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08.12.17 아침먹고 저녁먹고 2
  2. 2008.12.14 삶이라는 것은 3
  3. 2008.12.12 노(努)와 운(運)에 대하여 3
  4. 2008.12.10 知心 7
  5. 2008.12.04 떳떳한 사람 누구 있으랴 4
  6. 2008.11.30 늘 주의하면서 사는 생각. 하지만 늘 힘든 생각
  7. 2008.11.28 내가 글을 몰랐다면 5
  8. 2008.11.23 와각지쟁(蝸角之爭) 6
  9. 2008.11.20 어찌어찌 하다보면
  10. 2008.11.19 LIE

아침먹고 저녁먹고

수련장 2008. 12. 17. 16:57
선방의 고승 하나에게 제자가 도를 물었다
"어찌해야 도를 닦을 수 있습니까"
고승 왈
"아침 먹고 점심먹고 저녁 먹고 잔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에 대한 내용인데 과연 그러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충 밥을 먹고 아주 짧은 기도를 하고 시작해서
점심은 대충 사 먹고 저녁까지 일하다가
저녁은 대충 먹고 짧은 기도로 잠을 잔다.

요즘 삶을 축약하자면 저렇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가? 전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전에는 그러한 생활이 굉장히 버거웠고, 뭔가 불만이 가득했는데
요즘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빨래가 밀리면 빨래를 하고 접시가 놓이면 설거지를 하고
방에 먼지가 쌓이면 청소를 한다

다시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잔다
그래도 하루24시간이 꽉 차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가급적이면 줄인다.
그리고 필요한 것만 생각한다.
닥칠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지만
예전처럼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는다.

나를 속이고 남을 버겁게 하는 짓을 피하고
무엇보다 나에 대해서 보다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냥 좀 여유롭다.

이러다 머리숱도 별로 없는데 다 밀어버리고
산방에나 들어앉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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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것은

수련장 2008. 12. 14. 22:39
죽을 때나 얼굴을 빼꼼히 비칠 지 모르는 [가능성]과
매일 나를 기만하는 [희망]이

작당하고 하루하루 내 생명의 종지부를 연기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집나간 고양이만큼이나 기별없는 [행복]을 기다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사채업자만큼이나 끈질긴 [절망]이 나갈거라고 믿는

뭐랄까

투입대비 산출량의 비율에 따르면
대기업에선 애초에 기획 입안조차 하지 않을 비효율의 극치인 존재정도?

그래도 하루하루
신기루에 빠져 살고
무지개 저 너머에 보물이 묻혀있을 거라고 믿으며
나는 스스로가 흑기사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또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는

뭐랄까
뭐랄까

그걸 뭐라고 할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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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쪽이 막힌다고 죽을 필요는 없다. 작으나마 한 쪽은 뚫려 있으니.
하지만 그것을 내 힘과 내 분으로 찾을 수 있느냐 아니면 운이냐는
정말 미묘하고도 어려운 문제다.
겐세이가 뭔말이냐 삑사리가 있음일세 라는 말도 있고
타짜도 운빨앞에서는 고박을 당한다는 말고 있듯이

분명히
설명불가하고 논리적으로 실증될 수 없는
운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삶이 풀려가는 사람들은 숱하게 봐 왔다.
전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는 쪽으로 풀려가는 이들도 봤고
엄청나게 지독하게 승부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야말로 혹독하게 사람을 내치는 것도 보았으니
이는 참으로 뭐라 설명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솔직히 난 지금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다만
뭔가 모를 괴상한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마음가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반대급부적으로 드는 심리상태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뭔가 길조가 나타난다면
이것은 행운인가? 아니면 또 다른 노력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인가?

어쨌건 알 수 없다.
그냥 열심히 살 밖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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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心

수련장 2008. 12. 10. 00:19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데 타인의 마음 속을 어떻게 들여본단 말인가.
세상에 퍼진 책 중 [독심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늘 의문을 갖곤 한다.
과연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학문처럼 정형화 될 수 있는 부분인가. 마음이라 함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한 곳에 일정히 머무르지 아니하고 천변만화하는 것과 같은데 그것을 어찌 계량화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또한 지속적으로 책이 나오는 것을 보니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인 모양이다.

멜깁슨이 나왔던 [왓 위민 원트]에 보면 어쩌다 여성의 마음을 읽게 된 광고업자가 (이 자식, 광고쟁이라니) 아주 희희낙락하게 사람들을 갖고 노는 장면이 나오는데 (솔직히 갖고 논거다. 결국은 해피엔딩 아닌가) 그런 장면 조차도 어찌 보면 마초스러운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순간에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 쥐었다 폈다 하다가 자기 원하는데로 사람들을 이끌고 맘에 드는 여자하고도 자고 어쩌구 하다 나중에 좀 징징 짜고 해피엔딩.
될 법한 소리냐?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무조건 시간이다. 그게 기본이다. 그리고 무욕(無慾)이다.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방향으로 그 사람을 보기 때문이며, 그 안에서 행동하고 판단하고 재고 자르고 씩둑깍둑하다가 그냥 혼자 쓰레기통에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내팽개치는 거다. 정작 그 사람은 나에게 해꼬지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보기 싫고 짜증나고 피하고 싶고 마주치기 싫고 미워 죽겠다면 누가 문제인 것인가? 마음속의 나에게 힐난을 퍼부어야 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사랑보다는 우정이고 애정보다는 신의를 우선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음이 그 첫째요. 항상 볼 필요가 없어도 마음이 변치 않음이 그 두번째요, 마지막은 내가 무욕으로 대하니 그 사람의 마음을 더 진실하게 읽을 수 있음이 세번째다. 어느 날 과거의 언제인가 사랑에 취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오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랑하던 연인이 아니라 코찔찔이 고등학교 동창들이거나 동네 선후배였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면구스러움이라는 것은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사람이 늙으면 정으로 버틴다 했건만 또 하나 잡자면 우정으로 버티는 것 아닌가 싶다. 부부도 오래 되면 친구가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이가 되는 것은 신의에 의한 욕망의 벗어던짐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신뢰와 우정인 것이 아닐까.
 
가끔 건너편 도로에 서 있는 친구를 보면서 손을 들면서 웃으면 그 친구도 나를 보면서 웃는 경험을 한다.
"거지같은 놈 왜 웃고 지랄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손을 흔드는 이 아무도 없듯이 내 인생도 그런 순간의 경험으로 충일하게 나머지가 꽉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나이에 필요한 것은 끝까지 같이 가 줄 친구 아닌가 싶다.
솔직히 지금은 외롭지만 내가 찾는 건은 짝 잃은 외기러기가 아닌 듯 하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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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리저리 [죄]라는 것을 짓는다.
종교적인 담화로써의 문제가 아닌, 말 그대로 현실상황에서의 죄.
내가 어설프게 굴었던 행동으로.
내가 무심코 내뱉었던 말로
어쩌면 내가 아무 느낌없이 노려본 시선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받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괴로와하거나 화를 냈을테지

다 [죄]아니랴.

사람은 원래 가냘프고 여리고 깨지기 쉬운 존재들일 뿐인데
누구는 허세를 부리고, 누구는 응석을 부릴 뿐.

어쩌면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고
타인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누가 떳떳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떳떳하지 못하다.

빠삐옹의 앙리 샤리에르는 꿈에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세상을 경홀히 보며 시간을 허비한 죄]

13번째 전사에서 이븐 파할란은 이렇게 기도한다
[ 생각해야 했으되 생각하지 않은 모든 것,
  말해야 했으되 말하지 않은 모든 것.
  행해야 했으되 행하지 않은 모든것을 용서하소서]

깡패만 세상의 밝은 빛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나는 밝은 곳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르지. 원래 천성이 그러했으니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굴 원망하고 탓하랴. 세상은 어차피 시궁창에 가깝고 인간은 선(善)보다는 한없는 악(惡)에 더 가깝게 물들기 쉬운 존재다.
타는 불꽃을 향해 눈이 멀어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읽으면서 괴로운 글이고 쓰면서도 괴로운 글이다.
타인에게 이런 글을 보여주는 것 역시 죄가 아닐까 싶다.

누가 하늘 아래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까보냐마는

참으로 괴롭구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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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혼자 자취하면서 살 때

늘 혼자 중얼거리던 원칙이 있었다.

[화났을 때 결정하지 마라
 즐거울 때 결정하지 마라
 한번 보고 결정하지 마라]

늘 저것 때문에 나는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고생을 한다.

나이가 좀 더 먹으면 일희일비하는 것이 좀 줄어들 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성격은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닌 걸 안다.

매일 깨지는 원칙이긴 하다.
하지만 어저다가도 저 생각이 날 때가 있고
그러면 그 순간이라도 머리가 좀 차가와지는 경헙을 하는데

아무래도 꽤나 오랜 시간동안 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듯 싶다.

나는 내가 부족한 걸 대충은 알고
내 결정이 그리 믿을만 하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늘 신중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최소한 한 번 사는 인생에 실패는 하더라도 오링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중하고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살아야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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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뭘 쓰거나 그린다.
남들처럼 술을 잘 먹지도못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풀지도 않는다.
술을 먹으면 심화만 쌓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생각이 증폭되어버린다.

언젠가부터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 재학중에는 4년 내내 일기를 썼다.
(지금 보니까 여자들 이야기밖에 없더라. 하기야 그 때 뭐 다른 생각 있었겠나.)

언젠가부터 혼자 책상에 처박혀서 글을 쓰고 있는거다. 인터넷으로 쓰던가 다른 매체를 동원해서 쓰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혼자 만화를 그리거나 이런 식이다.

글을 몰랐다면 뭘 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대한민국에서 글을 모른다는 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니까. 하지만 다른 남미 어느 부족같은 곳에서라면 뭘 하고 있었을까?
아무도 없는 밀림에 들어가서 나무가지나 부러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글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가진 생각을 반의 반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빈 곳에 기호화시켜서 옮길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수 있지 않은가. 문자가 없었다면 인간의 사고는 퇴보했을게다.
기호를 시각화해서 그것에 일정한 사유의 대표성을 부여하여 기호의 조합으로 하여금 일정패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누리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거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것이 과연 기호가 내포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글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한다.
사랑합니다.
뭘?
내가 지금 사랑한다고 한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감정이라는것은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안에 섞여 있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과 기복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사랑한다는 말이 계량화된다면 100%  [사랑한다]는 말에 적합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10%도 안되는 감정이 있지만 그것을 [사랑한다]는 말로 쓸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알래스카 에스키모가 100개가 넘는 [눈(雪)]에 대한 호칭이 있다지만 분명 100개만으로는 존재를 규정짓기 힘든 눈이 존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은 인간의 가진 정신상태를 100%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역할도 할 가능성이 있다.

무엇인가들을 쓴다는 과정은 그러한 의미의 오차과정을 축소시키고지속적으로 개인의 감성을 확장시키고 단련시켜서 그때그때 시의적절한 말을 찾아내어 필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타자에게 오해없이 이해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필자의 감정을 타인에게 옮길 정도의 능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완성이며 나중에 궁극적으로 발전하면 내가 쓴 글을 읽고 타인에게서 내가 느낌 감정 이상의 고양을 일으켜서 행동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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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질없는 짓거리임 아니랴
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당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혼자서 감내하지만 어떤 경우는 혼자가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여의치 않다면 다시 걸음은 제자리도 돌아가는게다.
인간은 칠정육욕을 스스로가 조절할 수 없는 불완(不完)의 존재이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에 동승하고 편승해주기만을 바란다. 특히나 그가 힘들고 무언가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고독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정치(政治)가 생긴다. 편을 가르고 남을 끌어들이고 급기야는 개인의 투쟁이 집단의 투쟁으로 바뀌면서 그 안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는 일이다. 그 때에는 오직 증폭된 감정과 감정에 맞게 개선된 대의명분의 힘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눈 뜨고 뒤로 물러서서 한숨을 쉬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저 중에 누가 너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고지옥에 같이 가 주겠는가? 그것은 또한 다른 일이다. 세상에 자신의 처지를 힐난하는 자라 해도 막상 종당에는 같이 지옥에 가줄 이도 있는 법이고 옆에서 기운을 북돋아준다해도 그가 나와 함께 인생을 걸거라는 희망 또한 아침이슬 같은 법이다. 사람에게서 기대를 하는 것은 초급이고 초급에서 시작하는 일은 하류의 일이 되기 십상인데 어찌하려 지나간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서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하며 달팽이 뿔 위에서 논쟁하는 것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천하에 사람이 없어 십리를 가고 천리를 가도 내 몸을 의탁할 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처한 일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천리이고 순리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러한 내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인생의 종막까지라도 같이 하리다 맹세해 준다면 그것이 기연(奇緣)이고 받아들이기힘든 축복일텐데 너무나도 쉽게 세상살이에 더불어 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가볍다. 

세상 일의 팔할은 뜬 구름같아 눈을 감고 한 잠 청해보면 어느샌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는 것을 느끼는데 굳이 그것에 얽매여 개인의 세운 뜻을 뒤섞을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그것이 옳으면 그만이다. 천하에 많은 이들이 모두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평탄대로를 백발이 되도록 걸어가며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험로에 홀로 던져진 채 남들보다 힘들게 길을 걸어가는 일 뿐이다. 인생의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인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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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보면

수련장 2008. 11. 20. 17:38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에 있어서 도량이 넒어질 수도 있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득달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인데

사실,
그 문제 얼마나 심각한지 경미한지에 대해서 개개인이 모를 경우가 훨씬 많다.
제3자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경우가 훨씬 정확할 때가 많은데
문제는 그 사람이 본 것은 내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수도 있다.

미네르바가 쓴 글이 뭐시라 하는 정부나
IMF전날까지도 끄덕업다고 껄덕대던 새대갈 영삼선생이나
지금의 나나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미생지신(尾信)이니 송양지인(宋襄之仁)이니 하며 비웃어도 정작 내가 앞가림을 못하면 스스로의 얼굴에 침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계속 깨어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인 것을.

그러나~
인간은 늘 나약하고 유한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인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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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

수련장 2008. 11. 19. 17:20
무언가 진실을 말하면 어그러질 것 같은 상황이 존재한다
시간을 더 벌면 해결이 가능하고 한술 더 떠 거짓말을 하면 내게 이익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공공선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인가?

진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쓰디쓰고 결과가 안 좋고
한 번의 거짓으로 그 결과를 영원히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연히 볼 필요도 없이 거짓말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두 가지의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생각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즉각적으로 거짓말을 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악한 사람이어서라기 보다 상황판단을 즉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또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거짓을 선택한다. 굼뜨기보다는 [진실말을 말한다]라는 것이 체화된 유형이다.
누굴 좋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이 적재적소에 있지 못하면 낭패를 볼 뿐.

솔직히 거짓이라는 것이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는 세상.
어찌보면 세상을 제3자의 눈으로 보느냐 내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참이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은
내가 내 눈으로 봤을 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 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진실이 냉혹하다는 것은 그냥 세상이 흘러가도록 봐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참도 거짓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종교인들은 Credo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일임하고 거기에 도덕율을 맞춘다.
일반인들은 자연법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일임하거나 자신의 철학에 도덕율을 맞춘다.
만약 두 집단 사이에서 참과 거짓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상대방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도덕율을 포기하고 거짓말을 선으로 포장해서 할 수 있는가?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고 다 그러하다.
파고들어가면 곤란해져버릴 일이지만 늘 무언가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고.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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