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명랑하거나 활달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명랑하거나 활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명랑해지고 활기가 넘치면 활달하지만 타인의 삶에 내 궤적을 맞추기 위해 활달함을 가식으로 쓰지는 못한다는 거다. 영업사원 체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비스업계에 일하니 웃음이야 저절로 포장되어 나오지만 오래 같이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상대편이 알 정도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유용하기 힘든 인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특히나 요즘같은 시대에, 팬시하고 즉답적인 반응으로 연애부터 사업까지 마무리지어지는 감각적인 세태속에서는
[구리디 구린]이미지일 수 밖에 없다. 예전같이 시간이 자연과 같이 반응하고 움직이며, 사람들의 라이프사이클도
빠르지 않던 시절에야 천천히 묻어들어가고 녹아들어갈 만큼의 시간이 서로에게 있었을테니 내가 어느 날 아침 인상을 쓰면서 지나가도 친구들이 별 상관없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할 만큼의 여유는 존재했을 것이다.
(물론,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저 자식 또 심통났네 하고 숙떡거렸겠지만)
현대와 과거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내 표정을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는 것일게다.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이 불필요함으로 치부되는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자신감을 가져라! 웃어라! 그것이 즐거운 [인상]을 준다고
[성공하려면 부모도 팔아먹어라]식 카운셀러들은 잇몸을 내놓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상].
첫 인상이 뭐든지 중요하다.
예전에 허생이 부잣집에 가서 [나 돈 좀 줘] 했을 때 [꼬라지 거지같지만 돈은 준다]식의 무용담은 말 그대로
흘러간 추억의 환타지일 뿐이고, 실제로는 첫 인상. 느낌, 외형적인 호감도로 결정이 난다는 프래그머티즘이
세상을 지배한 지 이미 백만년이다.
비단 사회생활 뿐이 아니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중 하나가 [인상좀 펴라] 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사랑과 은총의 자리에 왔으면서 왜 인상을 쓰느냐?"가 동접들과 어른들의 말이었고
[일주일간 지은 죄가 산더미 같고 사람이 신 앞에 서면 초라하기 그지없는데 뭘 잘났나고 헤벌쭉 웃어]식의
내 주의 주장은 그냥 가슴속에 묻어두던 것이 상례였다.
신앙공동체도 이러한 데 사람들 만날 때는 오죽할까
요즘은 가끔 [무섭다]는 말을 듣는게 겁이 나기도 한다.
[무섭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야쿠자처럼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대화하기 버겁다라는 언외언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들 앞에서 뭘 해야 하는가?
그냥 실없는 농담. 가벼운 잡담, 그리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어 보이는 지식들의 교류, 내가 씹어도 무사할 것 같은 정치인들이나 연에인에 대한 뒷담화, 그렇지 않으면 자학.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나 스스로에 대해서 받아들여줄 수 있는 친구가 모두에게 필요한 거다.
[꿀꿀하면 달리자]식으로 알콜이나 니코틴으로 대충 현상을 떨궈버리는 종류의 친분관계말고
같이 인상을 쓰더라도 그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면 말하는 대로 듣고 의견을 내지 않고
그가 설사 말하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족한.
말 그대로 [가진 거울로 비춰보지 않는] 종류의 친구들이 필요한 법이다.
이렇게 현기증이 나도록 빨리 달리는 시대에는 특히나.
천만인이 내 옆에 있어도 진짜 말없는 술잔 하나 주기 힘들고
세상에 친구 달랑 하나 있으되 둘 다 금욕주의자라 그냥 달 보면서 말을 하는 것으로도
하늘만큼 가슴이 충만해 질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 내 주위엔 사람들이 차고 넘칠 지경이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만나 본 역사가 없다.
그런데 솔직하니 나는 잘 모르겠다.
원래 속을 숨길 수 있는 인간도 못 되거니와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적잖이 상처받을 사람들도 생긴다는 걸 아는데
뭔가 손을 뻗으면 푸근하게 잡힐 듯 하면서도
손은 빈 손이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으니.
그냥 만우절이니까 무책임하게 써 본다.
나한테도
남에게도
굉장히 Harsh한 글이 되어버렸네그려.
난 명랑하거나 활달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명랑하거나 활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명랑해지고 활기가 넘치면 활달하지만 타인의 삶에 내 궤적을 맞추기 위해 활달함을 가식으로 쓰지는 못한다는 거다. 영업사원 체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비스업계에 일하니 웃음이야 저절로 포장되어 나오지만 오래 같이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상대편이 알 정도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유용하기 힘든 인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특히나 요즘같은 시대에, 팬시하고 즉답적인 반응으로 연애부터 사업까지 마무리지어지는 감각적인 세태속에서는
[구리디 구린]이미지일 수 밖에 없다. 예전같이 시간이 자연과 같이 반응하고 움직이며, 사람들의 라이프사이클도
빠르지 않던 시절에야 천천히 묻어들어가고 녹아들어갈 만큼의 시간이 서로에게 있었을테니 내가 어느 날 아침 인상을 쓰면서 지나가도 친구들이 별 상관없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할 만큼의 여유는 존재했을 것이다.
(물론,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저 자식 또 심통났네 하고 숙떡거렸겠지만)
현대와 과거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내 표정을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는 것일게다.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이 불필요함으로 치부되는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자신감을 가져라! 웃어라! 그것이 즐거운 [인상]을 준다고
[성공하려면 부모도 팔아먹어라]식 카운셀러들은 잇몸을 내놓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상].
첫 인상이 뭐든지 중요하다.
예전에 허생이 부잣집에 가서 [나 돈 좀 줘] 했을 때 [꼬라지 거지같지만 돈은 준다]식의 무용담은 말 그대로
흘러간 추억의 환타지일 뿐이고, 실제로는 첫 인상. 느낌, 외형적인 호감도로 결정이 난다는 프래그머티즘이
세상을 지배한 지 이미 백만년이다.
비단 사회생활 뿐이 아니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중 하나가 [인상좀 펴라] 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사랑과 은총의 자리에 왔으면서 왜 인상을 쓰느냐?"가 동접들과 어른들의 말이었고
[일주일간 지은 죄가 산더미 같고 사람이 신 앞에 서면 초라하기 그지없는데 뭘 잘났나고 헤벌쭉 웃어]식의
내 주의 주장은 그냥 가슴속에 묻어두던 것이 상례였다.
신앙공동체도 이러한 데 사람들 만날 때는 오죽할까
요즘은 가끔 [무섭다]는 말을 듣는게 겁이 나기도 한다.
[무섭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야쿠자처럼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대화하기 버겁다라는 언외언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들 앞에서 뭘 해야 하는가?
그냥 실없는 농담. 가벼운 잡담, 그리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어 보이는 지식들의 교류, 내가 씹어도 무사할 것 같은 정치인들이나 연에인에 대한 뒷담화, 그렇지 않으면 자학.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나 스스로에 대해서 받아들여줄 수 있는 친구가 모두에게 필요한 거다.
[꿀꿀하면 달리자]식으로 알콜이나 니코틴으로 대충 현상을 떨궈버리는 종류의 친분관계말고
같이 인상을 쓰더라도 그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면 말하는 대로 듣고 의견을 내지 않고
그가 설사 말하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족한.
말 그대로 [가진 거울로 비춰보지 않는] 종류의 친구들이 필요한 법이다.
이렇게 현기증이 나도록 빨리 달리는 시대에는 특히나.
천만인이 내 옆에 있어도 진짜 말없는 술잔 하나 주기 힘들고
세상에 친구 달랑 하나 있으되 둘 다 금욕주의자라 그냥 달 보면서 말을 하는 것으로도
하늘만큼 가슴이 충만해 질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 내 주위엔 사람들이 차고 넘칠 지경이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만나 본 역사가 없다.
그런데 솔직하니 나는 잘 모르겠다.
원래 속을 숨길 수 있는 인간도 못 되거니와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적잖이 상처받을 사람들도 생긴다는 걸 아는데
뭔가 손을 뻗으면 푸근하게 잡힐 듯 하면서도
손은 빈 손이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으니.
그냥 만우절이니까 무책임하게 써 본다.
나한테도
남에게도
굉장히 Harsh한 글이 되어버렸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