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예전에 TV에서 해 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75년도의 숀 코네리는 말 그대로 사람의 숨을 멎게 하는 매력이 있군요.

영국 지배하의 인도
일확천금의 꿈을 믿고 미증유의 세계로 모험을 떠난 두 명의 사기꾼.
그리고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절대가치의 획득.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탐욕.
마지막의 공허함.

이 모든 이야기를 걸출한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의 귀를 빌어
듣는 형식이죠.

"왕이 되려던 사나이"라는 영어 원제보다 훨씬 가슴에 와 닿는
한글 제목.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이 영화를 더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20년대 홍사용 시인의 시집 제목에서 나온 말입니다.

007 숀 코네리와
영원한 배트맨 집사 마이클 케인의 오묘한 듀엣이 맛깔나던 영화였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개인적으로는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가슴 한 복판에 대못을 박아버리는 듯한 씬이었으니까요.

과유불급.
하지만 해 보지 않고는 그 보물이나 구경을 했을까요.
요즘은 고전이 땡기네요.
봄은 봄인가 봅니다. 봄바람 가득하길. 

p.s) 마이클 케인은 이 영화에서 부인과 같이 연기합니다.
      이 부부는 지금까지 백년해로하며 살고 있는데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헉...이럴뚜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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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렀습니다.

1차대전 제국주의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운 모로코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모로코의 [최후의 바르바리 해적이자 독립운동가] 물라이 엘 라이슐리 (숀코네리)
그리고 미국 러시모어 산에 자리잡은 4천왕(?)중 하나이자 테디베어...테오도어 루즈벨트 (브라이언 케이스)
그리고 가운데 낀 미모의 미망인 캔디스 버겐.

테디 루즈벨트는 미국 최초로 노동운동에 개입해 노동자 편을 들어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빨갱이(?)대통령이며 -->극우에서는 이렇게 부른다네요.
대외외교에 있어서는 철저한 강대국 논리를 편 장본인이기도 하죠.

라이슐리는 사막을 배경으로 오직 총칼과 민중의 지지로 살아가는 지극히 마초스러운 지도자이고
루즈벨트 역시 복싱과 사격으로 단련된 불굴의 의지를 가진 거친 사나이죠, 친척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로코의 패권을 잡고 선거에 활용하려는 루즈벨트와 영토를 지키려는 라이슐리의 싸움.
그것이 바람과 라이온의 이야기입니다.
(카메라에 가장 많이 잡히는 건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이지만...)

남자영화입니다. 여성 취향의 영화는 아니죠. 이것이 사나이! 스러운 장면이 꽤나 많이 나오는, 어찌보면 시대와
안 맞는 영화일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갖는 덕목이 있습니다.  스펙타클하고 멋진 대사와 영상의 난무.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설탕칠을 좀 하고 핑크빛으로 물들인 영화랄까요.

"당신은 바람이고 폭풍으로 변하여 내 눈을 아프게 하고 대지를 마르게 하오. 그러나 나는 사자요. 나는 내 땅에 남아 있으나 그대는 어디에도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할 거요" 라는 라이슐리의 편지 (루즈벨트에게 보내는)가 이 영화의
핵심이자 제목입니다.

하지만 어릴 때 본 이 영화 중 최고의 대사는
마지막에 바닷가에서 부하와 함께 서 있는 라이슐리의 대사였습니다.

부하 : 위대한 라이슐리여! 우린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대의 말처럼 바람이 모든걸 쓸어갔습니다. 모두 잃었습니다.
라이슐리 : Sherif, is there not one thing in your life that is worth losing everything for?

그러고는 둘이 바다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습니다.
아아...이것은 진정한 사나이의 대사. 소오강호라.

* 결국 작업 중에 DVD를 지르고 말았다는 이야기로군요.*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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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토론의 개괄을 이야기 하기 전에

60년대 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60년대 후반의 화두는 [월남전]이었다.

 

40년대 나치독일과 일제의 패망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었다.

[클래식한 일류문명의 권력정점]이었던 민족과 국가중심의 집단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실존주의가 20세기를 이끌 것이라 믿었던 시대.

전쟁복구기를 지나 실제적인 신문명 부흥기라 믿었던 시대.

 

그런데 뜬금없이 벌어진 미국의 월남참전, 소련공산당의 인접국 침략은

[제국주의로의 회귀]였고, 전체주의의 복귀였다.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프랑스의 68혁명, 미국의 히피문화가 일본의 전공투 세대와 동시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시대가 지금까지 인류생성이래 유일무이하게

[글로벌 아나키즘]이 유행하던 시대였을 것이다.

 

아나키즘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을 꿈꾼다.

 

철학서에 유명한 격언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에서 아나키즘은 출발한다. 인류문명의 역사를 시간의 접점으로 봤을 때 인간이 역사를 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어온 공간을 끊어내야 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국가와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끊어내고 인간 자체로써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내며, 동시에 그 동안 인류가 쌓아온 이성의 오류와 관습을 리셋시키는 거다.

(그냥 내 멋대로 쉽게 써 봤다. V for vendetta를 먼저 읽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동경대 전공투는 이 중에서도 개인적인 실존을 우선시한 운동단체다. 각자 개개인이 각각의 공간을 창출하는 1인 사유체제이며 역사체제이다. 그런 이들이 연대를 가지고 같은 역사인식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모인 것이다.

 

이에 반해 미시마 유키오는 고래로부터 이어오는 국가와 민족의 전통과 폭력(!)을 이용해 현실의 부조리를 초극하고 탈인간화의 정점에 국가를 올려놓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미학에 자신을 내던진 행동주의자다. 신화적 정점에 오른 국가 앞에서 인간의 가치는 개개인의 존재가 아닌 신화속의 구성자로 남는다. 그 역시 같은 이유로 동지들의 연대를 원한다. 시대초극을 위해.

 

둘 다 현실부정은 똑같지만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다.

 

결국 둘의 토론은 [공간]으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난다.

팽팽한 평행선상에서 300대 1의 격론이 펼쳐진다. 당시 일본 최고의 지성이자

동경대에서도 실존주의로 무장한 전공투의 현학적인 언어빨도 기죽지만

같은 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펜으로 먹고 살던 미시마의 대응도 범인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어필한 것은 미시마쪽이었던 것 같다. 보다 평이한 어법으로

공간과 일본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지만 자신의 주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공간의 탈피에서 시작해서 그 속의 자연 자연속의 미학과 신- 천황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는 이 내용은 난해하고 복잡하고 질서 없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큰 줄기가 있다.

일본인의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현실을 넘어선다가 전공투의 요지이고

일본인의 태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며 그 본질에 흡수되는 게 현실타파라는 게 미시마의 요지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고

두 집단은 나름대로 비장하게 끝이 난다.

 

전공투는 결국 정부와 거대언론(하여간)의 협잡에 의해 노선 자체가 왜곡되게 알려지고 폭력노선이 우세하게 되며 결국 계파간의 살해 +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출현이라는 비참한 운동의 몰락을 맞게 되며

 

미시마는 자신의 주장대로 천황의 신성회복과 군대의 각성을 주장하며 총감부를 습격, 점령해 일장 연설을 하지만 아래에서 연설을 듣던 청년장교들이 조소를 보내자 일본도로 배를 그어버리고 자결한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30년 뒤 모여서

그 때의 일을 추억하는 것으로 이 장황한 책은 마무리되지만

참으로 서글프기 그지없는 역사이다.

 

어차피 둘은 예정된 파멸을 위해 달리는 존재들이었다.

역사의 해체를 위해 뛰는 전공투에게 기존질서가 호의적일리 만무하며

신성일본을 위해 죽음과 타살을 가져오겠다는 미시마를 누가 받아줄 것인가.

 

이 둘은 당시 정권에게 어찌되었던 가시 같은 존재였으리라

80년대 대한민국 군사독재에 맞서서 싸운 두 진영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민주 재야세력이나

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정권에 대항해 싸운다는 한신대를 기점으로 한 KNCC 계열이나

둘의 타도 대상은 같았지만 지향점은 확연히 달랐던 것과 비슷하다.

휴머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공통분모.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한쪽은 민주화 이후 이합집산 하면서 결국 [먹고 사는게 장땡이여]식의 구 군사집단에게

권력을 자리를 내 주었고 KNCC는 한기총이라는 돈 많고 신도 많은 듣보잡 그룹에게 대한민국 기독교의 교통(敎統)을 내 주지 않았는가

 

일본의 전공투세대 역시 흡수당했다.

뒷장의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됐을 법한 상처 입은 노병들의 자기존재 확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시절 보다 훨씬 많이

일본이라는 폐쇄성에 경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전히 현학적인 변설과 사회인식의 통찰은 있지만

예리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히피세대도 30년 후 이념이 아닌 경제에 종속되었고

일본의 전공투 역시 신자본주의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나마 유럽만이 연대의식으로 인한 EU를 탄생시켰다지만

그 역시 경제적인 블록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30년 후의 모임 역시 애매하고 현란한 단어의 잔치로 끝난 채

어정쩡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책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패담이며

그리고 살아남아 힘이라고는 숟가락 들 정도밖에 없지만

정신은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의 일갈이다.

 

그냥 이대로 살게 되면 좋든 싫던 [이념]이 아닌 [경제]에 의해

종속될 것이라고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그들은 미시마를 은연중에 그리워하고

2시간동안 본 그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을 초극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는 절망감이 목숨을 던진 자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미 전공투의 연대는 끝났다.

하지만 연대는 의식이 있으면 다시 규합될 수 있는 법.

 

이 책의 겉표지에 있는 글귀.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말의 뜻하는 바를 책을 다 읽고 알 수 있었다.

진정으로 모이지 않으면 세계에 개개인이 먹혀버리는 시대가 올 것이기에.

 

전공투와 미시마가 보여준 것은

세계사를 이어가는 작은 무대의 소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모를 무서움과 희망이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과연

이 나라와 이 시대에 연대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연대가 있다면 무너지지 않으리라.

 

참으로 장황하기 그지없는 리뷰였다.

 말을 첨삭해고 손 봐서 썼어야 하는데....그럴 스태미너가 없었음을 양해해 주시라.

 

p.s)

동경대 인간들의 현학적인 발언 + 60년대 고유의 이미지적인 언어남발은 정말 2000년대에 독서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라.

 

p.s 2)

이 책이 오싹한 게 뭐냐하면

1부(미시마와 전공투의 토론)를 다 읽고 나면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가 대충 나온다는 거다.

말하는 것에 사람들의 미래가 드러난다.

아마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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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만화였다.

사실은
햄버거를 사 먹으러 터덜터덜 가다가
좀더 시각적인 재미를 주고자 서점에 들어갔고
서점에서 사람들을 피해 만화판매 코너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말 그대로 눈에 그대로 들어온 걸
뭐라 할까. 햄버거 3개는 사먹을 돈을 날렸다.


(일견 대자대비해 보이는 킬러의 눈빛...)

그래픽노블의 좋은 점은 시간을 금방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분량의 소설이라면 2배는 더 걸렸을 법한 텍스트를 시각화의 도움으로
2시간 정도에 완독할 수 있었다. 정 반대의 경우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인데 
심각하게 텍스트가 시각화되는 연상작용을 가져와서 같은 분량의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린 경험이 있다.
V for Vendetta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의 빈약함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설정의 억지스러움은 차치하고 말이다.

일단 알란 무어의 정치적 스탠스가 어디쯤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워치맨을 읽은 뒤에도
궁금했지만 이 책을 읽은 뒤는 더욱 궁금해졌다.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철인정이나 아나키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협소한 지식의 산물일 뿐이고.

책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범속함을 벗어난 주인공의 초월적 의지와 주인공을 따르는 추종자.
그리고 전체주의로 표현되는 외부환경에 대한 투쟁사이다.
일인의 군대가 되어 전체의 부당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는
아나키즘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데
( 지금 읽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전공투]의 핵심과 비슷하다)
물론 만화같은 방식이 현실화 될 리는 만무하다고 여겨 지지만
책에서 튀어나오는 그림과 활자의 공포감은 상당한 수준이고
나오는 대사들은 말그대로 [적재적소를 치고 빠지는]맛을 준다.

물론 단점들도 눈에 뜨인다.
인과관계를 중요시 하는 분들이 읽다보면
뭔가 화장실 갖다가 그냥 나온 기분이 들 정도로
V의 탄생과 발전과정이 애매하다는 것.

비주얼 안에 숨겨둔 상징주의가 너무 많아서 나처럼 한번 후다닥 본 사람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한 5년 전 쯤 읽었으면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볼 만한 독서평이 되겠지만
지금 2009년에 읽으려니 도저히 관조적인 입장에서 보기 힘들다는 거다.

만화적 비약과 상상에 의한 국가 운영방식이야 하드코어하다 치더라도
(그런데 이게 상상이라는 보장이 없잖아?)
마지막 결말 부분에 가서 나타나는 대중과 정치도구의 충돌부분은
지금 극동의 모 국가상황에 비추어볼 때 전혀 괴리감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내가 봤을때는.


(뭔가 이 빈 부분을 텍스트로 채우고 싶은데 그건 몇 년 지난 뒤에 채우던지 그냥 공란으로
두던지 해야겠다.난 솔직히 인터넷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그냥 11월을 기억할 뿐.)





이 책을 예전에 영문원서로 사 보겠다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속을 펼쳐보며 참 야물딱진 꿈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수직낙하하는
독해실력으로 이 책을 읽었다간 아마 한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P.S) 사실, 이 책과 같이 집었던 첫번째 책은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책을 차후로 미루고 세익스피어의 [리처드3세]연극본을
       같이 사 들었다.
    
       권력해체자와 권력에 미친놈을 같이 보고 싶었나보다.

p.s 2) 이 책 덕에 읽고 있던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는 하루 더 늦춰져버렸다.
         아, 이 사람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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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랫만에
홀로 심야 마지막편을 보고 귀가하였다.
좋은 좌석이었다.
사람들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만 그건 욕심이겠지.

한마디로 영화를 줄이자면
[삶에 대한 노인의 혜안]이라고 할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품을 보다보면 단호함이 느껴진다.
시공간의 차이, 혹은 관계의 차이, 그리고 그것을 마무리짓는 해결방식의 과정.
이것이 그를 다른 이들과 차이짓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영화가 아무리 서정적이건 폭력적이건
그는 날카롭지 않은 둔기로
퍽썩 찍어내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늙은 참전용사의 고립감.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관계. 관계 그리고 또 다른 관계.
그리고 연장되는 관계와 또 연장되는 고립감과 긴장감
그리고 늘 그가 사용하는 마지막 도구까지.

여타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그의 얼굴만큼이나 메마르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늙는 방법을 알았달까.
여전히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혜로와질 수록 뭐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끄집어내 줄 수 있는 잘 숙성한 나이가 되었다.

고향에서 상경해 살림을 차린 아들을
시골에서 방문한 아버지가 며칠 아들집에 묵었다가
다시 낙향하기 전
꼬깃꼬깃 접은 돈을 용돈하라고 아들에게 찔러주는 느낌의 영화.

p.s)
엔딩 크레딧을 내리다가 잘라버린 센트럴 씨너스8관이여
저주있으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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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펜싱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던 97년도 프랑스영화
당시 신림동을 방황하던 (고시생이었던 적이 있었다우. 믿거나 말거나)시절
퀘퀘한 비디오방에 들어갔다가 왠지 모를 끌림에 이끌려 빌려본 영화인데


감독은 필리페 드 브로카,
주연은 다니엘 오테이유. 뱅상 페레, 마리 질랭
상당한 호화캐스트였다.

이 이야기는 19쓰여진 역사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프랑스식 복수극이다.
칼 하나에 젊음을 걸고 사는 협객 Lagardere (이 이름을 뭐라고 읽어야 하나? 라가그데레?)는
당시 최고의 절정검객이자 젊은 한량이엇던 네베르 공작과 검을 겨루고
검우(劍友)가 된다. 현피를 떴다가 절친이 된 두 사내는 우정을 나누는데 곧 네베르 공작은
사랑하던 여인을 맞아 결혼을 하고 어여쁜 딸을 낳는다. 

(이름도 발음하기 뭐시기한 Lagardere역에 다니엘 오테이유)

(비장의 검술 네베르 공격법을 지닌 네베르 공작 역에 뱅상 페레)

그런데 늘 행복하면 영화가 안 되지.
네베르 공작을 없애면 자신이 가문의 후계가 되는 사악한 곤자그백작이 신혼가정을 습격한다.

(두부썰듯 습격자를 학살하는 네베르 공작, 그러나 몹 앞에 장사없다...)

신기의 검술도 잠시뿐, 네베르 공작은 암살자들의 쪽수에 밀려 처절히 살해당하고
그의 친구 Lagardere는 공작의 마지막 혈육인 딸 Aurore(아우로레? 이거야 원)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 유랑의 길을 떠난다.
언젠가 정당하게 Aurore에게 계승권을 찾아주고 친구의 핏값 청산을 다짐하면서!

그 뒤 유랑민촌에서 부녀행세를 하며 다니는 Lagardere와 Aurore.
이미 10여년이 흐른 뒤 Aurore는 눈부신 여인이 되어 있었다.

(팍삭 늙은 다니엘 오테이유와 대조되는 마리질랭...아 진짜 곱다)

이미 곤자그 백작은 부와 명예를 움켜진 시장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고
Lagardere는 그의 비밀을 얻기 위해 곱추흉내를 내며 그의 측근이 된다.
(le bossu는 곱추라는 단어다)


어느날 Aurore는 시비가 붙어 아버지가(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Lagardere)전해준  네베르공격법을 쓰게 되고
곤자그는 사라진 핏줄이 나타남을 알게 되는데...

여차여차 해서 내용은 화려한 복수극으로 끝나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해피엔딩이었다.
아아 이게 해피엔딩이라면...나로써는 감당 못할 해피엔딩이었다.
스포일러 수록
Aurore는 나중에 Lagardere가 친부가 아님을 알게 되고 Largardere가 곤자그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에게 달려들어 격렬한 키스를 하면서
지금까지 그를 사랑해왔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이 뭥미!
원작 소설도 이렇게 끝나는 것 같더라만. 이게 뭐임! 10년간 부녀지간 아니었냐!

이 영화 하여간 그렇게 본 영화다.
보다가 마리질랭의 미모에 홀딱 반해서 끝까지 보기도 했지만
펜싱에 대해서 정말 호쾌하게 쓰여진 영화랄까

(아줌마, 75년 생인데 요즘 뭐하시나...)


(스페인 개봉시 포스터, 엔 가르디아! 우리나라 비디오에는 온-가드 라고 써 있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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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도구를 사용해서 극적 긴장감을 펼치는 웨스턴은 상당히 많았지만
아예 그걸 대놓고 제목에까지 써 놓은
그리고 성공한 작품 중 하나.

(사진이 아닌 이런 포스터가 참 끌린단 말씀...)

예전에 TV에서 주구장창 틀어주던 이탈리안 웨스턴이었는데
지금은 스토리라인이 잘 생각이 안 난다.
남북전쟁 후 실업자가 되어버린 형과 동생이
서부로 가서 알콩달콩 살아보세~ 하고 떠난다.
동생이 먼저 떠나고 형은 좀 있다가 어떤 갱집단에 해결사로 들어가는데
나름대로 총 좀 만지는 형이 맡은 첫 직업이

아 글쎄 동생을 죽이는 일 아닌가

이런 뭐같은 일이 있나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생은 갱단에 의해 죽고
형 역시 개기다가 총에 맞는데
동생이 작별하기 직전에 가슴에 넣어준
은화 1불이 대신 총알을 맞아서 극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형의 비장한 복수극.

황야의 은화1불은 영화 자체는 평범했지만
메인테마는 귀에 짝짝 달라붙는다. 휘파람을 이용해 만든 스코어중에서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무법자]시리즈에 비견되는 명곡.

참고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체조선수 출신의 [줄리아노 젬마]였다.
그런데 너무 이름이 이태리틱(?)하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몽고메리 우드]로 바꾸고
영화를 개봉했다. 이 남자 지금봐도 정말 훤칠하니 잘 생겼음.

그뒤 이것저것 배우생활 하다가
이 조각처럼 생긴 아저씨는 현재
진짜 [조각가]가 되어 있다고 한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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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루이

見.聽,感 2009. 3. 5. 11:38


밖에 나갔다가 한 두시간정도 비어서 잠시 만화방에 들려 (우후~ 여전히 변치 않는 풍경이라니) 보고 싶었던 만화를 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고 싶었던]이 아니라 [보아야 했던, 혹은 궁금해 미치겠던]만화였다.

시구루이. (死狂い)
일본 무사들이 경전처럼 신봉했던 [하카쿠레]에 나오는 말이란다. 뭐랄까. [죽음에 대한 열정] 정도로 해석이 될까?
- 하카쿠레 : 17세기 말엽 야마모토 쓰네모토가 쓴 무사도의 정신에 대한 글.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나와 있고
                  포레스트 휘태거가 주연한 [고스트독]에도 언급이 되는 유명한 책이다.
                  득도와 처세술과 무사의 신념이 똘똘 뭉친 책인데...치세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책이나 난세에는
                  사람을 귀물(鬼物)로 만드는 책인 듯 하다. 2차대전 때 일본군 수장들의 정신적 모토였다는.
                  가장 유명한 첫 구절. "무사는 죽음을 언제나 각오하고 무사도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여담으로, 버추어 파이터의 닌자 [카케]가 쓰는 무술이 [인법, 하카쿠레류]

원작자 난조 노리오가 쓴 역사물을 작가가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만든 작품인데
뭐랄까.
신체해부에 대한 지식과 내장기관과 피와 가죽에 대한 헌사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아귀같은 짐념에 대한 서술?

굉장히 잔혹하다. 데셍 자체가 잔혹함의 극대화를 가져오고 나오는 인물설정 하나하나가 악귀나찰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러티브는 확실히 발군. 작화의 수준은 상상 이상.

보다 보면
인간세상의 모든 것이 한 줄기 날리는 들꽃만도 못하다는 생각과 함께, 인간은 껍데기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역시 이 만화 최고의 대사는 1권에 있던 대사.
"중세는 소수의 새디스트와 다수의 메저키스트들이 만들어낸 사회였다."

......이 만화는 실화를 극화한 것이라고 한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가문 권력실세의 도발적 충동에 의해
한 번(藩)의 최고 실력을 가진 검사22명이 불려나와
진검으로 성 안에서 11회의 1:1 진검승부를 벌였고
생존자는 딱 6명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걸 모토로 쓴 것이 난조 노리오의 [쓰루가성 어전시합]
그걸 토대로 그린 것이 [시구루이]

....참.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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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는 3개. (우리나라에 무법자라고 나온걸 보자면)

1. 황야의 무법자 (A fistful of dollars) - 쿠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의 정확한 리메이크판.
                                                      두 세력사이에서 이리저리 이익을 재는 무법자가
                                                      결국 사건을 다 해결한다는 스토리...
                                                      나중에 부르스 윌리스의 [라스트맨 스탠딩] 역시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요짐보의 리메이크판.

2. 속 황야의 무법자 (A few dollars more)-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리 반 클리프의 콤비가 어울리는
                                                     본편에 설명하는 영화. 현상금 사냥꾼과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나타난 외로운 총잡이의 키스톤 콤비네이션.

3.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 너무나도 유명한 3각결투. 황금에 눈이 먼
                                                    현상금 사냥꾼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인간군상의 명멸.
                                                    일전 게시물에 소개한 [무덤에서 미친듯 뛰어다니는 장면]이
                                                     바로 이 영화에 등장한 명장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동영상이니...)

비명횡사한 여동생의 마지막 복수를 위해 총을 뽑아든 퇴역장교 리 반 클리프와
그를 암암리에 도와주는 현상금사냥꾼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악당
지안 마리아 블론테 (이 아저씨는 1편 황야의 무법자에서 죽었는데 또 악당으로 나옴..-.-)

죽은 누이와 나눠가진 오르골, 그리고 결투.
오르골의 소리와 음악의 절묘한 조합은 지금봐도 어색하지가 않다.

이 장면이야말로 Classic 아닐까?
화면이나 영화가 아니라 그 기저에 깔리는 사내들의 태도는 고풍(古風)스럽기 그지없다.
결자해지. 1대1.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신성한. 그리고 정정당당한.
낭만이 살아있던 웨스턴 다찌마리의 명장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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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와 로버트 미첨의 아들이자 절정 꽃미남이었던
 크리스토퍼 미첨이 열연한 스릴러 로맨스. [썸머타임 킬러]의 오프닝 테마.

크리스토퍼 미첨은 이 영화 이후 별 뾰족한 거 없이 사라졌고
올리비아 핫세도 그 뒤로는 좀 지지부진 하지 않았던가...생각이 가물가물.

Run and run, leaving loneliness and pain behind.  
Wonder who can tell me where's the happiness?  
Wonder why, why are happy sets so far away?  
Living backwards for a better chance  

달려라 달려 고독과 고통을 뒤로 하고서  
행복이 어디있는지 누가 말해주려나 ? 
왜 행복들은 그렇게 멀리 있는걸까?
더 나은 기회를 위해 예전으로 돌아가 살아야해  

Run and run, Run and run  
Run and run making circles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원을 그리며 
 

While I'm looking for, looking or waiting for  
Maybe I'm waiting for a slash of sunshine  
Wonder why… why are happy sets so far away?  
Living backwards for a better chance  

그 무언가를 찾는 동안 기다리는 동안  
아마도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기다려왔지  
왜 행복들은 그렇게 멀리만 있는지  
더 나은 기회를 위해 예전으로 돌아가 살아야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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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Country lovers의 곡이다. 아마 썸머타임킬러를 몰라도 이 노래는 아실 듯.

무엇보다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양반은
앞전에 소개했던 서부극 [장고]의 음악을 맡았던 루이스 엔리케 바칼로프.

루이스 엔리케 바칼로프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제자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영화음악계에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사람들에게는 그냥 모리코네의 제자라는 기억이 강했으니...

그러나 후일,
이 사내는 자신의 스승보다 먼저 아카데미 음악상을 타게 되니
그때 루이스 바칼로프가 작곡한 영화가 바로
[일 포스티노]였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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