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08.11.17 벌써 월요일 2
  2. 2008.11.15 선비처럼 살고 싶었다 3
  3. 2008.11.10 종교적 담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의 끄트머리 3
  4. 2008.11.04 마음 4
  5. 2008.11.02 장판이 찢어지다 2
  6. 2008.10.30 뭘 하든 머리를 쓴다 2
  7. 2008.10.30 쓴다쓴다 2
  8. 2008.10.23 Boxing 2
  9. 2008.10.22 windows 2
  10. 2008.10.21 누구나 사람을 씹는다

벌써 월요일

수련장 2008. 11. 17. 01:22
취생몽사하는 것도 아닌데 훌쩍 시간은 지나가서 벌써 월요일이 되었네
그러고 보면 사람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뜬구름처럼 쉽게 시야에서 잊혀지는 것인데
그 짧은 시간동안 슬퍼하며 기뻐하며 그리워하며 토라지며 화를 내며 사는 것 또한 우습구나.

이 짧은 시간동안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으면 병이 들고 사람을 건사하지 않으면 외로워지고 일을 하지 않으면 굶게 되며 용기를 내지 않으면 얻지를 못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더 짧은 시간 내에 미련해 지는 것이 사람이니 정말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무언가로 채워지지 않는 한 사람은 늘 결핍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결핍을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또한 사람은지치고 슬퍼지고 그로 인해 생에대해 회의감을 갖게 되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 누군가 아는 지인이 말했지만 현상유지라는 말은 정말 가공할만큼 의미심장한 이야기라. 늙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없고 명민함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인데 현상유지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의 절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이들고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줄어든다. 단지 돈만이 시간과 노력에 관게없이 들쑥날쑥할 뿐. 바꿔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돈은 시간의 법칙이나 자연의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 극히 불가해한 존재일 뿐이다.

요즘 부모님이 잠이 부쩍 줄고 눈이 어두컴컴해 지셨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내가 봤을 때는 충분히 밝은 조명 아래서도 뭔가 어둡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그게 인생이랄까.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아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구나.
벌써 11월도 중순으로 넘어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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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한 이야기지만 저게 내 목표다.

가슴에 십자가를 걸던 손목에 염주를 걸던 그것이야 다른 이야기지만

내 목표는 언제부터인가 [선비처럼 사는 것]이었다.

오직 진실만을 좆고 진실되게 살고 진실만을 후대에게 이야기해주겠다
그게 내 희망이고 지금도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이라는 말이 있다.
조조가 공자의 후손인 북해태수 공융을 죽일 때 군사들이 집에 들어와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을 때 공융의 작은 두 자식에게 하인들이 도망가라 했더니 어린 것들이 바둑을 두면서 말하길
[둥지가 뒤집히는데 알이 무사하리?]라고 하면서 태연히 바둑을 두다가 목이 잘렸다는 것이다.
나는 저 이야기를 반추해 볼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공융이 정치적인 감각은 떨어져도
아비가 가정에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보여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사의 협기가 없다면 선비의 기개라도 갖고 있어야 인간이라고 할 것인데
어찌하여 요즘 이 나라에는 장사치의 얄팍한 눈가림외에는 없는 모양이다.
네모도 세모고 동그라미도 세모라고 하는 떄에 나라도 깨어 있고 싶은게 소망이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닌가.

수신이 안 되니 제가도 안되는 것이다.

최근들어 느끼는 것이지만 스스로가 아직 한없이 부족한데 무슨 치국평천하 운운할 도리와 자격이 있을꼬.
정말 오래오래 살아야 사람이 되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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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백이나 첨언을 하자면, 나는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거의 가풍처럼 기독교를 믿고 있는 집안이다.한 세대 30년이라고 치면 대충 내가 믿는 시간까지만 해도 중첩되는 기간을 제하면 짧게는 50년이고 길게는 70년이상 되는 기간동안 한 가정의 정신적인 dogma로 존재해 오는 것인데 실제적으로 이것에서 오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불어 나도 이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한 도덕적 규례나 개인적인 가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서 내 행동양식도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성향을 빌려보면 나는 오히려 불교쪽에 더 가깝다. 선(禪)에 더욱 가까운 양식이 내 개인적인 사고방식이고 내면에 침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그 핵심적인 사안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아니지, 오히려 그 core는 180도 다를 수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종교적 방식에 있어서는 두 종교의 수련법이나 깨닫는 과정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아직 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돈오점수나 성령의 체험과 성경의 묵상이 한자와 한글의 체험일 뿐, 인간이 느끼는 것은 같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절대자와 인간개인의 수련이라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진여를 깨닫느냐 아니면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존재함을 불현듯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막말로, 내가 어늘 불가적인 수행을 하다가 본래면목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세상을 창조주가 만들었고 구세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천둥에 머리를 돌리듯 깨달았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구원의 감격인가 아니면 불교적인 득도의 경지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기독교의 성경에 써 있는 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면 적이지 절대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육체저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악다구니 같은 돈지랄의 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이번 주 로또 맞게 해주세요]따위의 기도를 줄기차게 뻑적지근한 교회에 앉아서 드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말릴 수 있으랴? 나도 가끔 먹고살기 힘드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절박성 기도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기독교와 상충되는 사회 안에서 상충되는 가치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 봤자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은 점점 탈세속화 되어간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산문의 한가함을 느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산속 도량에서 독경을 하는 것이나 스스로의 욕심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신이나 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진대. 그래서 중세시대에 수도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불어 이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모든 종교의 끝은 결국 시장으로 나와서 도를 설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정토종을 만들 때 그러했듯이 도가 도에 이르면 그 끝은 사람들에게 나서서 도를 잇는 길이 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뭔 차이가 있겠는가. 전도 찌라시 돌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닌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는가.

아아 살면 살수록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이고 종교에 관련된 생각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글로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종교적인 실타래가 꼬여있는데 과연 이것이 죽을 때까지 다 풀릴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번쩍하고 귀가 들리고 눈이 트이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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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련장 2008. 11. 4. 15:41
[심두멸각하면 화염도 자량이라] 고  혜림사의 지주 쾌천화상이 말하였다.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는 말인데 원래 쾌천의 말이 아니라 당나라 두순학의 말이다.
하지만 정작 실천에 옮긴 것은 쾌천화상. 일본말로 카이텐 화상인데 이 양반은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풍림화산으로 유명한 다케다신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문제는 다케다가 오다 가에게 발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가 다케다의 영지로 쳐들어와서 다케다의 영지를 유린했다는 거다. 혜림사의 카이텐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랬더니 노부타다가 절에다 불을 놨다나.

불타는 산문에 정좌해서 타 죽어가면서 외쳤다는 마지막 사자후가 [심두멸각 화염자량]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
오, 젠장. 그 이야기를 아래에서 불 놓던 오다가의 군사들이 듣고 얼마나 섬찟했을까.

나도 평지풍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부도옹처럼 살고 싶다만.
다 이것이 마음의 고집멸도를 버리고 마음의 본래면목을 찾아 떠나는 수행의 첫 발자국 아니겠는가
상구보리 하화중생해야 반본환원하는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인이 왜 불법을 쓰고 있나.
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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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이 찢어지다

수련장 2008. 11. 2. 15:26
식탁의자를 뒤로 미는 순간 의자가 평소와 다르게 강한 마찰감이 의자다리를 지탱하는 것을 느끼고 의자를 치운 뒤 부엌바닥을 살펴보았다.  마치 송곳으로 파 놓은 것 처럼 밑바닥이 여기저기 패여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부러 이런 경우를 방지하고자 의자에 천으로 자리보호대까지 씌어놓은 상태였는데. 재빨리 의자를 뒤집어 보았다. 천보호대는 뻥 뚫어져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 앉으면 바닥와 접촉하는 부분은 늘 일정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넝마조각처럼 한 군데가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뭔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보호대를 벗겨내자 플라스틱 밑받침이 톡하도 두조각이 난 채로 떨어져나왔다. 원래 의자를 만들 때 나무를 보호하기 이해서 말굽의 편자처럼 아랫쪽에 대 놓은 바둑돌만한 원형의 플라스틱이었다. 그런데 그게 두갈래로 쪼개진 것이었다. 다시 의자 다리를 살펴보니 그곳에는 플라스틱을 끼워넣기 위해 박아넣은 못이 끝이 삐죽히 나온 채 발바닥의 가시처럼 의자 다리 빝바닥에 존재하고 있었다. 저녀석이었다, 우리 집 부엌을 다 파헤쳐 놓은 녀석이.

망치 못뽑이로 간단하게 제거하고 쪼개진 플라스틱은 버린 채 다시 보호대를 씌웠다. 이제서야 밀리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부엌바닥은 회생불가능한 상처를 남겼고 참으로 보기흉하고 상태도 안 좋은 결과만을 가져왔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다면 세심하게 한번씩 살펴보고 무슨 문제인지 봤어야 했던 것이다. 의자를 보호해주려던 프라스틱이 쪼개지면서 오히려 거기 달려있던 못이 마루를 죄다 파헤쳐 놓는다니. 그리고 그것을 막아야 했던 천보호대가 범인을 숨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니. 처음에 하나가 잘못 되기 시작하자 모든 선의로 포장되었던 것들이 뒤틀려 악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의자를 함부로 관리한 내 잘못이 더 큰 노릇이다. 못이 솔직히 무슨 잘못인가. 그 아이는 애초에 직공이 만들었고 의도했던 대로 그 자리에 꽉 박혀있기만 했을 뿐인것을.

사소한 부주의 하나로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나는 소소하지만 그런 경험을 많이 해 봤고 가끔은 네가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사태가 되어서 나를 덮치는 경험도 몇 번 해 보았다. 황망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을 지내고 그 뒤 자숙의 시간을 거친 뒤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생활에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면서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것이 전적으로 내 개인의 잘못이라면 몰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제3자의 사소한 실수 덕에 일어나는 사고라면 나는 그 때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살면서 두가지를 대비해야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사고를 처음에 막아낼 수 있는 주의력과 조심성을 갖고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처를 감내하면서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이다. 전자가 항상 가능하다면 후자는 불필요한 노파심에 불과하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상 인생에는 후자가 더 많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마루바닥에 파인 생채기들을 본다. 이리저리 무두질하고 대충이나마 처리를 하면 지금처럼 울퉁불퉁거리지는 않겠지만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감출 수는 없는 일. 아마 저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사는 것이 인생일게다. 하지만 마루에 더 이상 상처를 내지는 말아야겠다. 아직도 마루를 쓸 일은 너무나도 많고 부엌의 의자에 앉아야 하는 것은 내가 생명체로 살아가는 이상 어쩔수 없는 필연적 선택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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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안 쓰는 놈은 죽을 때까지 맞는다"

복싱관장이 다른 관원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난 것.

세상에 머리 안 쓰는 일은 하나도 없다.
반대로 어딜 가도 머리를 안 쓰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만큼 손과 발이 힘들 뿐.

몸으로 하는 운동같은 경우도 머리를 써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 맞서서 해야 하는 투기종목인 경우는
머리 뿐 아니라 반사신경도 좋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참 고달픈 일인 것이다.
돈 내고 몸 쓰고 생각까지 하는 일을 배운다니.

요즘 같아서는 머리가 멍하다.
생각이 딱 정지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건
몇 달 내에 일어났던 개인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내가 생각을 회피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중이다.

뭐가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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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쓴다

수련장 2008. 10. 30. 13:26
하루에 뭐라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건 문제다
하다못해 일상생활이라도 끄적이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가 없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술을 먹거나 한다면 아마도 이 욕구는 줄어들겠지만
어차피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주목적이 아니라 잠시동안 무언가 빠져있어야 할 거리를 찾는 것에 불과하니 영속적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천재적인 문재의 소유자라서 쓰는 족족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쓰는거다. 왜 쓰는지에 대한 이유목적에 대한 고찰도 없고 책임도 없고 그냥 글을 올리고 또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올리고 또 올리는 거다.

영화 샤이닝에서 잭이 미친듯이 하루종일 타자기만 두들기는데 나중에 마누라가 그걸보고 이 놈이 맛갔구나 하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그런 식으로라도 뭔가를 써 내야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압박감이라기 보다는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피곤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변했던가 히키코모리로 변했던가 뭐 그런 거겠지. 동물이라도 키워볼까? 그런데 아마 그 놈에 대한 불만이나 애정에 대해서 다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바귀려는 의지가 있지 않는 한. 하지만 이게 뭐 그렇게 나쁜 짓 같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계속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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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ing

수련장 2008. 10. 23. 22:48
솔직히 복싱을 하게 된 이유는 검도 때문이다.

검도를 하게 된 이유는 경당의 18기 민족무예를 배우던 때문이었다.

맨 처음에 한국 민족무예라는 18기 경당을 배우게 되었는데 (말이 민족무예지 이거 조선후기 병졸들의 기본전투병략이다. 말하자면 총검술 연무16개동작, K-2사격및 분해 같은 일이다. 쌍수도 편곤 제독검 말이 멋있어서 그렇지 당시 알보병들의 전투병과 아닌가...생각해 보면 나도 밀리터리 오타쿠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ㅠ.ㅠ)
문제는 내가 들어갔을 당시가 무예도보통지를 기초로 처음으로 도해를 해석하던 시기였다. 무술의 체계가 확실히 잡혀있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민족무예라는 것도 생성과 발달이 있는 것이고 발전을 거듭하다보면 고급무술의 형태를 띄게 된다. 현재 양생술과 무공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 기천문같은 경우도 초창기에는 그냥 활인체조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거나 시작은 그렇게 되어서 내 키만한 목검을 휘두르며 캠퍼스를 누볐는데...

문제는 그 정도 크기의 목검을 휘두르려면 근력도 근력이지만 무게중심의 이동이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난 애초에 운동하고 담 쌓은 인간인걸 어찌하란 말인가. 일단 무게중심을 재빨리 옮길 수 있는 무술을 배워야 이걸 익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근접단병중에서는 그래도 최고의 실효성을 자랑하는 대한검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내가 무슨 무술고수같다. 난 운동신경  지수가 제로에 한없이 수렴하는 사람이다.)

그곳에서 7년을 수련했다. 7년동안 초단땄다.
정말 끝내주는 성취율이고, 만약 이게 고시생활이었다면 때려치고도 남을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좋다고 연일 계속되는 대련에서 줄창 얻어터지면서도 배웠다.

7년이면 검도 어느정도 맛을 알게 된 때였지만
그때부터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일단 칼은 격자길이에 들어가서 때리는 것이 중요하고 그 길이 내에서 승부가 벌어진다.
문제는 그 간격이 좁혀지는 경우. 코등이 싸움이나 일촌의 거리에서 벌이는 타격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칼이 내 수중에 없다면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디 공사장처럼 파이프와 각목이 즐비한 동네에서 악당과 마주치지 않은 담에야
내가 매일 작대기 하나라도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방 안에 3단봉 하나 정도는 가지고 다녔지만 창졸간에 어떻게 빼서 싸운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내 고민을 더욱 심화시켜 준 건
이번 2008년의 촛불시위였다.
민중의 곰팡이새끼들이 시민들을 방패로 찍어누르는데
시민들은 우산들었다고 잡아가고 검문검색을 강화하더라는 거다.

내가 간디도 아니고, 활로를 뚫으려면 일단 뭐든지 막는거 때려 부수던가 몸 하나는 보신해야 하는데
신문지 둘둘 만 것도 잡아가는 판국에 어떻게 뭘 들고 다니란 말인가.

그래서 선택한 것이 복싱이었다.

원래 모든 무예의 처음은 백타에서 시작한다. 백타란 순수한 주먹과 발의 수련으로 권법수련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내가 이 동네에서 사학비권을 익힐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장 비슷하고 체계적인 복싱을 배워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석달 째다.
나이 서른이 중반이 넘어간 나이에 원투 스트레이트 훅 어퍼를 하고 앉아있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이다.
사람 패려고 태어난 운명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이런 쪽에 집착하는 걸까?

아마 운동을 하면서 중요한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몸으로 배우는 것은 성실하게 꾸준히 정확하게 가르쳐 준대로만 하면
투자한 만큼 분명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몸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거울 보면서 섀도우복싱을 혼자 몇라운드씩 뛰는 모습이 되겠지.
누군가는 그걸 한심하게 뒤에서 지켜볼 지언정 아마 난 미친놈처럼 좋아하며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살아가는데 수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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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수련장 2008. 10. 22. 16:47
두개의 동공으로 난 세계를 보는데
과연 3번째 눈이라는 것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
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과 의견을 공고히 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죄악이 될 수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객관적인 사태에 대한 의견피력이 가능한 것인지

전능한 3번째의 눈을 갖지 않고서도 그게 인간으로써 가능한 지경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3번째 눈이 100%관조적이라고 3자에게
설명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어느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지식인]이라 지칭함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닌
한쪽의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과연 그것이 [중립성을 보장받는 타자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지니는 것]을
궁극의 시작점으로 여기는 현재의 [지식인]들에게도 통용되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도연명처럼
협기에 따라 행동하고 나중에 자연으로 도피하는 삶의 양식이
맞는 것인지.

불편부당함을 꿈꾸지만 인간의 한계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라.

아직까지도 잘 알 수 없는.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인 딜레마.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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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친한 이와 하는 것은 뒷다마라 하고
모르는 이에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비방이라고들 한다.

전자는 개인의 신세한탄이라면
후자는 관련자에 대한 복수 내지는 파탄을 의도하는 법일진대

-.-a 뭐, 어쩌겠는가.
요즘같은 시대에는
내가 친하다 하여도 남에겐 비방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보기엔 비방인데 뒷다마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세상이니.

받아들이는 사람 그릇 나름이고
나중에 불어닥칠 댓가에 대해서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겠지.

그래서 나오는 결론은

자기 그릇을 키울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가진 도량을
넘쳐 흐를만 한 일들이 산적해 있는 법이니.
다 이것도 수업료 내면서 하는 경험일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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