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장'에 해당되는 글 121건

  1. 2011.01.28 뒤돌아보기 2
  2. 2011.01.02 사람이 초심을 잃었을 때 12
  3. 2010.12.03 사람은 고민이로구나
  4. 2010.11.27 배척
  5. 2010.10.29 공허로 인한 탐심 2
  6. 2010.09.12 인간에 대한 탐구 2
  7. 2010.08.13 구상유취
  8. 2010.07.19 언재호야(焉哉乎也) 2
  9. 2010.07.10 사람은 섬이어야 한다. 5
  10. 2010.07.03 Sin 5

뒤돌아보기

수련장 2011. 1. 28. 02:13
그렇게 오래 살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내 삶의 반은 살아버린 것 같다.
가끔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앞만 보고 달려간다 하더라도 내가 성취해 놓은 것이 미비하다 느끼고, 그동안 투자해 온 인생의 길이 하염업이 길기만 했다고 생각된다면 누구라도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등산을 하다가 뒤를 보면 까마득한 평지가 보인다. 그럴 때는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정상에 올라가면 더 넓은 곳을 보게 되겠지. 하는 심리가 작용할 것이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려다 보기 위해서다. 자기 위에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를 바래서 아닐까.

하지만 인생에서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언가 내 삶이 지쳤거나, 뭔가 잘못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대부분이다. 사실, 삶이라는 것은 등산하고는 천양지차라서 되돌아 내려올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끝까지 가야한다. 가다보면 길이 이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된다. 그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자신에 대한 원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거쳐온 삶들도 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삶이 즐겁다기 보다는 늘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아왔다. 여유라는 것을 늘그막에 누리려고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내는 거라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늘그막에 먹고 살 것이 없기에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여유라는 것은 삶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지금 그래서 이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해 본다. 과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된다면 젊은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냥 하루하루에 매몰되어 살다보면, 그나마 위인전에라도 올라갈 만한 성취가 아닌 담에는 나나 저이나 다를 바 하나 없는 삶일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지금 편하게 있는 것이 훨씬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유를 갖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늙으면 인생은 속도가 더욱 빠르게 붙을 테니까.

그나마 반쯤 왔을 때 이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뒤돌아보는 것이 어느 정도 효험이 있다고 해야하나.

아직 잘 모르겠다.
반이나 살았는데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것.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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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양배추를 끓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2년 전인가 문득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였다.
배추도 국을 끓이는데 더 야들야들한 양배추는 국을 왜 못 끓이겠는가라는 생각이 그 첫번째였고

속을 국물로 덥히되, 가급적이면 비싼 먹거리를 쓰지 말고 질박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보자는게 그 두번째 목표였다. 사실 먹는 일에 그렇게 관심도 흥미도 없었지만 그나마 인생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급은 받아야 할 터,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고른 메뉴였다. 아무런 미련도 없고, 만들다 망해도 그냥 던져버릴만한 최소한의 음식.
그것이 양배추국의 시작이었다.

그런데로 소금도 안 넣고 맨 처음에는 양배추만 끓여먹었다.
그냥 그렇게 먹었다.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끓어서 풀어진 양배추만 먹은 것이다. 밥하고.

근데 솔직히 못 먹겠더라. 그래서 소금을 넣어서 간을 했다.
그런저럭 먹을 만 했다. 묘한 단맛과 짠맛의 조화가 어우러졌다. 
이 정도면 밥에 아무런 집착없이 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는]분야에 있어서는 최적의 음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찬장에 치킨큐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넣어주고 가신 듯 했다. 
치킨큐브가 무엇인가?
맹물에 하나만 던져넣어도 닭국물이 된다는 기적의 향신료 아닌가!
무념무상으로 양배추를 끓이던 어느 날 저녁, 초록색 통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나는 소금 대신 그 놈을 넣어서 간을 해 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풍미가 나기 시작했다. 
고기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양배추국이라니! 오호 은혜로다. 난 참 머리가 좋아. 혼자 이러면서.  

그때는 몰랐더랬다.
그 맛과 향이 지금까지 먹었던 고고한 채식의 아취를 와장창 깨버리고 슬며시 육식의 유혹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걸.

다음날부터 소시지를 잘라서 양배추국에 넣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먹는다는 [사우어 크라프트] 생각이 났달까. 그러다가 집 찬장에서 혼자 외롭게 놀고 있던 스팸을 보고
'거기 혼자놀다간 평생 독신으로 살다 맥주안주 따위밖에 안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그 놈을 배추국에 넣어봤다.
맛이 달랐다. 고기냄새만 풍기는 국물이 아니라 뭔가 씹히기 시작하니 세상이 달랐다.

점점 내 양배추국은 양배추만 들어가는 국이 아니라 잡다한 요소들이 이것저것 첨가되기 시작했다.
몸을 생각해서 마늘을 잘라넣기 시작했고
영양소 균형을 생각해서 감자 한 알을 같이 썰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스팸을 과감히 탈피해 버리고, 어느 순간
소시지계의 끝판왕..미국 [존슨빌 소시지]를 구해다 숭덩숭덩 썰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무념무상으로 국을 끓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내가 만들고 있는 양배추국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청정 초록빛만이 감돌아야 할 냄비 안이 너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았으니

오호라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로다
처음에는 남는 재료가 아까워 넣기 시작하더니
어느순간 부터는 미각을 탐하여 이것저것 채우기 시작했구나
주인공 양배추는 어디 구석에 파묻히고
언제부터 양키쏘세지가 냄비를 나와바리로 접수하였던고.

며칠 뒤
호옹님이 친히 집을 방문하시어
끓고 있던 양배추국을 슬쩍 보시고 뚜겅을 열어 보시고 다시 덮으시면서
조용히 한 말씀을 던지셨다.

"이것은 스튜(stew)입니다."

그렇다. 
더 이상 맑은 물 아래 양배추가 비치는 국이 아닌 스튜가 되었던 것이다.

그저 한 끼니 거르지 않고 넘기며 감사하려고 만든 국이
어느날 밑바닥도 보이지 않는 걸쭉한 고기국물로 변하는 순간.
이제는 예전처럼 만들어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10년은 정말 정신사납게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 중 팔할은 내 욕심과 내 분을 못 이기고 만든 일이었으니.
올 해는 좀 더 신중해 볼까.

한번 넘어서면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국이나 스튜나 인생이나 일반일텐데.

p.s) 다 쓰고 보니 뭔 소린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지금 양배추국을 다시 끓여먹고 오는 길이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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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근심걱정이 제일로 큰 법 아닌가.
근심걱정없이 하루를 지새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작아도 내 걱정은 가슴속의 태산이로다.
남들도 그러하지 않으랴.

함부로 속단하지 말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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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척

수련장 2010. 11. 27. 01:11
사람들이 특정종교나 인종이나  주의주장에 대해 즉각적이고 감성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배척으로 넘어가는 것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이방인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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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로 인한 탐심

수련장 2010. 10. 29. 01:57
사람은 무엇이 비면 그 자리를 채우려고 안달복달을 하는 바

그것을 그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 때가 진정한 구원의 길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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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탐구

수련장 2010. 9. 12. 00:13
예전부터 즐겨 찾던 블로그 중에 마피아의 역사와 형성, 충돌과정에 대해
놀랄만큼 집요하고 자세하게 파헤치던 블로그가 있었다.
거의 논문심사가 아니라 마피아 연대기를 쓰고도 남을만큼의 분량을 연재하던 분이었고
신문에도 자신의 글을 올리던 분이었는데 어느순간 절필을 하셨다.

그의 블로그 마지막 글에 이렇게 글이 남겨져 있었다.

"마피아는 에고의 긍국이었고, 더 이상 에고를 파헤치고 싶지 않다"

그분이 조사했던 글들을 읽어보면, 마피아는 탐욕의 역사였다. 혈연관계던 이익관계던 간에
그것을 지탱해온것은 DNA와 탐욕의 이중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실리부터 미국의 대도시들까지
이어지는 장엄하면서고 읍습한 자기애의 무한한 확장. 어쩌면 그 분은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서양철학자들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지금까지 게속되는 탐구를 하고 있다.
사람이란 욕망의 총아, 하지만 그 사유 깊숙히 인간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계속 알게 되면 그 안에 있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구원할수 있는 이성의 고갱이일까.

나는 개인적인 신앙적인 배경과 협소한 경험에 의거해
부정적인 답변을 도출할 수 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순수함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이 인간을 올바르게 정의하게 될까
두눈을 뜨고도 어지러운 이 세상사에서.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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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유취

수련장 2010. 8. 13. 00:58
사람이건 짐승이건 어린 것에게서는 속세의 냄새가 나지 않고 배내젖의 냄새가 풍겨난다.
하는 짓도 자신만을 위해 살며 보는 눈도 자신만을 위해 움직인다.
어리고 육신이 짧을 때는 또한 그 행함도 작기에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의 지식을 채워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살며 보는 눈도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면
주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고 타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복중 태아를 벗어나 사회에 발을 담그고 산 지 거의 사십여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천품과 시류와 운수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일이니 굳이 이루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속상해 할 일은 없다.

난 해를 끼치며 살지 않았는가
내 행동으로 타인에게 죄를 짓지 않았는가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를 사람이 갚지 못하기에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죄인이라 칭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나 책임지지 않는 잘못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한 터럭이라도 죄책감이 있으면 다행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사람사는 인생이고 내가 살아가는 방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것부터 나는 다시 젖먹이가 된다.

나이를 공으로 먹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지고지순하게 어려운 일인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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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에 나름대로 각 왕조는 뭐 하나씩은 후대에 만들어놨다.
폭군시황의 진나라는 도량형을 통일했고
멍청이 토목군들의 나라 수나라는 대운하를 중국에 파댔으며
당나라는 문화를 완성하고 명나라는 뭘 하고 어쩌구 하여간 뭔가 하나씩은 해 댔다.

죽국 남조의 양나라에서 나온게 천자문이다.
양무제라는 황제가 주흥사에게 명해서 만든 글모음집.

일설에 의하면 양무제가 정해준 데드라인이 달랑 하루였단다.
주흥사가 잘난 척이라도 했던가 아니면 양무제가 아예 악심을 품고 주흥사를 잡으려고 했던 모양.

주흥사는 2996자까지 채록을 해 놓고 마지막 네 글자를 찾지 못해서
빌빌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닭이 울면 입궐을 해야 하는데.
주흥사는 초죽음이 되어서 자신의 모자람을 한탄하고 있는데

홀현히 귀신이 나타나서 焉哉乎也네 글자를 불러주고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삼천자를 맞추었는데....나중에 아침에 확인해보니
흑단같은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새햐얗게 변했다는 것이다.
(공무원 스트레스, 자살..뭐 이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고.)

焉哉乎也(언재호야)는 몽땅 어조사다. 헛말이다. 따로 뜻을 갖는 글이 아니다.
하늘땅 검고 누르다로 시작한 인간천하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삼천자는
마지막 4글자를 모두 허수로 채우고 있다.
허탄한 것이지만 그것이 빠지면 완성이 되지 않는다.

화룡점정도 마찬가지. 도트 하나 빠져서 이륙을 못하는 드래곤이라는 것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뭔가 부족한 것은 정말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하찮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업이건 저술이건
연애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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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이들과 같이 엮이게 된다.
스스로의 신념과 생각을 가지고 헤쳐나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타인의 시선, 타인에 대한 관점, 타인의 이견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선입견과 호불호를 만들어준다. 그러다보면 나는 나 스스로의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된 채 어떤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더욱 두려워 해야 할 일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나 친목집단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나 이익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똘똘 뭉쳐질 때
그것은 개인이 개인에게 갖는 감정 이상으로 무서운 증오심이 되어서 자기와 다른 무리에 대한 보복감을 갖게 된다.

소위 클랜전이 되는 것이랄까.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깨어있다고 말하던 작자들도 뭉치면 개가 되고
자기들끼리의 리그에서 사람들을 왕왕 깨물며 지내다가 종당엔 다른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울부짖음을 선사해서 민폐와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봐 왔고 (그네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선이라고 믿으니 그게 문제겠지만)

나 자신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일에 대한 편견과 알지못하는 사람에대한 조롱과 멸시가 스물스물 자생하는 것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사회적으로 뭉치지만
또한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회를 부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동족살해의 본능을 지닌 동물이다.

그래서 사람은 시간이 남으면
스스로 칩거하고 혼자 스스로를 가두어야 한다.
다른 놈 씹을 생각으로 혼자 으르렁 대는게 아니라
그런 것에서 자유로와 진 다음에
사람들의 유무 이합집산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의견을 가지고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어야 
한 개체로써 완성되는 게 아닐까 한다.


2)
개인적으로 난 기독교인이지만
차후에 누가 될지 모르는 배우자에게 종교를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자식에게도 하물며 그렇다.
종교적 토양을 가진 가정을 만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신을 만나고 안 만나고는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의 단독체험이 있어야 한다.

아빠가 귀잡고 끌고 다니다가 어느날 박수치며 울고 났더니 교회집사가 되었어요 같은 신앙간증도
뭐,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스스로에게 뭔가 할 기회를 줘 보고 싶기도 하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불특정다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하나하나 상관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번에 어머니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다시 교회일을 맡아볼까 생각중이기도 한데.

글쎄.
조금 더 생각을 해 볼 요량이다.
어디까지가 내 결정인지를 알아 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들어서 생각은 많이 하는데
시간은 그에 비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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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

수련장 2010. 7. 3. 02:17
1.
한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짓는 죄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회개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일까.

단순히 인간이 성문으로 정해놓은 죄가 아닌
사람이 사람에게 대할 때 악감정을 가지고 훼방을 놓는
즉,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죄.

어차피 성문법이라는 것은
그러한 죄성을 단죄할 방법이 없기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차선의 타협책일 뿐이다.

죄라는 것은 인간의 형률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2.
죄악은 사라지는 것인가.

최근에 끝낸 게임 [Red Dead Redemption]의 마지막에 보면 그런 대사가 나온다.
내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를 죽인 것이라고.

사람은 절대로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저지를 죄악을 되갚아서 보상할 수 없다.
그 죄악은 그의 삶에 물들어 있고,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한 태피스트리처럼 그의 일생에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설사 모두가 잊고 그 자신이 잊었다 하더라도 삶에 있어서
그 부분은 빨아 지워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것을 몇 년의 시간, 몇 푼의 보상, 이도저도 아니면
그 죄지은 사람의 목숨으로라도 다른 이에게 보상할 수 있을것인가?

없다.

저지른 죄는 절대 어떤 동형의 물건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당시 시간으로 돌아가 사건을 되돌릴 능력이 없는 한.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정의롭다 생각하고
나는 타인들과 생각이 다를 뿐이라고 대답하며
내가 저지른 그릇됨과 내가 저지를 그릇됨에 대해서 떳떳하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신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것까지는 감내하겠지만
스스로가 신이라 생각하는 인간들이 많아지는 세상은 감내하기 힘들다.

죄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그것이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
그리고 인정을 했다 해도 [적법하고 논리적인]방법으로 보상하면 구제된다고 믿는 세상.

내 생각에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세상에 다름 아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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