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10.05.08 2cm 2
  2. 2010.05.06 어느 날, 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날
  3. 2010.04.15 아는만큼 2
  4. 2010.04.11 하나나 둘이나 셋이나 하나나 2
  5. 2010.03.24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2
  6. 2010.03.20 샌드백
  7. 2010.03.12 계영배(戒盈杯) 4
  8. 2010.02.25 게으름에 대한 소고 2
  9. 2010.02.17 궁즉악(窮卽惡) 2
  10. 2010.02.11 할 일을 찾아 걸어간다는 것은 6

2cm

수련장 2010. 5. 8. 22:17
한 두 주 전쯤부터 일어난 일이다.

샌드백을 치는데 갑자기 너클파트에 찌릿찌릿 거리는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글러브와 밴디지를 풀고 손을 살펴봤는데 시뻘겋기만 할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샌드백을 치기만 하면 너클파트가 아픈거다.
그것도 오른손도 아닌 왼손이.
복싱에서 왼잽을 못 쓰면 탄창없는 총이나 마찬가지다. 
가만히 보니까 뼈가 아니라 힘줄이 아프더라.

이것이 선수들이 잘 걸린다는 건초염인가!
아, 이것으로 내 찬란하지도 않았던 선수복싱생활도 이제 끝인..어쩌구 이런 상념을 하고 있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혼자 아픈 걸 감내해가며 주먹질을 해 대고 있었다.
검도 할 때는 족저근막염에 관절통까지 있었으니 복싱도 꾸준히 하다보면 통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라는 무대포 근성도 끼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시일이 지나도 아픔이 줄어들 지 않더라.

'아, 진짜 몸 상해서 운동 관두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으면 관둬야지.

그때였나. 내 오른손하고 왼손하고 글러브를 낀 손을 비교해 본게.
다른 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엄지의 놓인 자리.
너클파트를 만들어 쥘 때 왼손 엄지가 오른엄지보다 덜 들어가서 중지가 아닌 검지에 끝이 닿아있었다.
다시 꽉 말아쥐고 잽을 쳐 봤다. 통증이 없었다.
엄지를 정확히 말아쥐서 손가락 4개를 가드해주지 못하니까 검지가 뒤로 밀리는 거고
검지관절 인대가 힘을 무리하게 받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좀더 엄지를 깊게 밀어쥐고 때리는 것.

아마 내가
무식하게 계속 같은 방식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으면
타자를 치고 있는 지금 어디 통증외과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그 순간, 두 손을 비교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 손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걸 바꾸자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맨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는 아프지 않았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정확하게 교범대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자 운동을 내 몸에 맞추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것마져 느슨해 진 것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1-2cm의 관절위치때문에 고통이 왔다. 실제적으로 관절이 돌아가는 범위는 1cm도 안 될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

사람은 초심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가
초심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맨 처음 각오를 변화시킨 만큼 움직이고 있는가
둘 다 안 된다면
다시 모든 걸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인생이란 어디서든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일지도.



p.s) 관장님한테 왜 안 물어봤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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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소유물들이 다 내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내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 모두 나를 떠나간다. 벌거숭이인 육신조차 언젠가는 날 떠나간다.
늑탈당하고 침식당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와하고 내가 가진 소유를 움켜쥐지 못함을 괴로와한다.
별별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인생의 의의를 찾는다고 하지만 결국엔,
[내가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인생의 간명한 요약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 놓을 수 밖에 없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그리고 외부의 힘과 영향에 의해서.

동서양의 수많은 예화들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니오베나 성경의 욥이나 동양의 한단지몽이 다 그 이야기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만하고 자고하지만 그것이 사라질 때 한없이 무력해지고 비참해진다.
스스로가 가진 주체성과 관계없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유물론적 사고에 종속되어서?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전술한 바, [인생의 의의]를 잃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은 불탄 자기 시체에서 살아나는 불사조처럼 분연히 일어나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깨닫는 오도송을 지었지만 범인에게 그것이 가당한가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느 날, 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날에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고 있을 것인가?
지금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있는 상태다. 그만큼 무력감도 많이 느낄 터이다. 
하지만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전부라고 할 만큼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질 때가 되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잿더미에서 부활하는 피닉스처럼 살아날 수 있는 개인적인 수양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암울하게 남은 잔생을 물어뜯으면서 살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절망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인가?

다가오지 않아서 모르지만 
상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법이다.
대비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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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만큼

수련장 2010. 4. 15. 23:45
사람이건 사물이건 지식이건
딱 아는 만큼만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원하는 노력이 없으면
더 이상 알게 되기도 힘들다.

지식의 습득, 관계의 발전
모든 것은 나이나 학력에 무관하며
사람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호기심에서 출발하고
호기심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 가운데 과정에서 무언가 얻던가 깨닫던가
아니면 그르던가를 판단하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은
속단과 게으름이며
종당에는 스스로의 굴레에서 만든 편견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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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본물에 무슨 차이가 있겠냐만
대하는 내 태도가 차이를 부르는 바,

기러기 날아가는 걸 보고 가을임을 깨달으면
세상을 읽는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지나가는 당나귀에게 길을 묻는 건
병신이나 하는 짓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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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족하면 예절을 안다고 옛 어른들이 말하셨다.

확대해서 말하면
요족하고 품위가 생기면 사람의 거동과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아까 본 드라마 [추노]에서도 그런 말이 있더라
[양반 상놈은 거죽이라고, 좋은 옷 입은 놈 중 상놈 없고 떨어진 옷 입은 놈 중 양반 없다]고.

사람들은 그래서
두른 것으로 사람을 재고
가진 것으로 사람을 재고
누리는 것으로 사람을 재고
든 것으로 사람을 잰다.

나도 그러하고 내 글을 읽는 사람도 그러하다만.

사람을 알고 같이 가는 시간을 1-2년 아니라 평생을 본다면
사람의 거죽 속은 절대 변하는 법이 없더라.
물론 가진 게 없고 굶주려 사람이 자신없고 비굴해지는 경우도 있고
누리는 게 많아져서 여유가 생기고 관대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속의 천성은 바뀔래야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바뀐다고 혹자는 이야기 하더라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갈고 닦거나 모은 것들로 장식된 것들이다.
지식을 갈고 닦으면 명민해지고 침착해 질 것이요
돈을 모았으면 경륜이 생기고 사람을 대할 줄 알게 되겠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말한다면
천하 근본을 오시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어려움은 같이 하나 복락을 같이 누리지 못하는 이]가 있고
[복락은 같이 하나 어려움을 같이 못하는 이]가 있다 한 옛 고사는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또한 그것이 사람이 갈고 닦아서 만들어낸 [성품]을 벗어난
[천성]을 이야기함을 또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놓고 보면
어찌 절망스럽지 아니한가

내가 스스로 부족함을 내가 가장 잘 아는 데
그것이 변치않는다 생각하면 어찌 잠을 자겠는가.
[나는 스스로 이러하니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고 말할 자가
과연 이 세상에 누구이며, 그러고 어찌 세상을 살리오.

그래서 천성은 변치 않으나
성품을 닦아서 보(保)한다. 
천성의 훌륭함을 키우고 부족함을 메꾼다.
그것이 옛 유자(儒者)들의 평생 과업이었다.

사실 내 믿는 종교가 별반 다르지 않다.
천성의 악함을 알고 신앙으로 극복한다.
신성과 인성이 합일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평생에 가능하다 아무도 속단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아니하고
내가 드리는 노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바뀌었다 스스로 자고할 수 없는 것이니
거울을 들여다보면 난 예전의 나와 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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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백

수련장 2010. 3. 20. 03:48
확실히 무언가 속에서 불이 이글이글 타 오를때는 주먹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
공연히 주먹에 힘만 실려서 뼈랑 힘줄을 다치기 십상이다.
화가 날 때에는 함부로 속단하지 말고 쉽게 몸을 쓰지도 말아야 한다.
몸이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내가 다치기 더 쉽다. 상처도 더 많이 나고.

차라리 마음이 허탄한 것이 더 낫다.
온전히 집중이 가능하다. 물론 머리 쓰는 일이야 다른 이야기지만
몸을 놀리는 것에 있어서는 화난 것보다 훨씬 잡념이 적다.
그도 그럴 것이, 화냄이라는 것은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찬 상태이고
수만가지의 잡상이 분노라는 감정속에서 이리저리 분출됨을 뜻할 것이다.
오히려 허탈하고 어이없을때는 별 생각이 나지 않으니 근육의 움직임에
헛동작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을 비움과 낙망함은 종이한장 차이다.
그 상태에서 조금 더 좌절해버리면 아예 몸이 움직이는 것조차 슬프다.
그래서 사람은 바라는 것을 줄이고, 스스로를 자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념무상] 근처라도 구경해 볼까 싶은거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바램이 없고
자존심만 있고 자괴감 없는 사람만 있겠는가. 

다 훈련일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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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戒盈杯)

수련장 2010. 3. 12. 23:20
조상들의 술잔 중에 계영배(戒盈杯)라 하는 술잔이 있다. 익히 최인호의 소설 [상도]로 유명해진 술잔이다.
잔의 7할 이상 술을 부으면 압력에 의해 아래 뚫린 구멍으로 술이 다 새어나가버린다. 끝까지 채우면 모든 것을 잃지만 요족함을 알면 그대로 머무는 술잔이다.

전설에 따르면 우명옥이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도공이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고 만들어낸 술잔이라 한다. 세사의 명성과 부를 잃은 뒤에 만들었던 술잔.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절제의 미덕을 깨달았다한다. 사람은 대저 그러한가,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무언가 부족함을 깨닫는 것인가.

하지만 인간의 성정이라는 것은 항구하지 못하다. 처음에 교만하여 나중에 도를 깨우친다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욕망은 저절로 생겨나 커지는 법이며, 처음에는 소소하고 겸손하게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의 애초 부족함에 갈등하여 더 큰 욕심을 채우도록 발전하는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후자에 속하는 듯 하다. 처음 시작의 마음가짐은 소소하고 질박하더라도 계속되면 그 안에서 복락을 누릴 줄 알았으나 그것이 부서지고 좌절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차라리 이럴 바엔 사람이 욕심을 내고 예전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야함이 아니겠는가'하는 악받침 혹은 분노로 인한 욕망에 눈이 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애초에 10할을 채우지 못하고도 잔이 비었으면 한 번 10할을 채워보려 도전함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비루한 이야기다.
[전도서]를 쓴 유대의 왕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향락을 누려보고서야 모든 것이 덧없음을 깨달았지만
애초에 모든 것을 갖지 않고서도 그것이 쓸모없음을 알았던 법정스님같은 분 또한 존재한다. 둘 다 시작은 달랐지만
결국 도달한 곳은 같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한 성경의 말씀도 그것이며 집을 멸하여야 도를 얻는다는 불가의 말씀또한 그러하다. 사람은 늘 자신을 하루하루 죽여야만 스스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받을만한 말이 아님 또한 어찌 가슴아픈 것이 아니랴.

나는 오늘도 무언가 얻기를 갈구하고, 그것이 어제보다 낫기를 희망하고, 타인의 동정과 긍휼로 얻는 것이 아닌 자력과 소망함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기를 희망하지만 내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오늘도 바라본다.
사람은 스스로 갖지 못함에 절망하고,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절망하며, 변하지 아니하는 시간에 절망한다.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을 절망하고 자책하고 더 많은 것을 잃고, 잃을 수 없는 환경, 잃을 것이 없다 믿는 상황에서 또 다른 것을 잃고 또 잃어 나 자신조차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 가서야 나는 깨달음의 파편 하나를 줏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술잔에 술이 덜 채워지고 더 채워짐에 미련을 두지않을 것이요
어쩌면 술잔에 술이 담긴 것 조차 알 지 못하는 경우가 오지 않으리오.
죽기 전에나 한 번 그런 명경지수의 마음을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나
그 또한 내 욕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슬한 밤 가슴이 시리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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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동물은 무모하다. 
지상의 모든 생명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인간은 자신의 안분자족이 삶의 원동력보다 앞설 수 있는 생물이다. 하루에 2/3를 자는 나무늘보도 자신의 생존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안위책이 있다지만 사람은 게으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의 생을 불확실한 미래에 던져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옛 중세에는 나태함을 죄악이라고 규정지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은 현재 순간의 안락함이 보장된다면 미래를 기꺼이 포기할 정도의 게으름을 누구나 지니고 있다. 좀더 눈자 좀더 자자 하면 빈궁이 도적처럼 들어온다고 써 있는 성경의 말도 여기서 연유할 것이며, 지역사회를 괴상한 신정합일정치단체로 만든 칼뱅역시 이런 것을 생각하고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맞다. 게으름은 죄다.

참으로 모순적인 이야기지만 게으름을 이겨내는 것은 욕망이다.
어찌보면 세상을 더 황폐하게 만들어내는데 일조하는 욕망의 강인함에 의해 인간은 게으름을 극복한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나태함보다는 불학실한 미래를 위한 치열함에 모든 것을 건다. 궁극적으로는 언제올지 모르는 미래의 나태함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들쑤셔 지피는 것일테지만 실제로 우리들이 오늘도 잠을 자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욕망의 소산이다. 만약 욕심이 없이 치열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인이고 해탈한 자일 것이다.

개인적인 황폐함을 게으름은 가져오고, 어쩌면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황폐함을 욕망은 가져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뭐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게으른 자가 흥할 수도 있고, 욕심넘치는 이가 세상을 부흥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방은 40이 넘도록 길거리에서 건달짓거리를 하다가 중국의 황제가 되었고 덕천가강은 그 욕심만큼이나 탐욕스레 살아서 일본의 안정된 중세를 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반대이다. 게으르면 망하고 욕심이 많으면 주위에 누를 끼친다.

사람이란 그래서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것인데...

이를 누가 알려줄 수 있을까.

좋은 스승 하나 만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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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즉악(窮卽惡)

수련장 2010. 2. 17. 16:50
사람은 유한한 능력을 지녔을테니
언젠가는 힘과 기가 다 해서 사면초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보통있는 절망이야 시간이 지나면 손 툭툭 털고 쓰린가슴 부여잡으면
그냥저냥 대충 잊고 살아갈 수 있다지만
앞이 정말 캄캄할 정도로 삶의 벽에 부딪힌다면
사람 맘 속 깊은데 감춰진 검은 것이 뭉글뭉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른다.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라 하는 성악설을 따른다 해도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 사는 동네에서 그 속내를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정말 어려우면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이 궁해지면 통한다고 하는 궁즉통이라는 옛 말도 있지만
어쩌면 그만큼 악해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희망한다.
즐거움에 빠져 어려웠던 적을 잊지 않기를 희망하며
동시에 너무 지난하게 힘들어
사람의 길이 아닌 명부마도를 걷지 않을 것도 희망한다.

사는 것이란 정말 그 자체로써 수련이고 고행이고
내가 생의 끝까지 인간성을 놓치지 않는 노력의 연속인듯 하다. 
Posted by 荊軻
,
그동안 무언가를 해야 할 일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단 호구지책에 대한 염원 뿐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 매진할 것을 찾고 있었는데
아주 어렴풋이 그 길로 가는 초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쉬운 일도 아니고, 전혀 가 보지 못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뒤돌아 생각컨대, 내 그동안의 짧은 살아온 길에서 내 스스로 정해서 갔던 길 중
끝까지 걸어가서 무언가 성과를 얻어내었다 할 만한 것은 지극히 적고 손에 꼽을만한 것이었다.
그 중 몇몇은 정말 천운이 닿지 않아서 중간에 관둔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내 심기가 불안하고
겁에 질려 도중에 관두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지내온 삶이 앞으로 살 날만큼이나 차 오른 뒤에야
또 다른 길을 하나 또 발견하였다.

늘 새로운 길을 가는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앞이 어둑어둑하고
초행길에 대한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으면 또 가야하는 것이 인생 아닐까.

좀 더 유하게 지난 날을 살펴보면, 그 동안 엎치락 뒤치락 헤메며 걸어왔던 길이
결국 이 길을 가기 위해 둘러왔다 생각해보니 그리 나쁜 여정은 아니었던 셈이다.

비단 이 일뿐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내 삶에는 빈 자리가 많고 그것들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남은 삶일 것이다. 그 동안 두들기고 두들겨서 나름대로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모양을 잡고 오롯하게 남은 것들을 담아낼 시간인 것이다.

안 보이더라도 끝까지 가 봤으면, 그리고 그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얻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내 스스로 먹고 살 일에 대해서도 하루빨리 해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욕심을 하나 더 내 보자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손잡고 같이 갈 이 하나쯤 있어도 좋으리.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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