 보자기로 TV를 싸신다.
(36인치에 육박하는 브라운관 TV가 싸지는 보자기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포대화상이 빌려줬나.)
그러더니 이제 둘이 들고 나가면 된다고 호기있게 말씀은 하시는데

아까 들어보니까 문제가 장난이 아니었단 걸 깨달으신거다.
슬쩍 아들 눈치를 보더니

"...이거 가지고 나갈수 있겠지?"

"......."


------------
1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이 TV를 제조한 쌤쑹과 브라운관을 만든 칼 브라운 박사를 입에 침이 마르게 욕했던 것이 기억나고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옮기던 지혜가 참으로 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는구나를 느꼈을 뿐이다.

아버지도 청춘에 빠져 사시는 것이다.
예전에 황소도 번쩍 들던 시절에
브라운관 TV가 커봤자 전축판만하던 시절을 생각하신 듯 하다.

결국 그 물건을 아파트 앞마당에서 대충 처리하고
(그 지옥의 한 시간뒤 아버지는 "팔긴 뭘 팔어! 이런 염병할 거 당장 없애버려!" 로 태도를 바꾸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투덜대며 빈 보자기를 가지고 가셨다.

남은 것은 몸살.
그리고 공짜로 얻었다는 PDP정도랄까.

하긴 나는 뭔가 생기긴 했는데
아버지는 꿍~ 하니 의욕만 상실하신 것 같네.



Posted by 荊軻
,

뒤돌아보기

수련장 2011. 1. 28. 02:13
그렇게 오래 살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내 삶의 반은 살아버린 것 같다.
가끔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앞만 보고 달려간다 하더라도 내가 성취해 놓은 것이 미비하다 느끼고, 그동안 투자해 온 인생의 길이 하염업이 길기만 했다고 생각된다면 누구라도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등산을 하다가 뒤를 보면 까마득한 평지가 보인다. 그럴 때는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정상에 올라가면 더 넓은 곳을 보게 되겠지. 하는 심리가 작용할 것이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려다 보기 위해서다. 자기 위에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를 바래서 아닐까.

하지만 인생에서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언가 내 삶이 지쳤거나, 뭔가 잘못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대부분이다. 사실, 삶이라는 것은 등산하고는 천양지차라서 되돌아 내려올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끝까지 가야한다. 가다보면 길이 이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된다. 그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자신에 대한 원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거쳐온 삶들도 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삶이 즐겁다기 보다는 늘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아왔다. 여유라는 것을 늘그막에 누리려고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내는 거라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늘그막에 먹고 살 것이 없기에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여유라는 것은 삶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지금 그래서 이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해 본다. 과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된다면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냥 하루하루에 매몰되어 살다보면, 그나마 위인전에라도 올라갈 만한 성취가 아닌 담에는 나나 저이나 다를 바 하나 없는 삶일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지금 편하게 있는 것이 훨씬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유를 갖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늙으면 인생은 속도가 더욱 빠르게 붙을 테니까.

그나마 반쯤 왔을 때 이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뒤돌아보는 것이 어느 정도 효험이 있다고 해야하나.

아직 잘 모르겠다.
반이나 살았는데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것.
Posted by 荊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