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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8 인연이라는 것 6
  2. 2009.04.23 목요일에 대한 잡상 11
  3. 2009.04.23 여전히 살아있으니 6
  4. 2009.04.21 Into the ring 6
  5. 2009.04.20 인생사 농사가 아니랴 4
  6. 2009.04.18 낮잠 2
  7. 2009.04.11 Religion for Religious 8
  8. 2009.04.01 글은 지나간 감정을 나타내니 10
  9. 2009.04.01 고민을 하건 하지 않건간에
  10. 2009.03.29 아마도 2

인연이라는 것

수련장 2009. 4. 28. 23:18
비가 오기 전 화창했던 봄날 점심
가끔 등장하지만 여전히 익명으로 나타나는 후배와 오랫만에 점심을 먹었다.

기독교라는 베이스를 일단 무시하고
갑자기 등장한 인연이라는 화두.

인연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인연은 만드는 것인가?
우리는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이 이야기는
고집멸도와 자신의 성화(聖化)와 본래면목에 도달한 경우에
누군가를 찾을 수 있느냐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모든 아집을 버려서
 모든 인간이 나무토막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인간으로 보인다면
 그것이 운명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을
우연히 내가 손을 뻗어 잡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옴도 아니오
내가 그에게 무엇을 바라고 감도 아니고
그저 억조창생이 들고나는 파도처럼 오고감에 밀리다가
같이 어느 순간 맞닿은 것일 뿐이나
그 확률의 엄정한 희박함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니
무언가 스스로 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사람들은 노력(勞力)이라는 것에
더욱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어차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과
내가 나라는 사람이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고 타인의 노력함도 아니고
그저 하늘이 박하고 후함없이 내려준 용태일 뿐이다.

노력은 인연을 잇기 위한
허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성화에 이를 것이며 누가 본래면목을 찾겠는가
그저 허탄한 노력을 오늘도 경주할 뿐이로구나
인연만이 그러하랴?
세상 모든 욕심이 다 그러하다.

갑자기 후배가 머리깎을 생각이 없느냐 묻길래
늙어서 선방(禪房)을 만들지언정 세상을 뜰 수는 없다 하였는데
그것도 욕심이 아닌지 모르겠네그려.

하긴 나야 욕심도 많고 노여움도 많은 사람인데
쉽게 움직일 수 있으랴.
하지만 모든 게 1년 전과는 다르게 보임이 확실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시작은 기독교적 첨언으로 시작하여 끝은 범어로 끝나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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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상 뭔가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어떤 일이 자기 앞에 다가설 지 모른다는 것에
항상 공포를 갖는다.

人無百歲人(인무백세인)이나 枉作千年計(왕작천년계)니라
백살을 사는 사람은 없으나 천년의 일을 걱정하는게 인간이라.


2.

내일 밤부터 폭우예상
조용히 개인적인 피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획부터 틀어져버렸다.
평상심시도라.
그냥 밥 먹고 일하는데서 도를 닦아야 하려나.

勸君凡事(권군범사)를 莫怨天(막원천)하라 

天意於人(천의어인)에 無厚薄(무후박)이니라
권하노니, 범사에 하늘을 원망치 말라.
하늘의 뜻은 사람에게 본시 후하고 박함이 없느니라.


3.
나 스스로에게 일러 교훈으로 삼을 말

人至擦則無徒(인지찰즉무도)라.
사람이 너무나도 살피게 되면 따르는 이가 없는 법이라.

거리가 멀어야 말(馬)의 힘을 알고
시간이 지나야 사람됨을 알게 되는 법이다.

스스로에게 혹독한 만큼 사람에게 박하게 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째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후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고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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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 기다리던 내일이었다]
라고 죽어보지도 않은 사람이 쓴 경구를 보고 감동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쨌건 자정은 넘은 이 시각까지 내 심장은 잘만 뛰고 있으니
난 어제 깨어나 오늘까지 눈을 뜨고 살아있다.

친구에게 물었더랬다.
세상에 가장 슬픈 기억과 기쁜기억이 뭐였느냐?

질문 자체가 허접한 것이었다.
어차피 심장이 뛰는 한 과거는 서서히 침윤하여 사라지고
이름과 바래진 추억만 남는 것.

그냥 그 친구는 모른다고 말했고
난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았다.

피가 혈관을 돌다가
어느 날 펌프가 멈추면
그때서야 일생동안 가장 슬프고 기쁘고 아름답고 추한게 뭐였던지
알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오겠지만

그걸 아는 순간 나도 추억이 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아직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려나
심장이 멈추지않고
여전히 살아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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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ring

수련장 2009. 4. 21. 23:11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링에 들어섰다.

그냥 매스복싱이었지만 확실히 섀도우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림자는 어차피 내 분신이고 샌드백은 정지된 물체일뿐.
움직이는 것은 생각하고 반응한다.

역시 문제는 보법, 스텝이었고
기본은 원투였다.
살짝 살짝 뻗어들어오는 주먹도 확실히 아프긴 하더라.
사람의 체중이라는 것은
몽둥이 한 개에 실리면 홈런이 되고
주먹 하나에 실리면 사람을 혼절시킨다.

전에 언급했던
그 프로복서 아저씨와 딱 2라운드만 뛰어봤는데
실전과 연습은 확실히 다르더라.
매스복싱이면 스파링도 아니다.
나중에는 어찌 될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된 스파링을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커진다.

나도 이대로 늙다가는 세계를 구원할지도 모르겠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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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우주의 순환과 더불어 계절이 나누어지고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생명은 생노병사를 갖는다

때에 맞추어 씨를 부리고 자라도록 비료를 주고
비와 태양을 맞으며 홀로 커졌을 때 때를 맞춰 수확하고
수확이 끝나면 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기다리며 다른 시기를 기다린다.

때를 맞추고 씨를 뿌리는 것이 첫째요 관심을 갖는 것이 둘째지만
그 앞에 먼저 선행되는 것은 기다림이다.
농사는 기다림이다.
파종의 때를 기다리며, 식물이 자랄 떄를 기다리며, 잡초를 솎을 때를 기다리며
태양과 비를 기다리고, 그것이 결실을 맺을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부지런함이니 손을 하루 놀리며 수확이 그만큼 늦어지고
비올 때 물고를 트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니
농부는 해가 떠도 잠을 자지 못하고 비가와도 잠을 쉬이 자지 못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 뿐이랴
하늘의 뜻을 알고 하늘에 맡겨야 모든 것이 일궈지는 것.

그래서 농부는 신성한 직업이고
인생은 농사에 다름 아닌 것을.

기다리지 못해 씨를 먼저 뿌린다 되는 것도 아니고
부지런하다 해서 해를 못 보면 그나마 무용한 짓인 것을.

그래서
사람은 늙어서야 천시를 알게 되는 것인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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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수련장 2009. 4. 18. 02:34
불똥이 발끝에 떨어질만큼 화급한 상황이 지나가자
어느 순간인가 갑자기 수면이 쏟아져
멀쩡한 금요일인데도 낮잠을 자 버렸다.

참으로 호강스러운 일이려니와
남들은 꿈도 못 꾸는 일일진대
정작 잠이 들어버린 나는 괴로웠다.
오랫동안 잤다 생각했는데 결국은 10분정도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10분자고 1분깨고 10분자고 1분깨고를 반복하다
저녁을 먹고 지금까지 거리를 헤매다 집에 돌아왔다.

삶에 있어서 사람들은 똑같은 시간을 배분받지는 못해도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나름대로의 정해진 용도와 분량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낮잠을 많이 자면 저녁 잠을 자지 못하듯.
돈을 벌 수 있는 시간과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관계에 대해서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도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스스로가 한정지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 계획을 세우고 맞추고 정해서
나는 종당에 내가 짠 규격에 날 맞춰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편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게 옳다고 믿기 때문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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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r Religious

수련장 2009. 4. 11. 14:01

어두운 동트기 전의 세상같은 요즘을 지내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부쩍이나 많이 합니다.

아마 개인적인 삶의 부분에서
개인적인 사유의 부분을 할애해 보라면
종교가 40% 여성이 40% 기타가 2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전의 타락사제에 어울리는 컨셉이군요.

각설하고,
현재 제 스탯에서 종교란은 기독교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이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예장, 예수교장로회쪽이죠.

가끔은 기복신앙적인 측면도 보이고
대부분은 이성적으로 제가 가진 종교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점수보다는 돈오쪽에 대한 선호가 강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돈오라는 게 일단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어나는 돈오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고양의 착각일 경우가 다분하죠.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인 천재라는 이야긴데...이런 고승대덕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냥 줄기차게 보는 편입니다.

성경이라는 게
어찌보면 단편적인 서술로 이뤄져 있고,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를 모르면 뭔 소리인지 모르거나 곡해하기  쉬운 구절도
숱하고...한 마디로 이성의 총합으로 읽어도 불합리할 지경인데
그냥 [믿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장르는 결코 아니라는 거죠.
기독교인으로 산 지 한 4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지금은 백의종군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교회 내 직분이 있기도 했고요.
 
어느 날인가 있을 돈오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있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대로 절대선이 될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적인 [종교적인 Credo]는 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를 한번에 설명해 주진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택 범위 밖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기도해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라는 명제가 생략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확신의 부분이지만
신앙은 공동체와 외적인 표출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기독교는 개인의 믿음을 외적인 신앙으로 포장하는 데 너무 익숙하죠.

현실적 축복,
기도의 응답
그리고 돈

이 세가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홉마리 소 중의 터럭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세가지가 정수라면 일전에 죽은 제 여후배는 의미없는 개죽음밖에 안됩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벌기위해 살아가면서
[성경]하고 하나도 합치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40%가아니라 99.9%가 되도 모자랄 만큼머리가 아프고
기독교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일주일 내내 드는데

왜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사회에 대해서 늘 날 선 말들만 성경에서 취합해서 뽑아내
대외적으로 무장하며
속으로는 꿀빵에 시럽발라놓은 것 같은 말만 슬슬 요리조리 발라서
뭐가 진리이고 요설인지 구별도 못하게 되는 것인지.

그냥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간판은 신자라고 걸어놓은 우리들]에 대한 위로의 차원일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약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녀석이 중학교 이상 되어 세례를 받을 때가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세례를 받던지 말던지 하라고 시킬까.

아비는 아비의 신앙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식에게 있어서 내가 보여준 신앙이 잘못 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뭐...이 이후의 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겠거니 하고 말이죠.



흠.
여성을 사유의 40% 이상 생각하는 남자의 글 치고는 상당히 심각하고 경건하군요.
이것도 자기합리화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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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인생이나 기타에게 화나거나 우울할 때
차라리 욕을 한다면 청자에겐 남을지 몰라도
그 기분이나 음성은 허공에 흩어져 자취조차 남을 일 없어지지만

꽁하니 하나하나 기록에 남겨놓는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니어라.
사람의 기록과 글이라는 것이 묘한 존재라.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철자에 묻어서 언제 읽어봐도
당시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니
사람의 앞에서 말 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집요하기는 더한 것이다.

어느 누군가의 집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참으로 고고하니 며느리에게 다정다감하니 사셨더란다
참으로 슬퍼하며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에
시아버지의 수첩이 덜컥하니 나왔다지

며느리, 궁금하여 아버님의 유품이라 생각하고 열어볼 제
......
XX년 X월 X일, 며느리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홀겼다.
XX년 X월 X일, 며느리가 식탁에서 큰 소리를 내었다.
XX년 X월 X일....

년도와 월일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는 시아버지의
[원성]이 들어있더라는 것이다.
그 며느리, 순간 모골이 송연하여 말도 못하고
가슴이 벌렁벌렁하여 진정이 되지 않았다는데

글이라는게 양날의 칼과 같아서
차라리 말로 소리내어 말한 것만 못한 경우도 생기고
어떨 때는 욕을 면전에서 먹는 것보다 더 심한 상처를 주고받기까지 하니
삼가고 삼갈 노릇이다.

반면에 오래 둔 기억속에 남겨둔 연서라면
그것 또한 당시의 감정이 유치하건 상큼하건 남아있을 터.

배우자에게만 들키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이먹어 꺼내 볼 시 늘그막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겠건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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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으면 졸리다는 이 불변의 생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일이 많건
일이 없건

風過而竹不留聲 雁去而潭不留影
풍과이죽불류성 안거이담불류영
바람이 지나가면 대나무를 소리를 내지 않고
기러기가 날아가면 연못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결국은 스스로가 모자란 일이더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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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수련장 2009. 3. 29. 00:17
내가 20년, 혹은 30년 후에 살아있다면
분명 지금 내린 결정들을 후회하거나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들인 것들을 반추하며
과거의 나에게 조소를 보내고 있을 거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 중에
후대까지 영향을 줄만한 결정은 이미
20대 초반에 다 끝나버리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늘 지금 내리는 결정들이
인생에 커다란 전환기를 가져올 거라고 늘 전전긍긍하지.

별거 없단 말이다.

차라리 버스 뒷꽁무니에 입을 벌리고 다이옥신을 받아먹는게
인생에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거다.

별 의미를 두지 말자고.
살다보면 늘 욕심이 일어난다.
참된 것의 소망인지
헛된 망상의 허영인지는
시간이 가르쳐 주는 법.

4월은 그냥 앞에 놓인 것부터
차곡차곡 치워버리면서 살기로
다시금 재다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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