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나는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할 동료들의 면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중 한명은 나처럼 모범적 샐러리맨의 삶을 사는 도수가 좀 되는 안경을 낀 동네친구로, 행동반경과 생활양식이 거의 나와 비슷한 친구였다. 우울한 직장인의 삶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같은 그룹에 모인 것이었다.

또 하나는 스포티한 모습에 약간 껄렁대는 스타일의 친구였는데, 사람들하고 잘 노는 것 같아도 어느 샌가 둘러보면 인간들은 사라지고 영원한 단짝인 그림자와 같이 서 있는걸 발견하고 교실로 들어오는, 뭐랄까 고독한 힙합전사같은 녀석이었고
 
마지막 한 명은 반에서 떡대도 좀 있고, 남성호르몬의 발현도 상당하여 이미 코 아래 시커먼 수염이 자라있는 데다 머리도 곱슬이고 늘 졸린듯한 눈을 가진, 어느 산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불이 보충수업을 받으러 내려온 듯한 인상의 친구로 뭔가 심도깊고 이해못할 발언으로 친구들이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시던 분이었다.

가히 환상의 조합이었다.
무슨 사조영웅문도 아니고, 교실 네 귀퉁이에 할거하던 우울한 영혼들이 한데 모여서 팀을  이뤘으니, 가히 실미도 부대원들에 비견되도 손색이 없는 팀원들이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우리는 운명공동체. 중간고사 점수가 달려있는 거 아닌가.
우리는 힙합전사같은 친구의 집에서 이틀 후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이틀 뒤, 그 집에서 첫번째 안무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첫번째 관문 [친구]들과 [팀짜기]코스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바로 우리는 노래를 정했다. 노래를 정한 것은 본존불이셨다. 그는 우리에게 데크에 노래를 하나 꽂더니 들려주면서 말을 했다.
"이 노래가 우리한테 딱 맞는 것 같아"

노래제목은 임병수의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임병수가 누구인가?
우리나라 역사상 아마 유일무이하게, 볼리비아에서 가수로 데뷔한 뒤 한국에 와서 가수활동을 하고 히트작을 내신 분이시다. 윤수일의 [아파트]를 [아파뜨라멘또]로 바꿔서 부르신 분이기도 하고...무엇보다 대한민국 가요사에 길이길이 빛날 바이브레이션의 소유자 아니신가. 하여지간 우리 네명은 방에 걸터앉아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를 경청하고 있었는데...

"야, 이거 여자애들이 해야 하는 노래 아니야?"
소프트 발라드 댄스곡이었으니, 누군지 모르지만 그 지적은 나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갈하는 본존불.

"우리가 더 빠른 거 할 수 있어?"

침묵.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는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이게 우리들한테 잘 어울릴거래"

국민학교 재학생의 입장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누님]이라면 이미 산전수전 인생의 만경창파를 다 헤치고 삶을 관조하시는 분 아닌가. 우리 수준에서 고등학교 누님의 말은 거의 갠지스강에서 득도하신 구루(GURU)의 말씀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냥 하자"
"응"
이렇게 [선곡]도 결정.

"무용은 어떻게 해?"

"우리 누나가 좀 알려줬어."

아, 위대하신 구루의 은덕은 한이 없어라. 밤에 본존불의 머리맡에 나타나 휘영청 춤사위 한바탕을 보이고 가셨다는 누님의 비전을 우리는 본존불의 지도하에 연습하기 시작했다. 뭔가 좀 다소곳한 포즈가 많이 나왔지만 이게 어디인가! 춤이라곤 부채춤밖에 모르는 내게 감지덕지지. 우리 넷은 한창 노래에 맞춰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갑자기 본존불이 카세트를 딱 정지시켜버렸다.

"왜그래?"

"여기서부터가 중요해"

후렴구 (임병수의 이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면 알 것이다) 부분이 낭창한 바이브레이션과 함께 반복이 계속된다. 어찌 보면 클라이막스고, 여기에서 뭔가 임팩트있는 동작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본존불을 지도한 GURU님의 말이었다.  역시 고등학교는 국민학교와 레벨이 다른 것이다.적재적소에 뭔가 터져나와야 심사의원의 눈에 띈다는 것.

"자, 여기서 손을 이렇게...방긋."

"방긋?"

"햇님이 활짝 방긋."

(아..미안합니다. 비주얼이 필요해서)

"으응...그리고?"

"얼굴은 정면으로 하고 몸은 틀어서 스케이트 타듯이 오늘발부터 죽죽 옆으로~"

아무리 봐도 기괴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이집트 벽화에서 보는 평면구도아닌가?


"그러니까 이 상태에서 얼굴은 정면으로 하면서 활짝?"

"그렇지, 후렴이 끝날 때까지 네번 오른쪽, 틀어서 네번 왼쪽으로 스케이트 타듯이 죽죽 옆으로~"

"야 이거 이상하지 않아?"

"우리누나가 그랬어."

구루님의 말에 어찌 반박을 하리오. 얼굴 한 번 못 본 미천한 국민학생들을 위해 밤에 시범까지 보여주셨다는데. 
어쨌건 그렇게 노래가 끝날 때까지 춤동작이 짜여졌다. 왠지 성정체성이 의심스런 동작이었지만, 그 때는 찬밥 더운 밥 가릴 여지도 없었고 거기 모인 네명 모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우리는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때까지 
임병수의 [사랑해사랑해 사랑해]후렴을 들으면서 안무를 반복했다. 그 때 가요기획사가 활성화되던 시절이었으면 아마 우리들의 인생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착각을 해보기도 한다.

"야, 근데 활짝 할 때 얼굴 표정은 어떻게 해?"

"음? 그런 말 없었는데. 그냥 있으면 되지. 뭐."

"그런가."

어쨌건 이렇게 마지막 관문 [안무]도 해결된 채로
운명의 댄스경연날은 다가오는 중이었다.

- continue -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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