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 한담'에 해당되는 글 668건

  1. 2013.12.17 연습
  2. 2013.11.21 아무리 좋다한들
  3. 2013.11.05 안다는 것과 가르치는 것 1
  4. 2013.07.31 책 읽어주는 남자 3
  5. 2013.05.09 사람은 가끔
  6. 2012.12.14 근황 6
  7. 2012.09.09 대화의 이유 2
  8. 2012.08.19 카르멘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단상
  9. 2012.08.12 능청
  10. 2012.08.05 전두환 시절이 좆나게 부러워요 씨발

연습

작은 방 한담 2013. 12. 17. 09:54

무협의 클리셰, 무가의 격언으로 내려오는 말 중에

백일도(百日倒),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는 말이 있다.

도는 최소 백일을 수련해야 도의 길을 안다 하는 것이고

창은 천일을 수련해야 창을 잡는다 할 수 있고

검은 만일은 수련해야 검을 이해한다 하는 말이다.


각 병기의 운용에 대한 짧은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국 기예에 대한 연습을 어느정도 해야 하는가를 함축적으로 말한 것일수도 있다. 도의 단조로운 공격법에 비해서 창의 길이와 회전에 대한 운용은 더 시간이 걸리며, 도와 창을 합해놓은 것 같은 양날무기인 검의 경우는 더욱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이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까 먹을 것이 많다는 말도 여기 포함된다. 연습이라는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다듬고 닦아 놓은 지식과경험을 지속적으로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연습을 하는 것은 퇴보를 막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어디에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이제 여기까지만 하면 되니까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은 필요없다 라고 느끼는 인생의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이 되었건 자기계발이 되었건 애정전선이 되었건 모든 것에 내가 한발짝 물러서서 쉬고 싶어하는 부분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요즘 글 쓰는 것이 느려지고 많이 게을러졌다.

회사 일이 바쁘고, 가정사가 바쁘고 짬을 내기 힘들다보니까 하고 나 자신을 자위해보지만

결국 연습 없는 답보는 정지상태가 아닌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나는 노력을 해서 정상에 올라가는 [드래곤볼]류의 인생역정을 참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시지프스도 아니고 매일 끊임없는 노력을 해서 두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느냔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만히 있다보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더라. 드래곤볼같은 성취는 못하더라도 돌멩이 하나라도 손에 쥐고 살아야 못을 박든지 남의 뒷통수를 후려치든가 하지 않을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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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산해진미로 만한전석을 차려놓고 먹으라 하면 그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누군가가 윽박지르며 강권하여 먹으라고 한다면 그게 항상 맛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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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가장 부족해지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다.

내가 나이를 먹은 만큼 얻어지는 경험과 지식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함부로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서서히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생각보다 이 부분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자기 자신의 이해도와 관계없이 실수는 종종 

일어나는 법인데,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과  그동안 인생에서 알게 모르게 성취해 온 자기자신의 

밑바탕이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모르는 부분을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

그가 가진 지식에 또 다른 지경을 넓혀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철저히 객관적이어야 하며

그것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사감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교육자들이 갖는 가장 큰 딜레마중 하나인데 

어떻게 해야 자신의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주입하여 학생들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을 향상시키느냐에 대해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이고 학생도 인간이데 어찌 사감이 들어가지 않으랴?



나이를 먹을수록 남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많아지는 반면

어떻게 타인의 배려하며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고양시키느냐에 대한 생각은 적어지는 듯 하다.


최소한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난 그렇게 되지 말자.

그들의 삶은 어차피 그들의 삶 아닌가. 사람은 사람을 교정시킬 수 없다고 난 믿는다.

어쩌면 이 믿음도 교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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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임신 10주가 넘었다. 임신했다고 울먹이면서 전화하던게 어제같은데 벌써 10주가 넘었으니 나이를 먹을 수록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부모님들도 와서 축하해준다. 당연한 일이지, 이 나이에 후사(?)를 보게 생겼으니 어찌 감사할 일 아닌가. 옛날 조선시대 같으면 거의 할아버지가 막내 낳는 나이다.


그나저나, 어머니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아내에게 이런 저런 덕담을 하고 간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날 밤, 갑자기 아내가 책을 읽어달란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이 아니라 종교경전, [잠언]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잠언은 솔로몬이 그 자식에게 훈계한 내용을 적어 둔 지혜의 서. 31장으로 되어 있어서 하루에 한장 씩 읽으면 한 달이 홀짝 가는 참으로 [XXX의 아침편지]만큼이나 효율적인 경전이다. 좋은 말들이니 읽어서 아이 태교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읽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산모가 읽는게 더 낫지 않나? 하여간 남편이 읽어주는 게 좋다니 그냥 내가 읽기로 했다.)


그런데 '책 읽어주기'란 생각외로 묘한 일이다. 혼자서 소리내어 읽는 강독과는 또 다른 감성의 울림이 있더라. 어머니들이 아이들 책을 읽어주는 것을 무심하게 지나가곤 했었는데 그게 나름대로 뜻이 있는 일이다. 그냥 주문처럼 아무 감정없이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안에 사람의 감성이라는 것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낭독의 대상이 내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 감성은 굉장히 고양되거나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록키2가 있다. 비평가들은 [록키1]편과 [록키 발보아]를 높이 치지만 난 개인적으로 록키2편을 제일 높이 쳐 준다. 가장 흔하면서도 어려운 게 있는 재료 가지고 맛난 음식 만들기인데 록키2는 그렇게 본다면 꽤나 훌륭한 조합을 만들어 낸 영화다. 

각설하고, 내가 그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록키와 아폴로가 피터지게 권투하는 장면이 아니고 훈련 빡시게 하는 장면도 아니다. 아내 아드리안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록키가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다. 록키는 이 영화에서 문맹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다. 가뜩이나 어눌한 말투의 스탤론이 병상에 누워서 듣는지 마는지조차 모르는 아내를 위해서 더듬더듬 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당시 KBS 더빙은 이정구씨였는데 거의 신이 내린 더빙이었다. 더듬으면서 책을 어두운 방 안에서 읽어주는데...난 왜 그 장면을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혼자였고 애를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혼수상태에 빠질 마누라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지금 내 아내에게 글을 읽어준다.

 록키처럼 더듬으면서 읽지 않는다. 아내가 아프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내가 그 영화의 어눌한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 대해서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다. 하나하나 손으로 더듬으면서 나가는 기분이다. 어떤 두려움과 더불어 잘 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깃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나이가 되어서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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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끔씩 실수를 한다. 그리고 나서 내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후회한다.

사람은 가끔씩 짜증을 낸가. 그리고 나서 내가 왜 분노했는지에 대해 후회한다.

사람은 가끔 슬퍼한다.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일을 했는지 따져보고 더 슬퍼하며

슬퍼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상황을 보고 더 슬퍼한다.


사람들은 가끔씩, 아주 가끔씩 옳은 일을 한다.

그리고 격에 맞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놓고 우리는 늘 우리가 옳고 격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때는 실수하거나 짜증나거나 슬퍼할 때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단지 반추일 뿐, 그것에 대한 예방책이나 대비책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몇 번 되지도 않는 인생의 나이스 타이밍에 대해서

그것이 으레 일어나고 내 삶을 지배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만을 반복한다.


그게 나다.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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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작은 방 한담 2012. 12. 14. 22:02

많은 일이 있었다.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끄적거리던 소설이 출판제의를 받았다.

팀장이 되어서 회사에서 no.2가 되었다.

좋은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앞두고 있다.


후반기에 갑자기 밀어닥치는 호운에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이것은 내가 어느 읍습한 뒷골목에 누워서 꾸는 백일몽이 아닐까 싶은 순간이 있다. 일생의 대운을 내가 맞은 걸까? 그 동안 혼자 절치부심하던 삶의 보상인가? 이것저것 상상해 본다. 하지만 눈을 뜨고 방에서 일어나 해를 보고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아파트 문을 열면 다시 나는 내 처지를 날카롭게 인지하게 된다. 이것은 실제상황이구나.


감사를 해야 한다. 세상의 누구나 나 정도의 노력은 하고 산다. 나 만큼의 질고는 다 겪는다. 그리고 나만큼의 슬픔과 고난과 절망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다 옹이져 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이 순탄하게 풀리고 있다. 이것은 그저 축복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리라.


더불어 나는 한가지 단어에 천착한다. 호사다마. 

기쁜 일이 있으면 곧 슬픔이 몰려오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사탕을 하루종일 입에 물고 있으면 볼이 아리게 되는 법이다. 언젠가는 모든 것들에서 행복이 옷감의 물 빠지듯 서서히 내 손아귀 사이로 빠져 나갈 것이다. 염려가 아니라 그것이 삶의 과정이며 순환이라는 것을 나는 값을 치르고 배웠다. 나는 그 때 과연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까.


아무쪼록 그 날이 오더라도 과거의 생채기를 반면교사삼아 대범해지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고 돌아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말기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인생 순환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순응하기를.


나는 내게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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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같은 종족과 정말 많은 대화를 한다. 의사소통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생물을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면 돌고래정도로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인간은 정말 말이 많다. 이메일도 있고 문자언어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을 한다. 왜 말을 할까.


심심하니까. 외로워서. 할 일이 없어서. 아마 이런 이유가 장황한 수다생물을 만든 원인 아닐까 싶다. 유희적 동물이라고 설파된 족속이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나서 재미없는 이야기 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참으로 고역이다. 그렇다고 만나놓고 내 할일 있다고 면상에 사람 앉혀놓고 책 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일종의 노동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한,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유희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전화를 통해서, 혹은 채팅을 통해서 쉴새없이 말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고, 그런 삶이 점점 늘어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전화는 몰라도, 채팅이라는 것은 업무나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유장하게 이어지는, 어찌 보면 시간을 유구하게 잡아먹는 기나긴 대화다. 사장이 보면 무척이나 싫어할 노릇이지만 그 빈도는 점점 늘어나지 않는가.


대화는 유희뿐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말을 털어놓고 동정이나 감상을 얻어내는 것으로 사람은 건강함을 유지하는 듯 싶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R.E.M이 노래한 것처럼.


그래서인가. 나이를 먹으면 내 이야기를 할 사람이 줄어들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고르는 것이 가탈스러워진다. 알게 된다. 저 사람이 건성으로 내 이야기를 듣는지, 저 사람이 나를 귀찮게 여기는지 아닌지. 

실망함도 상처의 원인이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와 격의없는 대화를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낄수록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끼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옛 친구들 뿐. 그리고 정말 마음 잘 맞는 극소수의 몇명일 뿐.


어느 순간, 대화할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조금의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내 수첩에서 지워져 갈 때, 우리는 느낀다. 아, 더 이상 인생의 확장은 없구나. 나는 나이를 먹는구나.  


가을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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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가 그 끝내주는 오페라를 만들 기 전, 프로스페로 메리메의 원전이 있었다. 원전은 비제의 화려한 스페인식 오페라와는 다른, 관조자의 입장에서 사형수를 쳐다보면서 쓰는 일종의 녹취록에 가까운 풍광을 그려낸다. 한 반듯한 군인이 보헤미안 여인을 만나면서 어떻게 인생이 망가져 가는 가를 그린 이야기. 실패한 사내의 이야기.


모든 남자들은 자신을 한 번에 옭아맬 매력을 가진 여자를 꿈꾼다. 그리고 그 여자와 함께 평생을 같이 하며 정착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러한 매력을 이용해서 더 자유로와지기를 원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안정을 통한 일신의 물질적 자유와 평안함을 추구한다는 것으로 확장해석해 본다면 더 많은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봐도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호세, 카르멘의 남주인공의 처사다. 여자가 해 달라는대로 다 해준다. 사람도 죽이고 밀수도 하고 도둑질도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렇게 하면 카르멘이 내 옆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카르멘이랑 같이 있으면 세상이 두렵지않다고 말하는 호세의 말은 종류와 정도만 다를 뿐 모든 수컷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잠시 떨어져 이 사건을 기록하는 메리메의 눈으로 살펴보면 얼마나......병신같은 짓인가 말이다.


모든 걸 다 해줘도 여자가 손아귀의 새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게 현실이다. 잡은 새는 모이를 주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시각일 뿐, 여자들은 늘 열려있는 새장을 통해 날아갈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새의 날개와 자유로움에 목매달고 다시 한번 옆에서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없는 탄탈로스의 갈증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 동경은 비뚤어진 소유욕의 변형을 만들어내고  곧 그 감정은 질투와 질시로 바뀐다. 옆에 다른 인간이 있나 경계하게 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기위해 이짓저짓 다 하게 되고, 그렇게 병신짓 하다가 여자가 날개를 푸드득 펼치고 날아가게 되면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나는 갖지 못할 것을 소망하였구나. 내 아까운 시간.


그나마 호세는 막판에 카르멘까지 죽이는 막장테크를 타고 거침없이 인생을 종치지만, 대부분의 사내들은 여기까지 가진 못한다. 그냥 혼자 끙끙대다가 가슴에 누덕누덕 상처나 만들고 다시 다른 카르멘을 찾아 황야를 방랑하는 것이지.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 그러다가 나중에 혼까지 빨린 뒤에 정신을 차리는 것이리라. 메리메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완성한 걸까?



 카르멘은 [사랑은 변덕스러운 새]라고 노래하였지만 우리에게는 현철이 있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봐] 라고 하지 않았던가?그것을 보면 현철과 벌떼들 역시 비제만큼의 국제적 유명세는 타지 못했을 지언정 남녀간 사랑의 함의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으니, 오호라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혼이여. 집시 카르멘이 에스카밀리오를 사랑하는 것을 보던 이베리아인의 불타는 눈동자는 우리들 마음속에 트로트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밤이 후덥지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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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

작은 방 한담 2012. 8. 12. 23:01

삶이라는 게 얼마나 특출나다고 별다른게 있겠나.

그저 살았던 방식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예전의 발자국을 보면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는 것이 태반일텐데.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의 성정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애초에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바뀐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이자 다짐일 뿐.


사람이라는 것은 짐승의 일부분임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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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한 말이니 좆나게 부러운 게 맞을거다. 사내놈이 저렇게 썼다면 전두환 시절이 좆빠지게 그리워요 씨발 이라고 했을 테니까. 신문 사설 읽어봤다. "이게 무슨 맞아 죽을 소리인가 할 것이다" 라고 첫번째 말을 쓴걸 보니까 최소한 이 여자는 자기 씹에서 좆이 나기를 앙망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이 여자의 자극적인 제목은 교육문제에 대한 개탄이었다. 전두환 시절이 아무리 씹빠빠룰라고 해도 지금의 좆병신스러운 교육제도보다는 낫지 않겠냔 이야기였다. 하긴 요즘 교육이 교육인가. 애들 양계장에 처 넣고 모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무슨 선진국형 어뤤지 그 미친 할망구 생각하면 지금도 5년 전에 처먹은 소주가 올라온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설프게 교육 건드려서 유럽식으로 만들려고 햇던 이해찬도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각설해 보고, 과외하는 놈들 다 때려잡고 차라리 학력고사 식으로 대입을 돌려버리자라고 이야기하는 논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시장은  이미 마피아가 독식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되는 일은 늘 꼬인다. 더군다나 한국시장에서 교육이라면 자기 몸이라도 팔 부모가 한둘이랴. 하지만 전두환 시절에도 고액과외는 존재했다. 그리고 집권층, 사회지도층의 탈법은 여전히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는 대학도 적었으니까 아예 특별한 계층취급을 했었다는 것을 종종 사람들은 잊고 산다. 내가 군대 갔을 때 내무반에 대학생이 몇이나 되었는지 알면 까무라칠 것이다. 70명 중 30명이 안 되었다. 그 시절이 전두환 시절 지나고 영삼이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늘 과거를 황금색으로 채색한다. 아무리 병신같았어도 과거가 좋다고들 이야기 한다. 정보가 통제되고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형사정책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회상한다. 국제그룹을 돈 안 가져왔다고 공중분해시킨 군사정권이 경제를 살렸다고 지랄한다. 백주에 광주에 내려가서 사람들 패죽인 쏴죽인 놈들의 후신인 주제에 나라를 살리겠다고 깝쳐댄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너무나도 후하게 용서해준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난 5년 다 되어가는 전처에 대해서 아직도 이가 뿌득뿌득 갈리는데, 어째 우리 국민들은 나라를 뒤엎어버린 패륜역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대한 건가.


교육문제는 교육문제에서 끝냈어야 했다. 이 글을 쓴 여자는 자신의 생식기가 형태변화 하는 것을 원하진 않았을 지언정 최소한 자신의 글이 전두환 시절의 아스라한 황금색 기억을 다시 반추하는 똘추들의 흥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쓴 것 부터가 이미 정신상태 심란하다는 것을 알려 주더라 [전] 대통령 아니다. 예우 박탈했다고. 그 새끼는 씹새끼에 호로새끼라고 이년아.


아무리 떡정 든 옛 서방 좋다고 매 맞던 시절 잊지는 말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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