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술잔 중에 계영배(戒盈杯)라 하는 술잔이 있다. 익히 최인호의 소설 [상도]로 유명해진 술잔이다.
잔의 7할 이상 술을 부으면 압력에 의해 아래 뚫린 구멍으로 술이 다 새어나가버린다. 끝까지 채우면 모든 것을 잃지만 요족함을 알면 그대로 머무는 술잔이다.
전설에 따르면 우명옥이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도공이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고 만들어낸 술잔이라 한다. 세사의 명성과 부를 잃은 뒤에 만들었던 술잔.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절제의 미덕을 깨달았다한다. 사람은 대저 그러한가,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무언가 부족함을 깨닫는 것인가.
하지만 인간의 성정이라는 것은 항구하지 못하다. 처음에 교만하여 나중에 도를 깨우친다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욕망은 저절로 생겨나 커지는 법이며, 처음에는 소소하고 겸손하게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의 애초 부족함에 갈등하여 더 큰 욕심을 채우도록 발전하는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후자에 속하는 듯 하다. 처음 시작의 마음가짐은 소소하고 질박하더라도 계속되면 그 안에서 복락을 누릴 줄 알았으나 그것이 부서지고 좌절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차라리 이럴 바엔 사람이 욕심을 내고 예전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야함이 아니겠는가'하는 악받침 혹은 분노로 인한 욕망에 눈이 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애초에 10할을 채우지 못하고도 잔이 비었으면 한 번 10할을 채워보려 도전함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비루한 이야기다.
[전도서]를 쓴 유대의 왕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향락을 누려보고서야 모든 것이 덧없음을 깨달았지만
애초에 모든 것을 갖지 않고서도 그것이 쓸모없음을 알았던 법정스님같은 분 또한 존재한다. 둘 다 시작은 달랐지만
결국 도달한 곳은 같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한 성경의 말씀도 그것이며 집을 멸하여야 도를 얻는다는 불가의 말씀또한 그러하다. 사람은 늘 자신을 하루하루 죽여야만 스스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받을만한 말이 아님 또한 어찌 가슴아픈 것이 아니랴.
나는 오늘도 무언가 얻기를 갈구하고, 그것이 어제보다 낫기를 희망하고, 타인의 동정과 긍휼로 얻는 것이 아닌 자력과 소망함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기를 희망하지만 내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오늘도 바라본다.
사람은 스스로 갖지 못함에 절망하고,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절망하며, 변하지 아니하는 시간에 절망한다.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을 절망하고 자책하고 더 많은 것을 잃고, 잃을 수 없는 환경, 잃을 것이 없다 믿는 상황에서 또 다른 것을 잃고 또 잃어 나 자신조차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 가서야 나는 깨달음의 파편 하나를 줏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술잔에 술이 덜 채워지고 더 채워짐에 미련을 두지않을 것이요
어쩌면 술잔에 술이 담긴 것 조차 알 지 못하는 경우가 오지 않으리오.
죽기 전에나 한 번 그런 명경지수의 마음을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나
그 또한 내 욕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슬한 밤 가슴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