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 한담'에 해당되는 글 668건

  1. 2011.07.29 비를 맞으며 2
  2. 2011.07.24 자신감 & 근성
  3. 2011.07.23 홍상수와 이창동
  4. 2011.07.20 글을 쓰면서 2
  5. 2011.07.16 잡설 4
  6. 2011.07.15 미진함 2
  7. 2011.07.13 대충초고 2
  8. 2011.07.11 불평불만 2
  9. 2011.07.09 2011.7.8일 소사 4
  10. 2011.06.30 가츠의 죽음 6

비를 맞으며

작은 방 한담 2011. 7. 29. 00:16
걷히지 않는 구름을 보면서 하염없이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이 벌써 한 주일 가까이 되어간다.
더울 때는 덥다고 탓하지만 사람은 태양을 보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이다.

사람들은 점점 성마르게 변해간다. 불쾌지수만이 여름의 고질은 아닌 것이. 사람은 해를 보지 못하면 우울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다. 일광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따가움으로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게 하지만, 비는 서늘함 가운데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되게 만든다.

군대 여름전술훈련이 생각난다. 작전장교가 아주 근사하게 날짜를 잡아서 가는 날 텐트를 치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끝날 때까지 비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종일 천막에서 하염없이 비내리는 것만 구경하던 훈련이었다. 맨 처음에는 이리저리 신나서 떠들던 청춘들이었지만 비가 풍경을 희뿌옇게 만들기를 몇시간 지속하자 모두 비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지러진 풍경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선명하지 못한 경치는 어렴풋이 잊었던 추억들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그 때, 어디론가 떠나가버린 첫 사랑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내 주위에 몰려있던 부대원들도 모두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사람들을 꺼내어 빗속에 가려진 풍경 사이에 세워두고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

강남이 물바다가 되고 산이 빗물에 쓸려 도로로 내려오던 날
나는 이제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추억한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궁금한 사람을 추억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아련하게 만드는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되뇌어보지만 부질없는 날씨의 변덕때문에 일어난 감정의 고양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쑥스러워서 다시 잠자리에 든다.

왜 사내들은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저 아래 켜켜히 묻어두었던 옛 사람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다시 파 올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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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말한다.  젊은이들은 노력과 끈기가 부족하다고.
어른들이 늘 말하는 걸로 봐서 젊은이들은 늘 노력과 끈기가 부족하다가 어느 날 머리가 벗겨지고 정력이 떨어지면서부터 노력과 끈기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노력이건 자신감이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심리요소가 사람의 인생과 행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이 없는 남자는 여자가 좋아하지 않는다.
옳은 것만을 말하고 고아한 품성을 지닌 소심한 사내보다는
매일 돈이나 꾸러다니고 입에 거짓말을 달고 하는 대범한 남자를 여자들은 더 좋아한다.

(사실이다. 관찰자적 시각에서 충분히  목격한 바니까 토달지 마라. 네 주변에 다 그런 년놈들 밖에 없는거다고 말한다면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내 비천한 환경을 욕하라)

노력과 자신감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가 빼앗아 가는 것이다.

정기충천하고 세상에 거칠 것 없는 남자도 딱 여자에게 열 번만 차이면 그 남자는 연애에 관한 한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노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기를 쓰고 작업한 거 열 번만 리턴되서 들어오면 사람이 소심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환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짐승은 안 그럴까. 첫째 고양이가 다리를 다친 뒤에 새로 생긴 표정이 하나 있다. 고개를 죽 빼고 눈만 위로 떠 올린, 말 그대로 [불쌍해 보이는]표정을 가끔 짓곤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기 힘들다던가. 예전에 올라간 곳을 못 가던가 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거다. 최소한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과거를 느낄 수 있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자신감과 노력의 상실이라는 짐을 지게 마련인 듯 하다.

결국 자신감와 끈기라는 것은 그러한 슬럼프를 벗어나는 것 외에도
꾸준히 자기자신에게 무언가 성취욕을 계속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거나 향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양이에게 계속 딸랑이를 흔들어주다가 마지막에 고양이가 잡도록 만드는 것처럼.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성취욕을 만족시키는 것도 하나의 훈련이 될 것 같다.
매일 실패하는 인생만큼 불쌍한 게 어디 있을까. 내가 노력하는 만큼의 효과가 나올 거라는 자기암시를 꾸준히 걸어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자문제는 이거 쉽지 않네. 돈이나 많으면 술집 아가씨라도 꼬셔볼텐데 그것도 안되는 재정적 난망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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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리얼리즘에 기대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홍상수이고
허구성에 기대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이창동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리얼리즘 속에 비어있는 공간을 창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실소와 겸연쩍음을 만든다면
이창동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전방향에서 옭죄며 들어가 관객으로 하여금 번뇌와 불편함을 준다.

그래서 이창동의 작품은 현실에서 벗어난 주인공들이 허구에서 탈피한 리얼리즘을 갖고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으면서도 헛웃음을 유발하는 비현실성을 누린다.

마치 반지의 제왕을 보는 아라곤의 고뇌와
쿨러닝의 자마이카 선수들의 좌충우돌을 보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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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작은 방 한담 2011. 7. 20. 23:01
감정이 앞서면 손이 따라가지 못해서 정작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내어놓지 못하고
무작정 앉아서 타자만 치고 있으면 메말라서 아무 곳에서 쓸모없는 잔가지들만 늘어난다.

그래서 컨디션이 중요한건가.

예전 만화가중의 한 사람은
액션시퀀스를 그리는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기력이 충천한 날을 골라잡아 그렸다고 하던데
아마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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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작은 방 한담 2011. 7. 16. 21:44
1.
아는 여 후배가 골프장 라운딩을 처음 갔는데
라운딩 처음 가는걸 [머리 얹는다]라고 한다더라.
난 골프장에서 머리 얹었다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얘가 그럴 애가 아닌데 뭔 소리야.


난 [머리얹다]라는 말이 기생이 처음으로 손님받는 걸 뜻하는 말로만 알고 있었다. 

사회활동들이 세분화되고 그 전문분야가 깊어지니까
나름대로 각 분야마다 그곳에서 쓰이는 은어들이 있는데
갈수록 적응이 안되고 있다.

늙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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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함

작은 방 한담 2011. 7. 15. 00:10
1.
글을 하나 끝내고 나면 시원섭섭할 줄 알았다. 예전에는 그랬다. 이번에도 퇴고를 하고 나면 뭔가 그런 감정이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는다. 내 스스로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면 미흡하다는 게 확실하다.

2.
갈수록 그러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애초에 문을 닫아버리고 만나기 싫다는 사람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했으면 말이 통하지 않았을까?
때가 맞았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죽은자식 뭐 만지기인데. 하여간 그런 생각이 심해진다.
나이를 먹은건가
아니면 나이를 먹을수록 미숙해지는 것인가.

3.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덧칠을 계속 할 만큼 욕심은 많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는 것을 안다.
이게 체계화가 된다면 나름대로 어떤 부족함에 대한 것을 메꿔갈 수 있는
나름대로의 훌륭한 개선책이 되겠다 싶지만

문제는 그런 감흥이 일어나는 분야가 지극히 협소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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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초고

작은 방 한담 2011. 7. 13. 00:35
정말 대충 초고를 썼더니 대충 썼네.

분량도 전작보다 줄어든 것 같은데 말은 더 많다.

뭔가...문체의 변신을 시도해봤는데 그리 잘 된 것 같지는 않으니.

하긴, 아예 장르 자체가 다르고 접근을 다르게 하려고 했는데 뭔가 부족하다.

곡예사님에게 보여줘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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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불만

작은 방 한담 2011. 7. 11. 22:52
1.
인간이 드글드글한 조직이라는 곳에 있다보면 [불합리]라는 것이 덩달아 암덩어리처럼 파생된다.
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해야 하는 조직의 강령상, 사람의 편의를 도외시한 규칙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조직의 안녕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옭죈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정작 사람들은 조직을 위해서 사람들이 불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다음 주 월요일부터 교회 고등부가 수련회를 떠난다.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이번 토요일부터 방학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고등학교들이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보충수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업일수에 기록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충수업의 첫 사흘을 빼 먹고 수련회를 참석하라는 것이
과연 응당한 일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앙이냐 세속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저울추가 달라지겠지만
과연 그런 잣대를 아이들에게도 줘야 할까 싶은 것이다. 교회에서는 수련회장을 탐방하고 나서
답사영상을 보여주며 녹원이 우거진 좋은 수련원으로 아이들을 끌어들인다. 우리 반도
가겠다는 애들과 안 가겠다는 애들이 반반이다. 물론 그것은 학생들의 의지다.

하지만 의구심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지금 가야 하는 것일까?
물론 여기저기 시간이 안 맞고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일 것이고, 일정이 맞지 않고 학사일정과 충돌한다고
수련회를 안 가면 교육부서의 무성의함에 담당목사가 욕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가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 수련원장이 그린벨트에 세워져 있는지 아닌지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3.
젊은 선생들은 일단 다 같이 가자는데
나는 혼자 살 뿐 아니라 고양이도 두 마리 키운다.
대체 2박3일동안 고양이들을 어쩌라고.
수련원장에 데리고 가는 건 작심하고 애들 버리러 간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그렇다고 집에 놔 두고 간다? 그거 신경쓰여서 어찌 하겠나.

안 그래도 호구지책 걱정해야 하는 사람인데
참 이것저것 신경쓰인다.

조직이 비대해지면 원래 개개인의 처지같은 건 2순위로 밀려나고 조직의 목표가1순위가 된다.
이건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처지이지만
교회도 결국 진배없다는 소리잖아 이거.
 
그래, 어차피 이건 내가 투덜거리려고 쓰는 글이니까.


4.
맘이 심란해서 밥 하기도 괴롭고 그래서 집 근처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한 50줄에 들어섰을까. 가장 한 명이 20대로 보이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와서 맛있게 밥을 먹는다.
뭔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가장이 큰 소리로 아들에게 훈계를 하더라.

"나중에 사회생활을 해 보면 알겠지만 말이야. 네가 책임을 지지 못할 상황이 오게 되면 말이지."

"예."

"무조건 입닥치고 가만히 있는거야. 일이 끝날 때 까지. 사회에서는 주류가 되어야 해. 비주류가 되어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거다. 이걸 명심해."

무슨 무협지의 사파 교주가 문도들을 모아놓고 말하는 걸로 착각했다.
세상에 아비가 아들에게 '이뤄지지 않는' 정의를 설파해도 모자랄 지경에
저따위 말을 인생의 설교랍시고 늘어놓고 앉아있다니.

어차피 인간은 생존본능이 있어서 그런 설교를 듣지 않더라도 자신의 몸보신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 [불합리에 대한 분노]가 있느냐 [불합리에 대한 순응]이 있느냐에 따라서
조직의 미래와 구성원의 삶이 바뀌는 것이거늘
그런 천박한 논리를 아비의 인생설교로 삼다니.

쓰레기 프로토타입이 쓰레기 양산형으로 거듭나는 경이로운 광경을 본 것일까.
아니면 그 아저씨도 무언가 사회에서 맺힌 것이  있고 좌절한 바가 있어서 자식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장마가 끝나지 않은 시기.
불평만 하늘에 가득한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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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소소한 실수를 하며
얼마나 적은 성공을 하면서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2.
지속되는 빗줄기. 하지만 이것이 장마인지 아니면 대한민국의 기온이 바뀐 우기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무더위가 찾아올까?
어느순간 무더위는 사라지고 바로 가을날씨로 접어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게 떠나가는게 잦아진다. 


3.
끝이 보인다. 조금만 더


4.
여자에 관해서는 시작조차 보이지 않는다.


5.
창업이나 호구지책에 대한 것은 여자보다 심하다.


6.
내 먼 조상중 한 분인 청장관 이덕무의 삶이 자꾸 생각난다.
죽을 때까지 궁핍을 떨치지 못하고 책만 사 보다가 독서벌레로 죽었다.
말년에 정조같은 걸출한 양반이라도 만나지 못했으면 이름 석 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청장관께서는 장가라도 가셨지.


7.
집안의 대소사는 점점 많아진다.
다른 일이 아니다.
떠나가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뿐이다.
이제 때가 되는 거다.
떠나가는 분들을 보내주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세대가 된 것이다. 어느 새.

아직 나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아이같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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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의 죽음

작은 방 한담 2011. 6. 30. 18:08
1.
무려 8년

나와 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했던 내 소라게가 드디어 죽었다.
갑각류, 새우같은 녀석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줄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었던가.
잘 살면 15년 30년이라고 했었건만
아무래도 내 집은 그정도로 후한 수명을 누리게 해 주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이었던 모양이다.

3개월- 6개월에 한번씩 변태를 하면서
자신의 껍데기를 다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십여차례 반복한 듯 했다.
늘 죽은 것 처럼 보였지만 어느 새 다시 살아나 내게는 '불사신'으로 보이던 그 녀석이
결국, 탈피에 실패해서 굳어져 죽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어렵고 힘들 때에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내게 묘한 감동을 주던 녀석이
이제 집에 없고, 텅 빈 어항만 남아있는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서 적당하게 담아주지도 못하고 대충 싸서 같이 버려버렸으니
그 또한 마지막 가는 길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프다.

어느 생물이
낯모르는 인간과 어우려져 8년을 같이 지낼 수 있을까.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족속으로 만나서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사람보다 진한 연이었구나.

"잘 돌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난 내세를 믿지는 않지만 다음 세상에 만나면 우리 꼭 친구하는 거다."

가장 고독하고 힘들 때 내 곁에 있어줬던
정말 고마웠던 내 소라게.
가츠.

안녕. 
정말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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