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있고 사람이 있고'에 해당되는 글 79건

  1. 2010.05.24 벌써 1년. 6
  2. 2010.05.17 내일이 5.18인데 11
  3. 2010.04.21 망연하게 던지는 질문 2
  4. 2010.03.12 앙드레 말로 - 그리고 인간
  5. 2010.03.07 무상급식 8
  6. 2010.01.18 어느 두 노인네의 생일 2
  7. 2009.12.02 동네가게 4
  8. 2009.10.14 광대를 비판하는 것은 하늘일 뿐 4
  9. 2009.09.28 천하비일인지천하 내천하지천하야(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
  10. 2009.09.14 장기기증 4

나 역시 이 분을 못 잊지만
난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사람도 아니고
이 양반 이야기 나올 때마다 우는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이 사람을 찍은 적도 없지만
겨우 1년이 지났는데 이미 먼 과거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현 상황과 나라는 사람의 작태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하긴, 친부모가 죽어도 6개월이 지나면 웃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동물,
망각이라는 것이 없다면 사람은 견뎌내지 못할 종류의 생물이긴 하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난 이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지극히 당연한 역사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면
뭔가 좀 모자란 듯 해 보여도 여기서부터 차츰차츰 발전해 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다.

우리는 여전히 중세의 농노이고
대통령은 [王]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직함일 뿐이고
대통령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고
하늘의 명을 따라 천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간다.

오늘 먹을 쌀을 위해 자식들을 부자에게 노리개감으로 팔았던
조선시대 노비나
오늘 요족할 욕심을 위해 내 후대를 팔아먹는 우리나 뭐가 다르랴.

난 몇 년 전에 이렇게 생각했었다.
노무현보다는 김근태가 민주주의의 이상에서 봤을 때는 대통령에 낫지 않느냐
군사정권의 이빨과 발톱에 찢겼다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
철학자에 가까운 시선과 결벽증에 가까운 도덕률로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것이
그동안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데 적격이 아니냐.

아니었다. 개꿈이었다.
나름대로 훨씬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고, 싸울 때 싸울 줄 알았던 그 이도
제 밥그릇 지키는 욕망의 거대집단앞에서 싸늘하게 시체로 변해버리는 곳이
대한민국이더라. 김근태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아마 1년도 못되어 죽었을것이다.
내가 꾼 것은 유러피안 드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노조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들이 존재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대할 때 경계를 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은
착각이었을 것이다. 백일몽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과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저열하고 겁많은 부류였을 뿐이다.

쥐새끼들의 두목은 쥐새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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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5.18이다.
정부의 기념식에 기념단체들이 참여하지않았다. 7년만의 파행이다.

뭐가 중요한 지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나이 먹은 몇몇이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다들 
코뚜레 꿴 소처럼 끄덕거리면서 따라가는 건가.

국민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이들이
권세를 누리고 아직까지 버젓이 살아 천수를 누리고 있다.

이것이 그 잘난 인간들이
촛불들어 떨어졌다고 허고헌 날 외쳐대던
바로 그 [국격]이다.

떨어질 게 애초에 없었다고 이 자식들아.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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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욕망의 화신에 지나지 않는
암기과목 공부벌레들에게 
우리의 모든 권리를 위임했던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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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꿈을 꾸는 자는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많은 위인들의 명언이 있었지만 서설한 저 말이야말로
몇 안되게 가슴을 불태우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앙드레 말로, 소설가. 그리고 자기가 쓰는 글에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를 실천의 땅으로 몰고 간 혁명가.

이 사람이 고고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가 그의 불꽃같은 필봉을 휘둘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아시아로 맨 처음 여정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중국의 환경을 보고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는 걸작 [인간의 조건]을 남겼고,
스페인 국공내란이 일어나자 펜 대신 총을 들고 프랑코정부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2차대전때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서 정규군으로 참전을 했다.

가슴이 이상으로 불타는 사나이의 전형이다. 
스페인 국공내란은 어찌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특이한 사건중 하나이고, 가장 로맨틱하고, 가장 처절하고 가장 인간다운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섞여있는 환경이라고 생각된다.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공화파를 지지하며 스페인에 모여들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조지오웰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인간들이 펜 대신 총을 잡고 독재자와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시리라. 피카소의 [게르니카] 한 폭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인간의 욕망과 타락의 집합체는 사람을 학살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면 그 개괄을 짐작한다던데...꼭 구입해야겠다.) 

평생을 제국주의에 저항해서 싸웠고, 말년 드골정권시절에는 알제리 독립을 주장하다가 프랑스 과격파에게 집이 날아가고 손녀까지 비명횡사한 인물 앙드레 말로. 그의 투쟁기는 결국 도도한 역사가운데에서 사람이 어떠한 포지션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가를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의 저 격언 자체가 달리 보일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골방에 앉아서 글만 쓴 글쟁이가 저런 말을 했다면 좋은 말이네~ 했을 법하지만...그의 삶을 관통해서 살펴보면 저것은 일생을 투쟁속에 살아온 그의 신념과 희망이 들어있는 말이라고 해석할 도리밖에 없다.

p.s)
앙드레 말로를 가지고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조선일보의 예전 사설이 나온다. 
앙드레 말로의 일생을 지지하는 척 하다가 나중에 국공내란으로 공화파가 죄없는 양민을 학살했다는 둥, 앙드레 말로는 그래서 자신의 이상을 잃었다는 둥 하는 논조로 스리슬쩍 양비론을 몰고가는 사설. 아마 그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읽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유취만년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포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도 똑같이 더럽다에서 출발하면서 숯검댕을 스스로 입에 처바르는 일일진대.

아무리  내가 빈한하고 꼬질꼬질하고 더럽고 야비하고 속물같은 놈일지라도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면 그 꿈에
한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리라 희망해본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의 나에게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옷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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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제정된 어린이 헌장을 지금 다시 읽어보자. [떡배단배]의 마해송 선생님과 동화작가분들이 같이 발표하셨던 어린이헌장이다.1988년도 노태우시절 개정된 어린이 헌장은 세련된 맛은 있어도 사람의 폐부를 찌르지는 않는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나 부량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난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헌장4번을 외워서 이야기하다가 종종 맞은 적이 있었다. 이건 잡설이고...

결론부터 말하자.

무상급식이 정치적 쟁점화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동네 후진국에 쌈마이 국가요. 라고 말하는 것 밖에 안된다.
갯벌 파 제낄 돈에 청계전 모터돌릴 돈은 있으면서 애들에게 무상급식 시킬 돈 2조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마인드가 후진국 개발마인드라는 것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니 포퓰리즘이니, 무상급식하면 다음엔 옷도 사주고 집도 사주나] 따위의 발언을 일국의 경제수장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쌈마이국가라는 것이다.

없는 놈만 주는게 타당하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세상에 찌든 때 좔좔 묻은 어른의 세상보는 눈동자라는 거지.

가끔 아버지가 식사를 하시면 종종 지난했던 과거지사를 이야기하신다. 그 중의 압권은 가난했던 학생시절이다.
월사금 못 내서 선생에게 쥐어터지던 이야기는 늘 나오는 단골메뉴다. 왜 아직까지 기억을 하실까? 선생놈을 씹어먹지 못하고 평안하게 칠성판에 눕혀 죽게 만드신 것이 천추의 한이라? 칠순의 아버지가 그 선생놈 묘자리라도 찾아가서 부관참시라도 하면 마음이 풀어지려나? 천만의 말씀에 만만의 콩떡.  답은 이거다.
같은 급우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니까.

당신들 어렸을 적에 당한 트라우마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에 아른거리면서
왜 지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골라서 차별을 받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른들이 갖고 있는 게임의 법칙을 굳이 아이들의 세계에까지 확대해서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하드보일드들이 분명 있을 것이고, 여기에 [무한경쟁의 시대]따위의 양념을 치는 사회의 권력층들이 존재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의무교육은 경쟁교육이 되어버렸고 사교육시장이 애들을 가정과 학교에서 빼앗아가버렸다. 물론 우리 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의식주 중 하나를 [기초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옵션으로 걸고 넘어지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한경쟁으로 경제가 힘들어져서 못먹는 애들이 생기고 경제적 불평등이 생겼다. 최소한 균등함이라는 것을 [기초교육]의 의무로 삼는다면 먹거리가지고 장난질은 치지 않아야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는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밥 먹고, 누구는 부모님이 싸주는 밥 먹고, 누구는 부모님이 사준 돈으로 햄버거 사 먹는 꼬라지가 사춘기도 안 지난 애들의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이게 반상의 구별이지 뭐냐.

앞에 써 놓은 57년도 어린이 헌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이 잘난 21세기에 1번부터 9번까지중에 뭐 하나 지켜지는게 있는가를.

우린 돈 앞에 영혼을 숭덩숭덩 뭉태기로 썰어 팔아 처 먹고 있는 중이다. 동정으로 긍휼로 국가를 지탱하는 중세시대의 미덕은 더 이상 현대사회를 유지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제발 위정자들은 알아주었으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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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사사기 9:8 ~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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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왜 저런 자들은 천수를 다하고 선한 자들은 먼저 가는가?

정말 누구 말마따나 하나님이 아끼셔서 먼저 데려가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남은 놈들 너무 호의호식하잖아.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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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엔 늘 마트를 놔 두고 동네 가게만 돌아다니는 아가씨가 있었다.
이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하여간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동네가게만 이용했다. 
지금은 멀리 과천바닥에 살아서 아직도 그런지 모르겠다. 가끔 코스트코 가자고 전화하긴 하는데 
가서 사는게 먹거리가 아니라 소방호스나 지렛대같은 걸 사고 있으니 여전히 동네 가게를 이용할 것이라 믿는다.

왜 동네가게에서 사냐고 물었더니 그 아가씨 왈,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람 것을 팔아주는 것이 당연함"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리석기만 했던 당시의 나로써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몰랐거니와, 그 녀석이 말하는 [당연함]이라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베풂에서 나오는 호기심인 것일까 하는 정도 생각에 국한되어 있었다. 사실 물건을 사는 것에 있어서 그 이상의 생각을 하면서 구매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적]인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빠르고 간편하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고, 내 선택영역을 보다 좁은 공간에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더군다나 요즘 마트나 백화점만큼 쾌적한 오락공간은 또한 어디 있는가.

그러던 생각이 최근에 들어서야 바뀌기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마트를 가지 않고, 동네 가게들을 들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유통력을 무기로 들어오는 대형자본의 후안무치함과 선진국의 배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천한 대한민국의 법령따위를 문제삼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나는 내 앞의 가게들이 [동네에서 장사하기 때문]에 팔아줘야 겠다고 생각이 바뀐 것 뿐이다. 저들이 다른 곳에 사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저들이 장사하는 곳은 내 동네이고 저들은 하루의 2/3이상을 나와 함께 사는 동네 주민이기 때문에 사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것은 동정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던 관계가 무너지는 현실을 요즘 목도한다. 돈 앞에 역사와 대의와 법령이 무너져내리는 막가파의 마모니즘을 2009년 대한민국에서 목도한다. 돈 앞에 사람들이 무너진다. 
합법적인 파업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불법으로 바뀐다. 사용자연봉까지 들러붙여서 만든 평균연봉9000이라는 말 앞에 대중들은 질시에 눈이 멀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형국이다. 이럴때 우리는 침묵해서 찬동하던지 아니라고 항변해야 한다. 항변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내가 잡아야 내가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 뿐이다.

정작 내가 오늘 사 들고 온 것은 마늘 한 봉에 사이다 한 통, 하지만
나중에 그 녀석을 만나거든 그 [당연]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 더 물어봐야겠다.

p.s) 그런데 다음에 만날 때도 코스트코에서 만날 성 싶은 느낌이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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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맛간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충신이 아니었다.

물론 충신들도 직언을 한다. 그러다 연산군 시절 판내시부사 김처선처럼 화살 멀티샷에 칼질까지 당하고
처참한 꼴로 죽는 게 보통. 충신치고 오래 사는 사람은 없다. 충신이라는 것은 명신(名臣)과는 다른 족속, 현명하다기
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그릇된 왕에게 전달하는 위인들인데 그게 가능하겠나. 공자 제자 자로를 보라.
왕에게 사람이 할 짓을 강요하다가 잡혀서 육포가 되었다.  은나라의 충신들은 어찌되었나? 달기를 멀리하세요 하고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기둥에 묶여 불타죽었다.
권좌란 그런 것이고 충신은 그렇게 줄어든다. 그럼 결국 주위에 남는 건 뭐? 그렇지. 간신.

그럼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없나? 있다. 있지만 말로 할 수는 없으니 몸으로 때운다. 아니면 은근슬쩍 썰을 푼다. 그게 광대와 작가들의 일이다. 자고로 왕들은 그런 두 부류의 직업군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내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기분은 가끔 나빠도 지속적인 유흥은 제공해주니까. 
그리고 가끔은 이런 빈정댐을 듣고 순식간에 각성해서 명군이 된 [진짜 사나이]들도 역사에 있단 말이다.
그래서 광대와 작가는 하늘이 내린 면죄부를 갖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천상의 까임방지권이랄까.

광대와 글쟁이들을 권력자가 살려주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천한 신분] 덕인 것도 있었으리라. 미천한 놈들이 시정과 가끔 궁중 안마당에서 떠드는 것 즘은 [나는 관대하다]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저들은 성골도 아니고 진골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니까. 가끔 민중을 격동시키긴 하지만 불평불만은 태고적부터 늘 존재해 오던 것 아닌가?  저것들도 먹고 살아야지. 암.

그래서 남사당들은, 탈춤들은, 굿거리들은 늘 반항적이다. 그 마당들을 살펴보면 체제순종형인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이 광대들의 기본이다. 실생활에 순응하는 삶에서 무슨 카타르시스가 나오겠는가? 높은자를 찬양하고 부를 찬양하는 것은 [막장 드라마]라고 하지 [작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원래 웃음이라는 것은  비하하며 왜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인용하자면
"비극은 선인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고 희극은 악인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중에 소름끼치는 진리가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잘 살면 TV에서 비극을 많이 해 주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코미디를 많이 해 준다"

이런 고로, 광대들이 많이 떠드는 동네에 내가 살고 있다면 뭔가 생각을 해 봐야하는 거다.
난 왜 이렇게 즐거운 동네에 살고 있나? 하면서.

그런데 그런 광대들도 권력에게 두들겨 맞는 나라가 몇 군데 있다.
아쉽게도 우리도 거기 속하는 것 같다.

광대가 권력에 두들겨 맞는 이유는 딱 하나다.
관객들이 광대의 개그를 이해 못하거나 광대의 개그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관대함] 대신 권력만 남아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냥 깐죽대는 것 같으니까 광대의 직업이 보이는게 아니라 가면 뒤의 인간이 싫은게지.

이건 깡패의 논리다.
임화수가 김희갑 두들겨 패던 전통이 군사정권에 물려지고 나름대로 트랜드가 되어서 그냥 이어지는 거다.
한심한 뫼비우스의 띠.

물론 지금은 연예인들이 광대라고 부르기에는 선망하는 직업이 된 지 오래다만...
그 속의 흐름은 역사 그대로 아닌가.
이러다가 끝없이 광대들이 쫒겨나고 들어오는 전통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던간에.

난 개인적으로는
광대와 무당과 작가는 하늘이 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심판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믿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놔두면 하늘인 민중들이 알아서 판단하지 않을까나.

...하긴 여기 글을 쓴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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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호랑이가 필 담배조차 재배되기 전의 중국 은나라 시절
폭군 주왕의 폭정이 마지막에 달할 즈음의 이야기.

문무겸전에 힘까지 남달랐던 주왕의 교만이 커져 갖은 토목공사를 일으키니 백성의 원망이 드세지고
게다가 주왕의 옆에 절세의 미인 달기까지 있으니 왕은 아무것도 뵈는 바가 없었다.
(하긴 절세의 미인이 옆에 있는데 뭐가 뵈는 놈이 이상하다)

그것을 저 먼 변경에서 바라보며 주왕의 폭정을 탄하며 백성들의 핍절을 걱정하던 어진 주 문왕.
(웃기셔...슬슬 중앙정부 맛가는 걸 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수작인 건 역사가 지난 지금 봐도 다 알아)
이 세상을 어찌하면 평탄하게 할 수 있을 까 고심하다 어느 유료낚시터에 서식한다는 죽돌이 강태공을 만난다.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사람 풀어서 브레인을 모으는 인간. 어찌 대권(大權)을 탐하지 않는 자라 볼것인가?

바로 강태공을 모시고
아 낚시 잘 되세요 허허허 저 문왕입니다
이런 인사치레 끝나자마자 묻는 게 이 질문이다.
수렴하약 이천하귀지? (樹斂何若 而天下歸之) - 민심을 어떻게 거두면 천하가 돌아올수 있겠습니까?

강태공. 딴에는 신선도까지 배웠다는 사람이겠다.
아무리 정중한 말이라 하나 주문왕의 속내를 모르랴. 문왕에게 썩소 한번 날려주시고 말한 게 이것이다.
천하비일인지천하 내천하지천하야(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
 -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

왕나부랭이의 것이 아니고 권세잡은 놈 것도 아니라 백성들의 천하가 곧 천하라는 말 아닌가.

물론 강태공도 그렇게 말하고 주 문왕 밑에서 벼슬살이 하지만
이미 삼천년 전 낚시터 죽돌이도 알고 있던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체육관 관장님이 늘 하는 이야기
[기본이 되어야 해 기본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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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에
오랫만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와서 다시 장기기증하라고 이야기하고 갔다.

사실
소는 죽으면 뼈다귀까지 푹 삶아서 사람들에게 봉사해 주고 가는데
죽을 때 몇가지 뽑아 준다고 뭐 세상에 펄쩍 뛸 일이랴.
아마 나도 제대하고 나서 예전에 우리 교회 왔을 때 시신하고 안구기증에 싸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우리교회는 자주 오는 것 같네.

오늘 다시 왔길래 그냥 눈 감고 가만히 있었다.
뭐 다시 싸인해 주기도 싫었고,
현재 재단본부이사장이 전 국개의장 박관용이라는 것도 마뜩찮고
그동안 장기운동본부가 이것저것 말 많았던 것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컨디션도 꽝이어서 그냥 잠자코 있던건데...

조만간 다시 한 번 내 증서 확인해 볼 요량이다.

나도 내 몸이 시원치 않아서
부속품 좀 갈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살다가 몇 번 씩 드는데
정말 궁지에 몰려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에게는
시원치 않은 부속이라도 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공은 공이고 사는 사겠지.
다시 탄핵이 와도 의사당 몽댕이를 잡겠어효 따위 개망발이나 외치던 인간이 이사장이라지만
그 인간에게 내 각막이나 시신을 주는 건 아닐테니까.

비단 기독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잡아먹은 닭들과 소들과 돼지들에게라도 미안하게 죽기는 그렇잖은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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