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00건

  1. 2010.09.08 편치 않은 만남 4
  2. 2010.09.07 과일 4
  3. 2010.09.04 등불을 향해 끌려가는 삶 4
  4. 2010.09.02 9월 초 어느날 밤 7
  5. 2010.09.02 옥한음목사 소천, 그리고
  6. 2010.09.01 2010.09.01 2
  7. 2010.08.31 잡설 2010.08.31 6
  8. 2010.08.31 노력이라는 것 3
  9. 2010.08.30 날 선 편견 2
  10. 2010.08.25 탐욕은 죄니라
가끔 있지 않은가

연락이 오면
아...하면서 잠시동안 미간이 찡그려지는 사람.

안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기도 뭣하고.

알아온 시간이 있으니 만나긴 하는데
그렇다고 생산적이거나 내 마음에 평안을 줄리 만무한 사람.

역시나.

만나고 돌아오게 되면
"내가 모질지 못해서 고생이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사람.


역시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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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작은 방 한담 2010. 9. 7. 00:38
일요일 늦은 오후에 갑자기 뜬금없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심심할 때 고양이나 보겠다고 하더니 진짜로 찾아왔다.
그러던 중 빈손으로 오는게 심심했던지 뭔가 한 뭉태기를 가져왔다.
이것이 무엇이오 물었더니 사과를 받으시오 하더라
나한테 뭘 잘못한게 있소 하면서 보니 어디서 서리라도 해왔는지
사과가 한다발이라. 안 그래도 빈한한 집안에 인스턴트로 가득한 냉장고니
채소와 과일은 늘 부족한 터라 기꺼이 받았다.
여차저차하다보니 손님은 이미 사라지고 자취라고는 큼지막한 사과봉투뿐인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은 독처하는 사람 혼자 먹을만한 양이 아니라.
그렇다고 고양이들에게 사과를 먹이는 호사스러움을 보였다간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을 성 싶고, 내가 죄다 깎아먹지 않으면 즙을 내어
마셔버릴 요량인데, 그것도 영 곤란할만큼 많다.

혼자 살면서 가장 필요하고, 부족하다 여기면서도 늘 가질 수 없는 것이
채소와 과일이다. 오래 둘 수 없으니 소량을 사야하고, 소량을 사려니 번거롭다.
육류야 사 놓고 냉동고에 때려넣으면 그만이나 과일이나 채소를 
그렇게 할 수가 없지않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일이나 채소나 모두
태양과 바람을 직접 받으면서 큰 족속들이라. 바람과 햇빛을 어떻게
오랫동안 손아귀에 넣어둘수 있으리. 쉽게 상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이치에 맞으리라.

내일부터는 아침에 커피대신 사과나 갈아서 쥬스를 해 먹는 웰빙식단이 될 것 같구나
그런데 난 사과는 산성인 음식이라 위가 안 좋은 사람이 먹으면 폭풍이 몰아치기도 하는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내일 똥은 내일 싸면되고.

얻기 힘든 먹을게 생긴 것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냐

사과를 내려주시고 표표히 사라지신 처사님께 감사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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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후광에 이끌리고, 그곳에 기대려고 하고, 그와 닮으려고 하고, 그가 속한 그룹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개인적인 욕망의 투사, 그리고 후광효과까지 같이 노리면서.

하지만 개인의 성공은 개인의 성공일 뿐이다.
특정한 비법이나 집단에 의한 성공이 보장된다면 이미 그건 카르텔이거나 그들만의 리그가 보장된 계급사회일 뿐이다. 한 사람의 성공은 나와는 전혀 관계없다. 내가 그 사람과 모든 것이 똑같고, 공부하는 방법이나 노력하는 방법이 똑같고, 하다못해 좋아하는 야동도 똑같고 밥먹는 버릇도 똑같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처럼 성공한다는 법칙은 없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므로.

보여주는 성공의 길, 성공의 방법?
그게 개인적으로 체화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길은 스스로가 찾아갈 뿐이다. 그것을 잊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해서 같은 길에 오르리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림자로 가려진 횃불 속으로 돌진하는 나방의 날갯짓하고 다를 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정신차려보면 나는 나를 잃고 오직 할줄 아는 것은 허망한 날개짓뿐일지도 모르는 것을.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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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키보드를 치고 있는 도중 창문을 타고 들려오는 규칙적인 증기소리
아련하게 들리는 열차소리같기도한 그 소음은 압력솥 소리.

아 옆집이구나.
자정이 넘은 이 시각에 왜 밥을 할까
아이들 도시락일까
아니면 이 시간에 밥을 먹는걸까

그러고 보니
1시가 넘어 
어쩌면 2시에 가까운 시간에 문을 여는 소리가 종종 들렸다.

그렇구나
누군가
저 집안의 누군가가
야근을 하는구나
그것도 규칙적으로

밥을 먹지 않고 오니
부모가, 혹은 아내가 밥을 하는 게로구나
그래서 내 옆집은 그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구나
혼자 시끄럽다 궁시렁거린 것은 
그런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로구나

어느 9월 밤
창문을 넘어 들어온 칙칙대는 증기소리
가족들이 모여서 밥 먹는 소리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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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교회 옥한음 원로목사가 돌아가셨다.
예의 인터넷은 개독들은 죽으라!라는 말로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을 배웅하긴 한다만
나름대로 경건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지, 나같은 범부가 따라가기 힘들게 사신 분인건 확실하다.

물론 보수 옹호 뉴라이트적인 정치발언을 일삼는 오목사를 후계자로 세운 일과
서울고쪽으로 2000억을 들여서 새롭게 교회를 세우게 만든 
생애 마지막 두 가지의 일을 제외하고서는.
물론 이것도 내 개인적인 편견에 가득한 의견이지만.

개관논정(蓋棺論定)이라는 말이 있다.
관뚜껑을 덮고 나서야 죽은 이의 논공행상을 논한다는 말이다.
고인을 엄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인데
1. 객관성을 담보로 할 것
2. 시대상을 알아야 할 것
이다.  동시대를 같이 사는 이들은 1번이 부족하고 후대인들은 2번이 부족하다.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은 
어느 세대가 단정짓건 늘 부족함을 느낀다. 아마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진토로 돌아가게 되는 그 날이
지난 뒤, 우리는 뭐라고 얼마 안 되는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기억될 것인가.

아마 신께서는 공정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다.
죽어서 올라가 뵈오면 뭐라고 말씀을 하겠지. 
절대적인 판단이 있다고 믿는다면 열심히 살아야겠지.
최소한 개독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

어쨌거나 목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설교를 접해 들은 게 바로 어저께 같은데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갈 것이라고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더랬습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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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작은 방 한담 2010. 9. 1. 21:21
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딱 네명. 나까지 합쳐 다섯.

그 중의 마지막
영원히 젊음을 구가하며 찬란하지만 구질구질한 싱글을 누릴 줄 알았던 마지막 친구가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발표를 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냐는 말에 늘 그렇듯 어눌한 목소리로 바빴다고 이야기하는 친구.

드디어 모두가 간다. 
들어갔다 빠져나온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만.

그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나니 하늘에서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뜨거웠던 여름이여 안녕인가.


2.
무언가 사람들은 착각하면서 그 착각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걸로 위안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은 날 좋아해 라던가
이번 일은 우리회사에 떨어지는 게 확실해 라던가
내 인생은 지금부터 꽃피게 될거야 라던가

기타등등

깨지 않아야 할 착각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누가 태양을 맨 눈으로 하염없이 응시할 수 있을까?


3.
뭔가 하나 둘 잊혀지고 잃어버리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4.
마피아의 격언이 생각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피붙이 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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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글을 쓰다보면 긴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

2. 사람의 말속에 품은 뜻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3. 바닥을 본 다음에는 지하실을 보게 되는데 그 다음은 이게 몇층까지 내려가는 건지 확인해 보는 일.

4. 천하태평하게 사는 것이 타인의 미움을 사게 될 수도 있다.

5. 집에서 하루종일 자는 것이 하루종일 발품을 파는 것보다 이득이라면 당연히 자야한다.

6. 몸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망가져간다. 30이 넘은 다음부터는.

7. 희망은 바보짓이지만 절망은 병신짓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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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항로가 잔잔한 일망무제의 만경창파를 헤치고 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게 우리들 인생이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고 키질을 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의 배를 끌고 가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이 노력이라는 것 아니냐.

하지만 아무리 한들 뼈가 부서져라 노력한들,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키를 붙잡고 있다가 토할지경까지 이르러도 바람이 바뀌지 않고 거칠어지는 것 또한 인생 아니랴.

이쯤 되었을 때 우리는 고뇌한다.
여기서 손 놓고 그냥 바람부는 대로 떠내려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서서 죽더라도 키를 잡고 있어야 하나.

누군가는 손을 놓고 누구는 손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들 산다.
떠내려 가는 것이 어쩌면 편할지도 모르고
꽉 붙자고 사는 것이 그의 사는 목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장담하겠느냐. 바람부는대로 표랑하다 도착한 곳이 그가 꿈꾸던 곳일지도 모르고
내가 피땀바쳐 잡아끌며 도달한 목적지가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봉래 양사언은 이렇게 시를 읊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양사언이 불굴의 투쟁적인 유학자였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양반은 유학자기도 했지만 선도(仙道)를 배운 사람이었다.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론을 알았을 게다. 세상엔 득도 없고 실도 없도다.
그런 그가 왜 저런 시를 읊었을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말을 할 정도는 벗어나야 한다는 거 아니었을까.
일단 뭐든지 토할때까지는 해 본 다음에 손을 놓던 계속 잡던 그 다음에 오는 건 자유로움이라는 거겠지.

그런데 그걸 알기 힘든거지.
언제까지 이걸 잡아야 하는 건지. 언제 놓아야 하는건지.
아직까지 이런 생각이 들 지경이라면
손을 놓기에는 요원하게 먼 것일지도 모르지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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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선 편견

투덜투덜 2010. 8. 30. 00:46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게다.

3학년은 아니었을것이다. 그 시절은 광기의 시절 아닌가.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지않는 시절이다. 동무들하고 농담따먹기 하면서 놀던 기억은 없다. 그리고 난 고3때 급우중에 얼굴 기억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 1-2학년 시절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 뒤에 있던 놈이 갑자기 낄낄대더니 내 등을 쳤다. 꽤나 사이가 좋은 놈이었다.

"뭔데?"

"어제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셨는데 기분이 좋으신거야."

"그래서?"
 
"그러더니 날 부르면서 설교를 하실 것처럼 굴더니 딱 이 말씀만 하시고 들어가주무시더라."

"뭔데?"

"야! XX아! 너 나중에 니 맘에 드는 애 아무하고나 결혼 해라. 
 전라도 계집애랑 결혼해도 돼!
 교회만 안 다니면!"

아니 그 양반은 술처먹고 뭔 소리를 애한테 해댄거야 싶었지만 그 당시는 그런 생각까지 날만큼 철든 상황은 아니었고, 그냥 이 친구라는 잡놈은 내가 교회 다니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흰소리를 수업시간에 나불대나 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다. 물론, 그렇다고 주먹질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사이는 좋았으니까.

*----*

지금도 왜 그 시퀀스가 뚜렷하게 기억나는 지 모르겠다.
아마 약간 소름이 끼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등골이 서늘했던 감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커진다.

급우와 급우의 아버지가 이야기한 저 짧은 대화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종교론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는 날 선 코드 아닌가. 잘은 몰라도 아버지의 평상시 대화를 유추해 볼 수 있고, 그 아래에서 조신하게 자라온 내 급우의 코드도 읽을 수 있고, 이 놈이 말이 없어서 그렇지 맘 구석 어딘가에는 저런 이야기들을 축적해 놓은 어느 장소가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존 로크가 타블라 라싸(tabula rasa)라고 했던가? 인간의 마음은 맨 처음에 백지 같아서 순수하고 그 위에 무엇을 적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인간의 순수함라는 것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요즘은 고민해 본다. 특이 지나간 고등학교 시절의 이 짧은 경험담을 반추하면 할수록 그 의문은 더욱 커진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한 지식의 습득은 책이나 선친의 기취득된 경험의 구전으로 이어받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습득만이 이뤄지는 것은 분명 아닐게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들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편견들과 아집이 있고, 우리는 다른 것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편견과 아집도 같이 흡수한다.

가족이건, 스승이건, 하다못해 술친구건
우리는 테두리 안의 사람들을 닮아가는 법.

편견없는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편견없는 인간의 중립성이란 구현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열조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인간의 철학과 종교적 함의를 다 알고 사람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인간의 삶을 내려다 본다 하더라도.

내가 인간인 이상.


누군가가 그러더라
학생시절 순수함으로 편견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어쩌구...

놀고 자빠진 일이지.
사람이 혼자 독고다이로 살 지 못하는 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편견은 사람과 어깨동무하면서 가기 마련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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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두마리가 집에 있다.
어쩌다 들어왔는지 다시 생각을 복기하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 거실에 배를 깔고 둘 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태초에 시간이 생성될 때 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이런 망할놈들.

한 마리가 있을 때는 그나마 집 안에 생물 하나 있다는 셈 치고 별 신경 안 썼는데
두 마리가 되자 이 두 생물이 나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들끼리 놀더라.
그리고 미묘한 경쟁관계.

누가 더 많이 먹는가
누가 더 잘 노는가
누가 더 힘이 센가

따위의 10대 고삐리들이나 할 법한 짓을 고양이 두 마리가 하고 있다.
전능하신 사람님의 입장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작시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데
지들 딴에는 굉장히 치열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다른건 모르겠다.
그런데 식탐에 경쟁이 붙었다.
미친 놈들처럼 사료를 처먹는다. 지들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거 아니라 이거지.
내가 조금 덜 먹으면 저 놈이 더 먹는다는 얄쌍하고 기괴한 피해의식이
두 마리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모양이다.
배가 터지도록 처 먹고 처 먹고 또 처먹는다.

어제는 자고 일어났더니
화장실 바닥에 사료를 토해놨더라.

내가 고양이라도 토했을 것이다.
설사 내가 핫도그 먹기 지존 고바야시라고 해도
너희들이 처먹는 것처럼 먹다가는 식도부터 위장까지 담을 수가 없었을 거다.

탐욕이라는 건 혼자 있을 때 생기는 게 아니다.
누군가 옆에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게 하고
저 자가 나의 것을 늑탈한다고 여기면 없던 욕심까지 생기고
종당에는 내가 수용하지 못할 정도의 탐욕이 나를 망치는 것일게다.
 
어제부터 그래서
그냥 사료를 푸대기로 그릇에 부어놓고 나왔다.

미친놈들처럼 먹고 또 한 번 토하더니
오늘부터는 그냥 배 깔고 사료 근처에는 가지 않더라.

둘 다 아무리 먹어도 안 줄어들자
소유에 대한 욕심도 줄어들었나보다.
역시 흔해지면 가치가 떨어지는 법인가.

아마 저 두 놈은 또 다른 경쟁할 것을 찾아내겠지.

인간같으니라고.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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