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X년 초여름인가 가을인가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 시절, 

그 당시 우리들은 행복했었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과외한다고 엄마들이 거품을 입에 물고 애들을 노란 버스에 갖다 처 넣지도 않았고, 놀이터에는 친구들과 깡패들이 우글우글 거렸으며, 학교 쉬는 시간에는 괴상한 앙케이트를 돌리는 여자애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고 학교 운동장엔 공 하나에 목숨걸고 우르르 달려가는 아이들로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난 그 해 6학년이었다. 
참으로 아쉽게도, 난 전술한 국민학교 시절의 자유로움을 그다지 좋아하지 못하는 소년이었던 듯 하다. 공놀이도 좋아하지 않았고, 하교하면 책이나 집에서 보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500년]이나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20년 뒤의 사회생활]을 그대로 예습하던 인간이었다. 말 그대로 직장과 집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살던, 
어른들이 보기엔 [참으로 모범적]이지만 나나 급우들이 느끼기엔 [참 더럽게 재미없게 사는]부류의 아동이었다.

요즘같았으면 이지메 목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엔 아이들간에 나름대로 룰이란게 있었고 모두가 한 명을 공격하는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다고 영 대인관계가 쑥맥은 아니었는지
같이 쑥덕거리며 말하던 친구들이 너덧은 있었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을 하는 걸 받아주던 여자애들도 있었으니 
진짜 중견기업 대리의 일상사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 친한 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막상 절친한 사이는 없는...고독한 도시남자의 
생활을 국민학교 6학년때부터 거듭해서 불혹의 나이까지 왔으니,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은 그 시절의 투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쨋건 그렇게 흘러가고 있던 그 해 초 여름인가 가을인가
평온한 직장...아니 학교생활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별다른 파문이 없는 학교생활을 영위하도록 힘써주신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따스한 체육시간에 툭 하니 한마디를 던지신 것이다.

"얘들아, 이번 체육 중간고사는 협동체육으로 대신하겠다."
선생님의 이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큰 파문을 가지고 올 줄이야.

"이번 체육 중간고사는...집단 댄스(Dance)다!"

포크댄스? 보이스카웃이 캠핑가면 사내들끼리 손을 잡고 왼쪽으로 빙빙 도는 거 말씀이신가?

"곡을 하나씩 정해라. 유행가도 좋다. 친구들끼리 안무를 짜라. 어떤 안무도 괜찮다. 너희들의 협동심을 보겠다."

엥?
이 양반이 뭐라는거야?

선생님이 편을 정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친한 애들끼리 팀을 맞춰서 
너희들끼리 곡을 짜고
안무를 만들어서
1주일 뒤에 급우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과정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친한] 애들끼리 [팀]을 짜서 [유행가]를 골라 [안무]를 짜라는데
괄호안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이라는 것이 대체 나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없는게 아닌가.

조선왕조500년을 보고 사극을 하거라! 라고 했다면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이라도 할 자신은 있었지만 춤이라고는 궁중 부채춤밖에 TV에서 못 본 난데...뭘 어쩌란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그 담이었다.
갑자기 아이들이 우르르 분자구조 배열되듯이 샤라라락 퍼지면서 이합집산을 하더니
지들끼리 마구 뭉치는거 아닌가!

여자애들이야 여자애들끼리 뭉치는 게 당연하고
같이 공차고 노는 놈들끼리 뭉치고
같이 장난감 만지던 놈들끼리 뭉치고
같이 껄렁하던 놈들끼리 뭉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인간은
나 밖에 없는 거다.
그나마 같이 말 섞던 놈들은 지들끼리 모여 숙떡거려
그렇다고 여자애들 사이에 청일점으로 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세상에 다급한 경우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 이 고독하고 비정한 사회여.
혼자 탈이라도 쓰고 살풀이라도 해야하는 건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이런 천인공노할 과제를 준 선생님에 대한 적개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며 유행가라고는 [밤비내리는 영동교]밖에 생각이 나지 않고 있었는데...

"너희들 없냐? 그럼 같이 해라."
선생님의 말에 나는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런

나같은 놈이 세 놈 더 있지않은가.
그 세놈은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지라 쭈볏쭈볏 조금씩 모이던 중이었고
나는 재빨리 저기라도 껴야 개망신은 안 당하겠다 싶어 조르륵 달려가서 합류햇다.

그렇게 급조해서 만들어진 남자 4명
프로젝트 댄싱팀.

이미 그때 우리 넷은 다 예감하고 있었던 듯 하다.

앞으로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 continue -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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