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짐승이고 육식동물에 가까운 잡식동물이며 기본적으로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능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잠재된 폭력인자들이다. 당연하다. 나 역시 그러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살갗과 살갗이 맞댈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해 본다. 싸움을 절대 즐기진 않지만 본능적인 투쟁성이 있음을 감지하는 나는 스스로의 양면성에 숱하게 당황한다. 내가 당황하는 것은 내가 싸움에대한 본능이 울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는 문명인들에게 익숙한 싸움의 룰이 마뜩찮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주먹지름이 공동체의 복지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법]을 만들었다. 실상이야 통치자의 손쉬운 코풀기에 다름아닌 도구에 불과하나 그것은 싸움을 일대일 이상의 폭력으로 상승시키고 개인적 감정갈등의 차원을 높여 절대기준점 하에서 한 사람의 이성과 자유를 도태시키기에 충분한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도구로 막강하게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공정하고 올바르게 사용된다면야 누구든 환영할 만한 도구겠지만 자고로 이 도구는 함부로 남용되어왔고, 항의하는 자들의 눈과 귀를 도려내는 것에 주로 쓰여왔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법전을 손아귀에 끼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청춘과 시간을 바쳤던 일련의 엘리트들의 무기와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사랑받는 애완동물에 갈음한다. 국가의 기조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이미 관습화 된 지 오래고, 어느 후진국을 가던간에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동방의 이 나라도 마찬가지일진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법]이나 법을 다루고 애용하는 윗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비형평성과 [법위에서 법을 가지고 장난치는 법전 위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는 그대로 다른 사회의 룰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나 친목단체나 상층부의 사람들이 있다. 잘 놀아서 사람들이 많이 붙던지, 뭔가 있어 보이는 지식인들의 집합체라던지. 이도저도 아니면 말빨좋은 인간들이 모이는 그룹이라던지...어딘가에는 늘 권력의 고갱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의 모임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서는 자연스러운 원시공동체적권력이 붙게 된다. 쪽수는 힘이고 달변은 권력이다. 그들은 상대를 설득하기 편하거나 설득할 수 이는 위치를 점한다. 상대적으로 타인들은 그들을 경청하는 형국이 되거나 그들과 분란이 있을 시는 천천히 흡수되거나 등을 돌리고 집단을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서서히 일어나는 권력의 이동현상이야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떠한 이해관계에 있어서 급작스러운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미 기술한 바 대로 사람은 폭력성을 띄고 있다. 대립이 격해지면 감정이 생기고 충돌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문명인들의 충돌은 주먹지름이 아닌 자기변론과 공격이다. 갈등과 갈등의 대립과 충돌 그리고 해체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형적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집단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선형적 내려티브, 구조적 기승전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권력의 집단] 내지 [대다수]의가 갖는 힘에 의해 충돌은 걸러지게 된다. 충돌이 흡수된다는 것이 아니다. 테제와 안티테제의 합이 아닌 안티테제의 소멸을 의도적으로 가져오는 문명인의 싸움방법이다. 아무리 권력층에 덤벼드는 사람의 언변이 좋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권력에 대한 저항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단 쪽수로 밀어붙이거나, 정당성을 넘어서는 현학의 파도가 몰아치거나, 전혀 뜬금없는 유화적 태도와 낯선 의제의 출제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놓게 되는 것이다. 권력자는 피권력자를 철저히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안티테제가 아닌 전혀 다른 이형(異型)의 것]으로 만들어서 엔트로피를 차단한다. 이것이 소위 문명 권력자들이 자신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딴에는 전혀 별다를 것이 없다. 기승전결이나 정반합에 의해 스토리의 서사구조가 이어지는 선형적 내러티브의 권력충돌이나 그런 것 전혀 없이 지식의 폭주나 교화, 뜬금없는 토픽의 나열들로 이어지는 비선형적 내러티브의 권력충돌이나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실상 권력을 현재 쥐고 있는 자가 권력을 소소한 충돌로 내놓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권력의 급작스런 이전을 우리는 [혁명]이라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비선형적내러티브의 가장 큰 문제는 문제 당사자들이 아닌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 관객들의 태도에 있다. 사건발생관계가 명학한 선형적 권력충돌의 스토리는 사건의 당사자 뿐 아니라 사건 주변의 사람들을 몰입시킨다.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한 확연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그 사람의 정치성향이 어떻던 간에 한 쪽의 깃발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감정적인 장치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그에 반해 비선형적 내러티브는 관람자들의 흥미를 날리기 쉬운 방법이다.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건 관심이 없도록 만든다. 유야무야 관심이 증발되어버리게 만들어 종당에는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만든다.

어떤 것이 권력층에 있어서 훨씬 유용한 방법인가?
당연히 비선형적 내러티브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겪고 있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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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중에서

수련장 2009. 6. 2. 22:51

徑路窄處 에 留一步與人行 (경로착처 유일보여인행)이요 

滋味濃的 은 減三分讓人嗜 (자미농적 감삼분양인기)하라.

此是涉世  一極安樂法 (차시섭세 일극안락법)이니라 

좁은 길에서 한쪽으로 비켜 남을 지나가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삼분을 덜어 남에게 맛보게 하라
이것이 세상사 제일 안락하게 사는 방법중 하나라.

*-------*
쉽지 않다.


2) 방금전 들어온 속보를 보니...현직 대통령과 가장 친한 회장의 영장이 기각되었구나.

棲守道德者는 寂寞一時(서수도덕자 적막일시) 
依阿權勢者는 凄凉萬古(의아권세자 처량만고)

達人觀物外之物(달인관물외지물)

思身後之身(사신후지신) 

寧受一時之寂寞(영수일시지적막)

毋取萬古之凄凉(무취만고지처량)

도덕을 지키는 자 일시적으로 적막하나
권세에 의지하고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통달한 이는 사물 밖의 사물을 보며
몸 뒤의 몸을 생각하는 것이니
차라리 일시적으로 적막할 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꼴은 취하지 말라


*------------------*
젊은 이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면
옛 성현의 말이라도 귀를 세우고 듣도록 해라.
육법전서만 외우면 뭣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
아...씨.

나라가 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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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올라온 후배의 글에서도 그랬지만
발달해가는 인간의 삶 속에서
기독교인의 가치체계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영원한 중간자의 삶을 꾸려갈 수 밖에 없음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한쪽 발은 인문학과 인간가치중심의 영향권에 넣어두고
한쪽 발은 신의 현현에 대한 기대와 절대자에 대한 복종의 서원에 넣어둔다.

같은 종교를 믿는 자의 패악에 통감하지만
같은 종교를 비방하는 말에 대해서 역시 다르게 가슴아파한다.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나
급변하는 사회의 상대성에 대해 공감한다.

비신자의 비판에 대해서
몰이해와 광신과 합리적 선택과 절대복종의 사이에서
작은 지푸라기 하나에도 갈등한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이성에 의한 판단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움직이면 좋으련만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절대적인 선(善)의 기준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게 된다면 또한 그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믿고 선이라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절대자의 입장에서 선이 아닐 경우는
어떤 것을 따라야 하는가?

어찌보면 나 개인의 신학을 규정짓는 문제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자 화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날 내가 깨달아
즉심즉불이요 비심비불이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신의 섭리라고
느껴질 때 나는 이 모든 것을 초탈할 수 있으련만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세상이 그렇게 얇지 않은 관계로
늘 고민하고 고민하는데
뭐가 실상인지를 알 수 없는 오성의 한계에 늘 절망한다.

어쩌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어느 쪽에도 온전하게 의탁하지 못한 채로
모든 곳에서 영원한 회색분자로 살아가야 할 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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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물베기라

수련장 2009. 5. 31. 01:18

부부간의 싸움 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싸움도 비슷한 것이다.

의절할 만큼 심각하게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겠는
원산지 불분명의 현직 대통령때문에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칠순 나이의 연배에게
사상을 바꾸라고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 하고 맞다하는 것을
부모 말씀에 순종한다고 바꿀 것인가?

둘 다 난망하다.

논어에 보면 효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께 자하가 물었다.
무엇이 효(孝)입니까?
공자가 답하길 색난이라하였다.

자왈색난(子曰色難).

[항상 얼굴빛을 온화히 하기가 어렵다.]
[대충 안색을 보고 뜻을 살핀다]는 말이다.
효란 항상 얼굴빛을 밝게 부모님을 대하는 일이라는 말 같은데

나이들면 자식하고 부모하고 싸우는 건 당연지사라고 공자님도 여긴 모양이다.

거 참.
그래서 효도라는 걸 옛 선인들은 군자의 덕목에 넣어 둔 모양이다.
사실 가족간의 갈등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 있을까?
그것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부터 인격도야가 시작되는 듯 하다.

어떤 경서를 보던 [효]가 안 빠지는 것이 없으니...


"부모들아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성경구절이 오히려 참신하다는.

p.s 1) 토요일자, 5/30일자 경향신문은
         내가 30년 넘게 본 신문중 거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1면이었다.
         이건 스크랩 해 놓았다가
         나중에 자식에게 주던가, 자식 없으면 조카에게라도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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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수련장 2009. 5. 26. 17:25
생에 한 조각 육신을 메고 끝까지 달려가는 길은 서럽다
한 줄 행복의 허리띠를 둘러맨들
가늘어 오히려 불안하구나

그래도 옷고름 풀어져 벌거숭이로 뛰는 것 보다야
끈 한 올 있는게 더 낫겠다마는

나중에 보니
그나 내나
다 똑같이
손가락이 하얗도록
옷춤을 쥐고
뛰고 있는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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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백억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 능치 못할 일이 없고
내가 수천개의 혀를 가지고 있어 설득치 못할 일이 없으며
내가 수만개의 눈이 있어 꿰뚫지 못 할 일이 있더라도
인생은 그가 가진 것에서 일푼의 무게를 더 얹어 그 사람에게 지어줄 테니
결코 누구에게도 인생은 쉽지 않다.

가진게 없고
말주변이 없고
식견이 없다면
인생은 그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의 무게를 그 사람에게 지어 줄 테니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험난할 것이다.

머리를 비우고
혀를 쓰지 않고
눈을 감아버리면
인생은 아마 그가 살아있음을 깨닫지 못할테니
인생의 무게를 지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인호의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신기료장수 아저씨 이야기.

어느날 회사에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회사에서 쫒겨났다.
아내에게 쫒겨났다.
거지가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바느질을 배웠다.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사람들의 신발을 꿰매게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사람들의 발을 보게 된 순간
그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의 신을 기워주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의미불분명.
하지만 갑자기 왜 이 생각이 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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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단

수련장 2009. 5. 12. 11:32
그렇게 뛰어나게 직관적이지도 않으면서 예민한 척 하는 나는
가끔은 사람들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이 무엇일까 혼자 고민하는 버릇이 있다.

"날이 좋습니다" 라는 말에
"예, 어제보다 좋습니다." 라고 누가 대답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진배없는 날인데 어제보다 좋다는 걸로 봐서 저 사람은 어제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인가? 따위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건 내가 형사라도 된다면 새털만큼 도움이 될 성격인지 몰라도
현실생활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부분이다.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첫번째 요인이
[오랫동안 얼굴도 대면하지 않고 혼자 생각한다]라는 것인데
확실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많다.

지나간 포스팅들을 살펴보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만큼 남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고
나는 스스로에게 더 엄해져야 한다고
돈내고 쓴 부적처럼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작 그렇게 안되는 것 같아서 속이 편치 않다.

사람이 의심을 많이 하게 되면
타인에게도 의중을 묻는 유도질문을 하게 된다.
삶이 피곤해지기 마련.

그냥 머릿속에서 이런 기재들은 좀 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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逢人且說三分話(봉인차설삼분화) : 사람을 만나거든 말을 삼분만 하라

未可全抛一片心(미가전포일편심): 자기가 지니고 있는 한 조각 마음을 다 버리지 말라




* 나이를 먹을수록 진중해져야 한다.
* 엄격하고 엄격하게. 왜 스스로에게 항상 말하면서도 지켜지지 않는 것인가?
* 전술한 바와 같다. 말을 가려서 하지 못한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 모든 이가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나를 무겁게 생각하고,어떤 이는 나를 가볍게 생각하며 
   어떤 이는 나를 믿을 수 있다 생각하고 어떤 이는 나를 신용하지 못한다 생각한다.
    

아직까지 미숙한 것이 하늘 끝에 닿는구나.
누군가는 나를 가리켜 감정이 없는 얼굴이라 이야기한다만
내가 생각컨대 나는 내 얼굴이 너무 천변만화한다고 생각한다.

군자가 되기에는 택도 없다.

한숨만 나오는 밤일세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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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루하루를 사는게
화살이 시위에 매겨져 당김질을 당하는 기분인데

이 와중에 무엇이 우선인지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선택한다.

개중에는 정확한 판단이었던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불확실 속에서 옳다 믿는 쪽으로 선택한 경우이다.

무엇이 맞는지 알 도리가 없다.
시간이 가고 내가 죽는다 해도
그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실상,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무의미한 내용이다.

아마 내 삶에서 누군가가 궤적을 발견해서
추적해 본다면
내 판단에 대해서 일정한 패턴이 있을 것이라 말해줄지도 모르지만
시계바늘에 목매달고 살아가는 현재의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단 하나 불문율로 삼고 있는 것은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어떤 선택도 하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훈계시키고 있지만
그것 또한 옳은지 그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의 실수를 피해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한 번 남아있을 천우신조의 기회를 그로 인해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득일까 손해일까?

며칠 전 심심풀이로 봤던 인터넷 사주에
이런 게 적혀있더라

[당신은 사주가 맞지 않는다. 전체적인 사주의 유형대로 살 수 없는 사주이고
 그 때 그 때의 천운에 의해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뭐 이런 엿같은 사주가 다 있어?
라고 생각했다가
[사주가 맞지 않는 사주]라는 사주도 안 맞으면 어쩔 것인가?
라는 거울속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물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엇이 삶에서 가장 옳은 것일까?
[가장]이라는 말은 제하더라도
어떤 것이 맞는 삶일까?

어쩌면 맞는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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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 이야기

수련장 2009. 4. 29. 16:46
예전 읽었던 책 중에
작가가 던진 말 중 이런 글이 있었다.

"만약 지구 상에 당신의 혈족과 친척과
당신에 대해 아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할 때
당신에게는 종족번식의 욕구가 작용할 것인가?"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저 가정과 도출질문과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가?
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자손에 대한 욕망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고
더군다나 [아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때]라는 가정은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저 질문은 수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저 질문에 답하라면
쉽게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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