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09.07.23 남명과 칼 7
  2. 2009.07.22 좋은 글 7
  3. 2009.07.07 새벽에 2
  4. 2009.06.29 wish 2
  5. 2009.06.25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9
  6. 2009.06.23 sometimes 4
  7. 2009.06.16 자문자답 2
  8. 2009.06.15 가말리엘의 변 2
  9. 2009.06.10 진일보 8
  10. 2009.06.09 6월 9일 6

남명과 칼

수련장 2009. 7. 23. 22:57
1.
남명 조식이라고...

합천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거유가 계셨다.
원래 이 합천땅이 삼국시절부터  괜찮은 땅이었는데
어쩌다 육지쭈꾸미 전대갈 덕에 완전히 이미지 똥칠한 곳이라.

하여간 그 양반이 주장한게 남명학파.
마음은 경(敬)으로 다스리고, 밖으로는 의(義)를 표하는 것이 도(道)라고 하여
실천궁행이 최고의 덕목이라 하였다. 행하지 않는 선비는 죽은 선비라는 것이다.

이 양반은 선비 복색에 
허리춤에 칼을 차고
쇠방울을 하나 달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서슬퍼런 칼을 보고 반성하고
방울소리 들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겠다는 의지였다.
퇴계 이황과 맞먹는다는 견식을 가진 분이었지만
절대 앉아서 책만 보는 선비는 아니었던 게다.

이런 스승 밑에서 배운 제자들이
개호주지 강아지일까.
그의 제자들 중 태반은 임진란때 의병장으로 나가서 죽는다.
나머지는 광해군 때 정권을 잡고 탈 성리학적인 정치를 하다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고.

호사가들은 그러더라.
실천을 중시하는 남명학파가 경상도에 건재하게 남아있었으면
조선의 마지막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2.
[칼]이라.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다.
진검을 허리에 차 보면
두가지 생각이 든다.
[뽑아야 한다]와 [뽑지 말아야 한다]

칼을 뽑으면 두가지 생각이 든다.
[벤다] 와 [베지 않는다]

하지만 벨 때는 무조건 무념이다.
생각이 있어선 안 된다.

머리로 뭔가 생각하면
날이 물체에 박혀버리고 잘리지도 않는다.
그냥 몸과 손과 칼이 하나가 되서 날려야
제대로 잘린다.
기검체가 하나가 되면 통나무도 베게 되지만
생각이 분산되면 짚단에도 박히는게 칼이다.

3.
요즘 이런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어제그제오늘.
참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수련이 미치지 못함이고
스스로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려니.

그냥 허리에 찬 것 만으로도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경지까지는 못 가도
스스로 깨닫을 정도는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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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수련장 2009. 7. 22. 14:56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맞는 말이야

좋은 글이 유려한 명문이라는 게 아니다.

가슴에 다가오는 글이 좋은 글이다.

냉철한 이성을 가졌더라도

내내 자기정당화에 변명만 지껄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한 줄로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각인시키는 글도 있다.

사람은

타인을 보듬지 못하면 결국 이기적인 야수인 게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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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수련장 2009. 7. 7. 07:37
대부분 곤궁에 빠진 처지를 가져오는 것은
주변환경에 의한 제어 불가능한 상황보다
나 자신의 미숙함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곤 한다.

사람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감정적인 동물이다.

그런데 이미 깨닫고 나면
상황이 종료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보통은 안 좋은 상황,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종료되는 게 문제지만.

가끔은
정신을 주변상황에서 놓아버리고
무념무상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느낀다.

민감한 말과 반응과 행동들이
내 오감을 자극할 때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아무 생각하지 않는
그런 수련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구우일모(九牛一毛)같은 소소한 일인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날카롭고 예리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정작 필요할 때는 무뎌지고
쓸모 없을 때는 상처를 낸다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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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h

수련장 2009. 6. 29. 16:26
굴러가는 돌멩이와 떨어지는 낙엽에서 신의 현현을 볼 경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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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과 부대끼고 사는 곳에는 늘 갈등이 있는데

가끔은 말이 씨가되고 묘목이 되는 경우도 참 많더라.

이 나라 떠나면 그런 꼴 안 보려나 해도

사람이라는 개체가 원래 그런 습속을 타고 나는지

어딜 가든 좋지않은 이야기 듣는 것은 다반사다.

명심보감에 그러하였다.

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하되 : 서로 아는 이가 세상에 많이 있으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酒食兄弟 千個有(주식형제천개유)로되 : 밥 먹고 술 같이 하는 이 천 명이 있어도

急難之朋 一個無 (급난지붕 일개무) : 급하고 어려울 때 도와줄 이 없는 법이라

 

不結子花 休要種 (부결자화 휴요종)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無義之朋 不可交(무의지붕 불가교): 의리 없는 친구는 벗하지 말라


어딜가나 모함하는 이가 끊이질 않고 험담하는 이 끊이질 않는다.

어쩔때는
정말 내 행로와 신상에 위난을 줄만큼 모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는 일조차 생긴다.
그럴 때 필요한 게 가족이고, 가족이 멀다면 의지할 수 있는 벗이다.

예전부터 인용하던 싯구 중에 루드야드 키플링의 "The Thousandth man"이라는 시가 있었다.

Nine nundred and ninety-nine depend
On what the world sees in you,
But the Thousandth man will stand your friend
With the whole round world agin you.


999명이 세상이 보듯 널 대하여도
마지막 천번째 사람은
모두가 등을 돌려도 네 친구로 남으리

어쩔 때는 그러한 벗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과, 법과, 논리적인 정황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끝까지 친구라는 이름 하나로 등을 빌려 줄 친구가 있다면
그것으로 그 삶은 무언가 이룬 것이다.
물론, 요즘같은 법치사회에서 저것은
협객지정(俠客之情)이다.

그래도 가끔은
그런게 그리워 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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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수련장 2009. 6. 23. 01:52
가끔
세상의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급격하게 회전해서
하나의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뭔가 특별한 결말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어떤 특별한 삶의 전환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런 느낌이 올 때가 있는 것이다.

권투도장 관장이 누누히 이야기하던 게 생각난다.
샌드백을 칠 때
샌드백을 치는 게 아니라
샌드백 너머를 치는 기분으로 주먹을 내뻗으라고.

차안의 세계를 넘어서
피안의 세계를 넘나드는 고찰인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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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자답

수련장 2009. 6. 16. 14:33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하고 엄정하게 구느냐에 따라서
남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아무리 냉정하게 판단하는 정력(整力)이 있다 한들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단지 그것은 내 삶에 대한 방패가 되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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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의 변

수련장 2009. 6. 15. 11:02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인간이 나온다.

예수의 제자도 아닌 주제에 꽤 많이 등장한다.

이 양반은 유대 랍비일파의 가장 큰 일문중 하나인 [힐렐 학파]의 한 사람이자
위대한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

사실 예수님이나 기독교의 전파에는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란 이야기다.
그냥 유대교의 학식있는 스승이지.

그런데 이 양반, 학문에 있어서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를 꿰어맞춘 바울을 가르친 사람인데다
논리적으로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得道한 자가 얻을 수 있는 智의 탈한계]에 달한 사람 같다는 생각.

사도행전 5장 30절 하반부부터 나오는 이 양반의 말은 그런 이야기다.
기독교가 이단이네 전파하지 말아야 하네 하는 공의회 사람들을 한큐에 보내버리는 말을 하는데
"사람의 소관에서 난 것이면 크게 일어났다가도 사라지려니와 하나님의 일이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니 그냥 냅두라"

어찌보면 이현령비현령식의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퇴계 이황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으니
뭔가 지식이나 수련에 극에 달하면
스스로 알지 못하여도 마음의 결정함이 바람에 물결이 쓸리듯 순리를 따라서 행하게 되는 모양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생각하는게
"내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소서"아닌가?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텐데.

알면 알수록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것이 이쪽 공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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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보

수련장 2009. 6. 10. 23:47


갑자기 관장이 샌드백을 치는데 다가왔다.
별 말 않더니 미트를 꺼낸다.

"원투쓰리포 해 봐라."
"이번엔 원투훅"
"양훅어퍼"

갑자기 시작되어 몇가지 바리에이션을 고작 십분정도 하는 동안
몸은 흠뻑 젖어버렸다.

"니 마이 좋아졌다. 처음하곤 딴판이네"

숨이 차서 감사함다하는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다.
관장은 일언반구 말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거리고 다시 총총.

21세기에 이런 무협지에나 나올 것 같은 교습이 어디있나
돈 냈으면 낸 만큼 충실히 꼬치꼬치 자세교정을 해 주는게 트랜드 아닌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본동작만 가르쳐 주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몸에 붙었다 싶을 때 다음 것을 이야기해주는 관장.

그런데 난 이런게 맞는 모양이다.
철저한 아날로그적인 가르침. 교습이라기보다는 수행에 가까운 행동.

누군가가 내 속마음을 찍으면 세피아톤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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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 지 벌써 9개월여가 되어간다.
보통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 같았으면 이미 3개월여에 다 마스터했을 내용을
아직까지 끌고가고 있다.
난 운동신경이 지극히 안 좋다. 성취속도도 하염없이 느리다.
몸으로 때우는 것이 신체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예진작에 포기했어야
하지만 난 최소한 [투기]쪽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듯 하다.

[남들만큼 못하면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요령피지 않는다.]로.

연애건,일이건 비전 없는 일에는 한 큐에 들어갔다 빠지는 내 성격하고
전혀 반대의 일을 이쪽 분야에서만 하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

예전에도 썼지만
몸은 input을 넣어주면...output을 정확하게 내 놓는다.
들어간 만큼의 효과를 보여준다. 시간을 헛되이 쓴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불확실의 시대에 이만큼 정직하고 충실한 것은 없다.
대련을 해서 손도 못 쓰고 깨졌다 해도 죽어라 시간을 들여 파다보면
다음 대련때는 훨씬 나아진다.

세상에 뭐 그런 게 있나?
연애를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뭐 나아지나?
사업을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나?
[불확실성을 구축하는 시간의 투자]가 가능한 종목은 따지고 보면 세상에 거의 없다.

"니 마이 좋아졌다."
라는 말은

내 경우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찬사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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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수련장 2009. 6. 9. 12:08
1.
찻잔속의 태풍이 찻잔을 벗어나 동네를 뒤엎을지도 모르겠구나

2.
1번이 정리되면
정말 칩거하고 당분간 블로깅 외에는 의사소통의 창구를 없앨 예정.

3.
레베르테의 [검의 대가]에서처럼
보수적인 사람은
그만의 집에 칩거해 그 안에서 먼지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만 존중받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나오면 뒤통수를 맞는 것이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4.
그동안의 삶이 미몽이었더냐
지난 6개월이 미몽이었더냐
아니면 모두가 미몽이었더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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