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게다.
3학년은 아니었을것이다. 그 시절은 광기의 시절 아닌가. 사람이 사람답게 보이지않는 시절이다. 동무들하고 농담따먹기 하면서 놀던 기억은 없다. 그리고 난 고3때 급우중에 얼굴 기억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 1-2학년 시절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 뒤에 있던 놈이 갑자기 낄낄대더니 내 등을 쳤다. 꽤나 사이가 좋은 놈이었다.
"뭔데?"
"어제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셨는데 기분이 좋으신거야."
"그래서?"
"그러더니 날 부르면서 설교를 하실 것처럼 굴더니 딱 이 말씀만 하시고 들어가주무시더라."
"뭔데?"
"야! XX아! 너 나중에 니 맘에 드는 애 아무하고나 결혼 해라.
전라도 계집애랑 결혼해도 돼!
교회만 안 다니면!"
아니 그 양반은 술처먹고 뭔 소리를 애한테 해댄거야 싶었지만 그 당시는 그런 생각까지 날만큼 철든 상황은 아니었고, 그냥 이 친구라는 잡놈은 내가 교회 다니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흰소리를 수업시간에 나불대나 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다. 물론, 그렇다고 주먹질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사이는 좋았으니까.
*----*
지금도 왜 그 시퀀스가 뚜렷하게 기억나는 지 모르겠다.
아마 약간 소름이 끼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등골이 서늘했던 감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커진다.
급우와 급우의 아버지가 이야기한 저 짧은 대화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종교론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는 날 선 코드 아닌가. 잘은 몰라도 아버지의 평상시 대화를 유추해 볼 수 있고, 그 아래에서 조신하게 자라온 내 급우의 코드도 읽을 수 있고, 이 놈이 말이 없어서 그렇지 맘 구석 어딘가에는 저런 이야기들을 축적해 놓은 어느 장소가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존 로크가 타블라 라싸(tabula rasa)라고 했던가? 인간의 마음은 맨 처음에 백지 같아서 순수하고 그 위에 무엇을 적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인간의 순수함라는 것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요즘은 고민해 본다. 특이 지나간 고등학교 시절의 이 짧은 경험담을 반추하면 할수록 그 의문은 더욱 커진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한 지식의 습득은 책이나 선친의 기취득된 경험의 구전으로 이어받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지식의 습득만이 이뤄지는 것은 분명 아닐게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들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편견들과 아집이 있고, 우리는 다른 것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편견과 아집도 같이 흡수한다.
가족이건, 스승이건, 하다못해 술친구건
우리는 테두리 안의 사람들을 닮아가는 법.
편견없는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편견없는 인간의 중립성이란 구현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열조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인간의 철학과 종교적 함의를 다 알고 사람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인간의 삶을 내려다 본다 하더라도.
내가 인간인 이상.
누군가가 그러더라
학생시절 순수함으로 편견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어쩌구...
놀고 자빠진 일이지.
사람이 혼자 독고다이로 살 지 못하는 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편견은 사람과 어깨동무하면서 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