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옮기기

믿거나 말거나 2011. 1. 28. 20:44
어느 평온하지만 무료한 아침에 사건은 시작되었다.
뜬금없이 걸려 온 전화. 아버지 전화였다. 보통 난 주중 아버지 전화를 그렇게 기꺼워하지 않는 편인데...보통은 후사 걱정이거나 직장 걱정이거나 나도 모르는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결국, [내가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것]에 대해서 나를 채근하는 내용인지라 별다른 솔루션을 줄 수 없으니 나도 답답한 대화라 피하는 것. 그런데 이번 전화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너 TV를 팔자."

"아니 왜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하여간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쩌다가 PDP가 싸게 생겼는데 이미 본가에는 있으니 나를 주겠다고 하시는 거다. 그러자니 내가 가지고 있는 옛날 TV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냥 누가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걸려 얻은 거라 수거해 가지도 않는 것이고...치우긴 치워야 하는 것인데...사람을 사던가 어떻게 알아봐야 겠네요 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아버지의 뜬금없는 폭탄선언.

"내가 보자기 가지고 갈께 둘이 나르자."

아니, 시방 이것이 뭔 소리랑가. 뭔 소리여유, 무삼 말이런가. 아버지는 우리 집에 있는 TV가 컴퓨터 모니터만한 줄 아시는 것인가. 그래도 30인치가 넘는데. 더군다나 어떤 놈이 디자인했는지 몰라도 양 옆이 날개처럼 벌어진 얄궃은 물건이다. 100kg가 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보기만 해도 팍팍 오는데

보자기라니.
그리고 둘이 나르자니 뭔 소리 하시는 건가
아버지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것 같은데요

하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이미 출발하셨다. 이 저주받은 가문에 흐르는 불같은 성급함이라니!

혼자 투덜대고 있던지 10분 뒤 아버지가 오셨다.

 (뭐...그 그렇죠. -.-;;)

대충 보시더니

"이 정도면 들 수 있어!"
그리고는 보자기를 아래 펼쳐놓으신다.

"자, 이제 들어서 이 보자기 위에 놓는거야!"

아 제발 이게 꿈이었음 좋겠어 웅얼웅얼 하지만 이것은 현실.
둘이 들어서 끙 하고 자리에서 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엇? 이런 쒸@!(&@(&!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내가 무겁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보자기 위에 놓고 아버지는 보자기로 TV를 싸신다.
(36인치에 육박하는 브라운관 TV가 싸지는 보자기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포대화상이 빌려줬나.)
그러더니 이제 둘이 들고 나가면 된다고 호기있게 말씀은 하시는데

아까 들어보니까 문제가 장난이 아니었단 걸 깨달으신거다.
슬쩍 아들 눈치를 보더니

"...이거 가지고 나갈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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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다.
그냥 이 TV를 제조한 쌤쑹과 브라운관을 만든 칼 브라운 박사를 입에 침이 마르게 욕했던 것이 기억나고
이집트인이 피라미드를 옮기던 지혜가 참으로 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는구나를 느꼈을 뿐이다.

아버지도 청춘에 빠져 사시는 것이다.
예전에 황소도 번쩍 들던 시절에
브라운관 TV가 커봤자 전축판만하던 시절을 생각하신 듯 하다.

결국 그 물건을 아파트 앞마당에서 대충 처리하고
(그 지옥의 한 시간뒤 아버지는 "팔긴 뭘 팔어! 이런 염병할 거 당장 없애버려!" 로 태도를 바꾸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투덜대며 빈 보자기를 가지고 가셨다.

남은 것은 몸살.
그리고 공짜로 얻었다는 PDP정도랄까.

하긴 나는 뭔가 생기긴 했는데
아버지는 꿍~ 하니 의욕만 상실하신 것 같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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