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토론의 개괄을 이야기 하기 전에
60년대 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60년대 후반의 화두는 [월남전]이었다.
40년대 나치독일과 일제의 패망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었다.
[클래식한 일류문명의 권력정점]이었던 민족과 국가중심의 집단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실존주의가 20세기를 이끌 것이라 믿었던 시대.
전쟁복구기를 지나 실제적인 신문명 부흥기라 믿었던 시대.
그런데 뜬금없이 벌어진 미국의 월남참전, 소련공산당의 인접국 침략은
[제국주의로의 회귀]였고, 전체주의의 복귀였다.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프랑스의 68혁명, 미국의 히피문화가 일본의 전공투 세대와 동시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시대가 지금까지 인류생성이래 유일무이하게
[글로벌 아나키즘]이 유행하던 시대였을 것이다.
아나키즘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을 꿈꾼다.
철학서에 유명한 격언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에서 아나키즘은 출발한다. 인류문명의 역사를 시간의 접점으로 봤을 때 인간이 역사를 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어온 공간을 끊어내야 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국가와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끊어내고 인간 자체로써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내며, 동시에 그 동안 인류가 쌓아온 이성의 오류와 관습을 리셋시키는 거다.
(그냥 내 멋대로 쉽게 써 봤다. V for vendetta를 먼저 읽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동경대 전공투는 이 중에서도 개인적인 실존을 우선시한 운동단체다. 각자 개개인이 각각의 공간을 창출하는 1인 사유체제이며 역사체제이다. 그런 이들이 연대를 가지고 같은 역사인식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모인 것이다.
이에 반해 미시마 유키오는 고래로부터 이어오는 국가와 민족의 전통과 폭력(!)을 이용해 현실의 부조리를 초극하고 탈인간화의 정점에 국가를 올려놓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미학에 자신을 내던진 행동주의자다. 신화적 정점에 오른 국가 앞에서 인간의 가치는 개개인의 존재가 아닌 신화속의 구성자로 남는다. 그 역시 같은 이유로 동지들의 연대를 원한다. 시대초극을 위해.
둘 다 현실부정은 똑같지만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다.
결국 둘의 토론은 [공간]으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난다.
팽팽한 평행선상에서 300대 1의 격론이 펼쳐진다. 당시 일본 최고의 지성이자
동경대에서도 실존주의로 무장한 전공투의 현학적인 언어빨도 기죽지만
같은 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펜으로 먹고 살던 미시마의 대응도 범인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어필한 것은 미시마쪽이었던 것 같다. 보다 평이한 어법으로
공간과 일본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지만 자신의 주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공간의 탈피에서 시작해서 그 속의 자연 – 자연속의 미학과 신- 천황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는 이 내용은 난해하고 복잡하고 질서 없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큰 줄기가 있다.
“일본인의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현실을 넘어선다”가 전공투의 요지이고
“일본인의 태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며 그 본질에 흡수되는 게 현실타파”라는 게 미시마의 요지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고
두 집단은 나름대로 비장하게 끝이 난다.
전공투는 결국 정부와 거대언론(하여간…)의 협잡에 의해 노선 자체가 왜곡되게 알려지고 폭력노선이 우세하게 되며 결국 계파간의 살해 +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출현이라는 비참한 운동의 몰락을 맞게 되며
미시마는 자신의 주장대로 천황의 신성회복과 군대의 각성을 주장하며 총감부를 습격, 점령해 일장 연설을 하지만 아래에서 연설을 듣던 청년장교들이 조소를 보내자 일본도로 배를 그어버리고 자결한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30년 뒤 모여서
그 때의 일을 추억하는 것으로 이 장황한 책은 마무리되지만
참으로 서글프기 그지없는 역사이다.
어차피 둘은 예정된 파멸을 위해 달리는 존재들이었다.
역사의 해체를 위해 뛰는 전공투에게 기존질서가 호의적일리 만무하며
신성일본을 위해 죽음과 타살을 가져오겠다는 미시마를 누가 받아줄 것인가.
이 둘은 당시 정권에게 어찌되었던 가시 같은 존재였으리라
80년대 대한민국 군사독재에 맞서서 싸운 두 진영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민주 재야세력이나
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정권에 대항해 싸운다는 한신대를 기점으로 한 KNCC 계열이나
둘의 타도 대상은 같았지만 지향점은 확연히 달랐던 것과 비슷하다.
휴머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공통분모.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한쪽은 민주화 이후 이합집산 하면서 결국 [먹고 사는게 장땡이여]식의 구 군사집단에게
권력을 자리를 내 주었고 KNCC는 한기총이라는 돈 많고 신도 많은 듣보잡 그룹에게 대한민국 기독교의 교통(敎統)을 내 주지 않았는가
일본의 전공투세대 역시 흡수당했다.
뒷장의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됐을 법한 상처 입은 노병들의 자기존재 확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시절 보다 훨씬 많이
일본이라는 폐쇄성에 경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전히 현학적인 변설과 사회인식의 통찰은 있지만
예리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히피세대도 30년 후 이념이 아닌 경제에 종속되었고
일본의 전공투 역시 신자본주의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나마 유럽만이 연대의식으로 인한 EU를 탄생시켰다지만
그 역시 경제적인 블록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30년 후의 모임 역시 애매하고 현란한 단어의 잔치로 끝난 채
어정쩡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책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패담이며
그리고 살아남아 힘이라고는 숟가락 들 정도밖에 없지만
정신은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의 일갈이다.
그냥 이대로 살게 되면 좋든 싫던 [이념]이 아닌 [경제]에 의해
종속될 것이라고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그들은 미시마를 은연중에 그리워하고
2시간동안 본 그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을 초극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는 절망감이 목숨을 던진 자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미 전공투의 연대는 끝났다.
하지만 연대는 의식이 있으면 다시 규합될 수 있는 법.
이 책의 겉표지에 있는 글귀.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말의 뜻하는 바를 책을 다 읽고 알 수 있었다.
진정으로 모이지 않으면 세계에 개개인이 먹혀버리는 시대가 올 것이기에.
전공투와 미시마가 보여준 것은
세계사를 이어가는 작은 무대의 소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모를 무서움과 희망이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과연
이 나라와 이 시대에 연대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연대가 있다면 무너지지 않으리라.
참으로 장황하기 그지없는 리뷰였다.
말을 첨삭해고 손 봐서 썼어야 하는데....그럴 스태미너가 없었음을 양해해 주시라.
p.s)
동경대 인간들의 현학적인 발언 + 60년대 고유의 이미지적인 언어남발은 정말 2000년대에 독서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라.
p.s 2)
이 책이 오싹한 게 뭐냐하면
1부(미시마와 전공투의 토론)를 다 읽고 나면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가 대충 나온다는 거다.
말하는 것에 사람들의 미래가 드러난다.
아마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