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그 날이 되었다.
세세한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이 추억인 바, 분명 체육시간 전에 교과가 있었을것이나
난 다른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생각나는 건 교실 책상을 뒤로 다 밀어놓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가운데
널찍하니 만들어놓은 교실 앞마당에 아이들이 나와 춤판을 질펀하게 벌였다는 기억 뿐이다.
짜 놓은 조대로 임의대로 선생님이 시켰다는 기억은 나지만 그 순서상 우리는 거의 끝줄이었다. 손들어서 먼저 하겠다는 팀부터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 팀에서 선생님이 손들라는데 먼저 들 놈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쨌건 춤만 소화하자는게 우리 생각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전체 동작만 딱딱 맞으면 안 좋은 점수야 받겠느냐는게 우리 생각이었고, 다른 놈들도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라는게 우리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는데...
"야, 저...저기봐."
갑자기 동료 중 한 놈이 교실 한 귀퉁이를 가리키며 [벤허]에서 베두윈 족장이 멧살라가 몰고 온 그리스 전차 보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가.
아뿔사, 청바지에 청자켓에 흰 티를 맞춰입은 일단의 사내애들이 보였다. 거기에 어디서 줏어왔는지 모두 손에 백장갑까지 끼고 있는 것 아닌가! 일단 뽀대가 다르다는게 이런 거였는데 그쪽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자유도 100%의 프리스타일 룩이었던 것이다.
"쟤들 뭐냐?"
아닌게 아니라 바로 다음이 그녀석들 차례였다. 이럴수가! 생전 처음보는 마름모꼴 대형! 게다가 그놈들이 고른 노래는 가요도 아니었다. 무려 팝! 이제는 작고하셨지만 일세를 풍미하신 팝의 황제 [마씨형님]의 노래였다.
(드릴러 아니면 beat it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왜 노래는 생각나지 않는건가.)
지금와서도 감히 말하지만 그 친구들의 춤은 군대 [사단경연 연무대회]에 나가도 당당히 사단장표창쯤은 먹고 남을만한 것이었다. 그 박자에 그 비트에 어떻게 연습했는지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나중에는 거의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고 있었다. 구경하던 우리 네명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라앉았고, 구경하던 여학생들은 우와~ 하는 감탄사를 저절로 입에 달고 있는 중이었다. 그 녀석들 춤이 다 끝나고 난 뒤 우리 네명은 고개를 교실바닥에 처박을 정도로 떨구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의 한국 발라드+인도구루 비전무용이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까...는 고사하고 이젠 제발 팀중에 낙제점만 받지 말아다오로 목표가 급수정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매정한 법이다. 바로 몇 팀 뒤에 호명된 우리 팀.
"야야, 사다리꼴"
본존불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뭐?"
"사다리꼴로 서자고."
"누가 앞에 설건데"
"너랑 너, 그래도 우리중에 작쟎아"
네명밖에 없는데 뭔 놈의 사다리꼴. 하지만 일단 포메이션을 짜기는 해야 했으니, 결국 나와 안경친구, 두 샐러리맨이 앞에 서고 본존불과 힙합맨이 뒤에 선 자세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바로 시작되는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일단 사람이 멍석에 올라가는게 힘든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하면 오기로라도 발동이 걸리는 법이다. 음악이 나오자 연습한대로 순조롭게 우리들의 춤사위는 흘러갔고 아이들도 막판에 오니 춤 보는 것도 지겹다는 듯 무념무상의 자세로 듣고 있었다. 선생님의 표정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 대충 점수는 나오겠구나 싶었다. 어서 빨리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춤을 추다 보니 어느새 임병수의 노래는 후렴구에 도달하는 중이었다.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구루님의 비전 춤사위 시전.
순간, 교실의 공기 자체가 이상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이들의 표정들이 갑자기 괴이해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여자애들이 눈이 점점 커졌고 남자애들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러던 한 순간
우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에 대폭소가 터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오 마이 갓.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은 열심을 다 해 활짝활짝 방긋방긋 하면서 옆으로 스리스텝 게걸음을 하는데 웃는 네놈들은 무에냐 라고 하고싶었지만 말은 못한 채 얼굴이 벌겋게 되어 화끈거리기 시작하고, 구경하는 애들은 웃느라 얼굴이 벌겋게 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애들에게 물어봤다. 왜 웃었냐고. 그러자 한다는 이야기가
네 명 다 손은 방긋방긋 거리는데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는 거다. 세상에 미련을 버린듯한 네 명의 초탈한
얼굴이 방긋방긋하면서 게걸음을 걷는데 안 웃기는게 이상하지.
하여간 그 당시엔 그런 거 생각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
[이 노래는 후렴구가 세번이나 있다]는 것 뿐이었다. 1절,2절, 그리고 간주후 바로 후렴
1절 후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2절을 시작하자 웃음소리가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안정될 것처럼 보이자마자 다시 시작되는 두번째 후렴구!
아이들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기 시작했고 점점 모션이 커지기 시작했다. 뒹굴면서 웃는놈도 생기기 시작했다. 선생님조차 표정이 좀 희한해졌던 걸로 기억한다.
공연하던 우리들은 이제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관객들이 예술혼을 몰라줘도 쇼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대 매너 아닌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우리 네명은 정말 혼연일체가 되어 구루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간주가 끝난뒤에 나온 마지막 후렴구에서 우리는 정말 힘차게 방긋방긋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들은 웃다가 지쳐서 교실바닥에 엎어졌고, 웃다가 우는 놈까지 발생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구루님이 말씀하신 [임팩트]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는 무용이었던 것이다. 이제 머리는 생각하라고 달려있는 기관이 아니었다. 오직 노래 끝나기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오 주여, 제가 이 어린나이에 뭔 죄를 졌다고 이렇게 절 시험하시나요.
결국 음악은 끝이 났고
우리는 음악이 멈추고 난뒤 텅빈 무대에 남아...아니, 텅빈 무대를 어서 빨리 뒤로 하고 후다닥 관객속에 숨어버렸고 애들은 우리를 보면서 계속 키득키득 거렸다. 오 구루께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배신한 것인가. 본존불 저놈이 먼저 누나하고 사이가 좋았는지 인과관계를 파악한 뒤에 무용을 짜는 거였는데...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을 때, 선생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오늘 가장 잘한 팀은 둘이예요"
집중& 주목하는 아이들의 눈.
"맨 처음 팀은 팝송으로 연습한 누구누구네. 정말 딱 떨어지고 집단댄스의 강점을 잘 살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두번 째..."
아이들이 선생님의 두번째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네 명. 창의적(?)이었고...무엇보다 열심히 했다는게 눈에 보였어요. 다들 웃는 상황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끝까지 자기들의 춤을 보여줬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줍니다."
믿겨지지 않는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설마 구루님의 안배가 아이들의 폭소를 유발하는 것까지 감안했을지는 아직도 미심쩍지만 하여간 선생님께서는 그 희한한 퓨전공연에 대해서 후한 안목으로 대하신 것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이 덜커덕 내려가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본존불은 갑자기 자비하신 표정이 오만방자한 얼굴로 바뀌는 중이었고...
하여간 그렇게 해서 우리의 공연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나마 앵콜공연을 마이클잭슨 사단이 한 게 다행이었다. 우리에게 앵콜을 선생님이 요청했었다면 아마 모두 창밖으로 뒤어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벌써 30년 가까이 흘러가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 임병수의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반 남아있지 않지만
가끔 소소하게 좋은 날씨에 햇살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가끔 그 때 그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남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간의 잔상에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같이 놀았던 그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