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커플이니 브란젤리나니 하던 두 명의 배우가 별거하기로 합의를 한 모양이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 하니
별 다른 부연의 말을 쓸 것이 없다. 실제로 요즘 세태가 그러하다. 글 쓰는 나도 그렇고...사는 건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다.

두 외국 연예인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연애하는 감정은 3년이면 사라짐이라고.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수학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XXX이나 000이나 3년 살면 같아보인다]고.
긍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를 일이다.

 3년이 지났는데도 에로스적인 사랑만을 가지고 두 사람의 만남이 존속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사람이라는 동물이 주야장천 불타는 욕망의 화신도 아니고 그러지야 않겠지.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일정량의 특성만을 규정짓는 단어로 좁혀지는 요즘 작태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3년기한의 사랑]이라는 건 할리퀸 로맨스에나 나오는 [욕정의 소산]일 뿐인 게고...내가 아는 사랑이란 적어도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중용과 예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자인야(仁者人也)라. 
어짊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어질 인자란 사람 인(人)자에 두 이(二)자가 붙은 글자. 
옛 성리학자들은 인자인야를 "어짊은 사람을 사람답게 여김"이라 풀이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인자인야를 이렇게 풀이한다. "어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仁)의 근본은 사단의 측은지심인 바, 사람을 보고 마음에서 불쌍히 여김이 있고 그를 긍휼히 여김이 있는 것이
곧 인의 발로이니. 대충 결과론적으로 풀이해보면 사랑이 측은지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연속극보면 가끔 주인공이 애인에게 
"동정따윈 필요없어"라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 상처받은 이의 자존심을 제한다면 동정심이라는 것은 고귀한 감정의 발로인 것이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감정 중 하나다. 그리고 내 생각엔 인간이라는 동물이 보이는 가장 이타적인 행위가 동정심이라는 거다. 막말로, 걱정해 준다고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자식은 없지만 
부모가 자식을 내려다보면서 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기쁜 것 뿐 아니라 뭔가 가슴이 먹먹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 것이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이 정도다...-.-;;)  

살면서 얼마나 많이 측은지심을 느끼는가. 가족에게 느끼지 않는가. 친구들에게도 느끼고, 연인에게도 느끼고, 가끔 여유가 생기면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도 느끼지 않나. 누가 시켜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특출나게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사랑하기에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자식간에만 있는 것도 아니요, 친구나 애인이나 형제자매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만물에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고갱이. 하지만 너무 쉽게 하위개념으로 치부해 버리는 정(情). 바로 그것 아닐까? 

우리가 쓰는 정이라는 말이야말로 측은지심과 인자인야가 같이 들어가 있는 [사랑]이라는 말의 진화형 아닐지.

아,

먼나라에 아무 상관없는 빵선생과 졸리양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갈겨 쓴
이론적 토대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개똥철학 한 토막.
 
p.s 1) 정이 아무리 고결해도 금(金)이 요즘은 그것보다 귀한 것 같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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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으로 일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차가운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면 별로 전망도 없고 가능성도 별반 없는 일이긴 해도
사람이 어찌 머리로만 살 수 있으랴. 심장이 뛰어서 피를 전신으로 돌리는데.

가끔은 모든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일의 성사와는 관계없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란투석,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진다는 보장이 백만분의 하나라면
투입분의 산출량으로 봤을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희망이라는 것과 갈망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란을 던져야 하는 나만이 갖는 이유가 있다면
충분히 모든 산술적 수치를 뛰어넘어서 계란을 바위에 던질 수 있는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제 3자가 보기엔 그것을 우행(遇行)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바란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으랴.
그것이 쾌(快)하다면야.

모든 계란은 바위를 뚫을 수 없을 것이지만
어느 계란은 바위를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사람의 심정 아니랴.

가끔은 확률을 뛰어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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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은 순간순간 선택인 듯 한데
그 순간 무엇을 골라야하는 지 정말 힘들다.

첫번째는
내가 객관적으로 나를 벗어나서 그 상황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선택의 순간은 늘 급작스런 사건이나 외부의 상황덕에
감정의 급박한 변화를 겪으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두가지 상황이 모두 쉽게 일어나고
두가지 다 현명한 결론을 일으키는데 지난한 장애물이다.

첫번째를 하려고 한다면
머리를 차갑게 비우고 게으름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인지해야 하고, 미래를 인지해야 한다. 

두번째는 평정심을 가지고 첫번째로 돌아가야 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정작 닥치면 어버버버
그래서 세번째 필요한 것은 여유로움 인 듯 하다.

음식이건 그림이던 글이던
잔손질이 많이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는 지를 아는 타이밍 아닐까.

죽 나열해 보니
냉철함과 평정심과 여유로움과 시기를 놓치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제대로 된 결정을 한다는 이야긴데

내가 제갈공명도 아니고 참 지난한 일이네그려.
언제쯤 되면 시기에 맞춰서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순리대로 결정하되 옳은 일을 골라서 할 수 있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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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병

수련장 2009. 11. 30. 22:21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불분명해지고 있는데 정작 나는 휩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빠져나오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쓸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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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카페

수련장 2009. 11. 4. 22:50
호젓한 저녁에 불현듯 충동이 일어 집 근처의 커피집에 들어갔다. 아마 이 곳은 이 동네에 유일한 커피집일 것이다. 지하철역도 조막만하고 모든 곳이 아파트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동네는 20년도 더 된 옛 건물들과 상가로 인해 커피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역 근처의 작은 이 커피하우스만이 커피를 앉아 먹을만한 곳이다.

예전에 이곳은 다른 사람의 아지트였고, 나는 그곳을 알아도 지나치기만 했을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가 들르지 않음을 알기에 내가 그곳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전혀 예상과 다르게 커피집을 꾸려나가는 이는 앳되보이는 아가씨 둘이였으며, 생각보다도 훨씬 건물은 작았고
작기에 추운 날 쉽게 훈훈해졌으며 커피는 그런데로 먹을만 하였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 수록 들르는 횟수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이 곳은 전에 내가 움직이는 동선이나 여정에 자리매김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젠 내가 움직이는 방향과 동선에 넣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고, 새로운 것들로 인해 전에 있던 것이 물러나고 새롭게 채워진다.

삶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일 뿐이다.
사회구성원으로 있는 나는 언제든 빠져나가더라도, 누군가 내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나라는 것은
다수에 비하면 늘 미미하며 내가 아무리 큰 존재로 매김지어진다 하더라도 내가 비면 그 자리는 절대로
내게 영속되지 아니한다.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텅 빈 공허함으로 삶을 비워둘 수가 없다.
무언가 빠져나가면 새로운 것이 들어와 마음을 채우고, 빈 공간을 점유한다. 색즉시공이라 하더라도
빈 마음은 깨달음이 채울 것이다. 우리같은 범인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늘 새로운 것들이 빠져나간 것을 
대신 채운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직업이건 간에.

스스로가 무력하고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교만일수도 있다. 이 순간도 우리는 뭔가를 채우고 있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좋지 않은 것을 기억에서 내몰려고 애쓴다. 누구에게라도 인생은 충만하다. 단지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고 있지 못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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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내려가야 하나 올라가야 하나 갈등을 하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뭔가 안온하고 평안한 보금자리가 아래 펼쳐져 있거나 그만 올라가는 게 낫다고 느낀다면
거기서 아래를 보고 방향을 잡을 것이고

밑바닥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더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답은 나와있는데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까닭은

아마 겁나서 혹은 귀찮아서.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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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교양으로 조선후기사를 듣던 시절의 일이다. 
교수님이 쉬는 시간에 그냥 흘러가는 농담조로 이야기하시던 말이다.

당시 풍속화가중 양대 거두 중 하나였던 혜원 신윤복은
풍속화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요청에 의해 [춘화]도 꽤 그렸다.
그리고 일설 재야 사학가들에게 전해지기로는
그 신윤복이 남긴 [미공개 춘화집]이 아직도 유실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아마 이후락이에게 있다고 하던데......'
교수님의 말은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버렸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을 법 하다는 대충의 [뜬 구름잡는 소리]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법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락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유물중에는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가 그린 작품들도
끼어 있는 것이 확인된 바 있으니. 

호가호위로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그를 이용해 사람이 탐할 수 있는 것은 다 탐하던 양반이
말년에 병을 얻어 방에서 거동도 못하다가 재산을 다 거덜내고 죽었다고 한다. 이후락. 그가 죽었다.

남은 것은 어디있는 지 조차 모르는 고미술품이 아니라 그의 더럽고 치사한 찌꺼기같은 이름뿐이다.
이후락이.
어느 당을 지지하는 양반이건 어른들은 그를 저렇게 불렀다. 이후락이.

살아서 먹고 마시고 싸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랴.
생각을 하건 음악을 듣건 무엇을 쓰건 내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싸고 마시는 것 외엔 없다.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싸고 마시려다 남겨진 것은 지저분한 이름밖에 안 남는 인생으로 팔십객을 보낸
노욕의 덩어리가 이제 썩어 문드려져서 강산으로 돌아간다.

나라고 다를손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성경에 그랬거니와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하고 여로역여전하다고 금강경에도 써 있으니

다 부질없음 아닌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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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

요즘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씁쓸하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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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면 족하고 둘이면 축복이고 셋이면 은혜로운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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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펼쳐 놓은 책을 읽지 않아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펼쳐 놓은 책을 읽으면 뭔가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읽으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읽지 않고 그냥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도 그만이다.

어찌되었던 나는 나고
시간은 흐르고
인생은 내가 아는 바 대로 흘러가지 못하며
내가 아는 것은 극히 미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쳐놓는 것은
아쉬움이거나
미몽이거나.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정말 추리고 추린 몇 가지는
내 일생을 통해서 평생 같이 흘러가게 되는 중요한 것이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것 중에
참으로 많은 것들이
오랫동안 나와 함께 머무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내 손에 소중하게 꼭 움켜쥐고 있는 보석인지
아니면 발에 채이는 조약돌인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죽은 뒤에 누군가 내 손을 펴 보면
그 속에 조약돌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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