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04.25 2011.4.24 2
  2. 2011.03.31 난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였는가 6
  3. 2011.03.09 즐거움을 잊지 마라 2
  4. 2010.03.12 계영배(戒盈杯) 4
  5. 2010.01.24 마음에 들었던 싯구
  6. 2009.12.23 결정이 늦어지는 이유 6
  7. 2009.07.07 새벽에 2

2011.4.24

수련장 2011. 4. 25. 01:01
1.
사람이 무언가를 계획할 때는
내 마음이 십리를 나갈 때 애써서 한 발자국 굳건히 디디는 심정으로 나가야 한다.

LG응원하고 있다. 엘레발치지 말자. 우리의 모토다.

사람 사귀던 다른 일을 계획하던
절대 설레발은 금물이다.

달걀 사오면서 부자 꿈꾸던 아가씨가 달걀 깨뜨리는 동화를
어렸을 적부터 봤으면서도 정작 커서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2.
봄이 오긴 오는 것인가.



3.
글을 쓴다. 쓴다. 하지만 귀찮아서 안 쓰는 날도 있다.
하루하루 습관이 되지 않으면 그것을 업으로 삼을 수 없다.
지겨워도 써야 한다. 그것이 우선인데 난 아직도 습관이 그렇데 들지 않았나보다

머릿속에 장황한 스토리라인이 있으면 뭐 하나
이러다 술먹고 까먹으면 그만인데

얼른얼른 부지런히.
하지만 천천히 정확하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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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일은 안 하고 웹서핑을 하다 종종 들어가는 커뮤니티가 있다.
남초커뮤니티인지라 여자타령이 주를 이루는데
가끔 보면 결혼 못한 솔로들에 대해서 애인이 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인생의 선배인양 지엄하게 뭔가 한마디 하거나 지식을 전수하려는 모습을 보곤 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혼자 있다.
원래 혼자는 아니었다.

아무려나, 가만히 그 가운데 글을 읽자니 모든 것은 사람의 욕망의 헛됨에서 비롯되나니
삿된 길을 버리고 정진하라고 써 놓았다. 맞는 말이다.

개뿔은, 지들도 다 그랬으면서. 확률게임의 승자가 된 것일 뿐인데 그것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욕망이 없는 애정이라는 것이 가능하냐. 다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도 되는거냐?
어차피 세상의 법칙은 불공평의 잣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없는 자는 뺏기고 가진자가 다 가져갈 것이라고 성경에 조차 써 있는 바, 사람의 일에 대해서
확언을 하는 사람은 나는 경계한다. 어느 날 내가 길을 가다가 하늘에서 산봉우리가 떨어져 깔려죽는 일이나
결혼을 해서 애를 갖는 일이나 똑같은 우연의 상황일 뿐이다. 그 빈도수의 문제일 뿐이지.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해냈다고 좋아한다. 교만이다. 

나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나도 성취한 자의 자리에서 교만하게 오시하며 내가 간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을 깔보며, 빈정대고
저들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좋은 충고랍시고 개인의 한정된 경험을 금과옥조인 양 이야기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이 글을 이렇게 쓴다는 것 자체도 개인의 생각이고 감정일 뿐이지 결코 어떤 식의
객관적인 사항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절대 객관적이 될 수 없으며 이성은 감성을 예쁘게 포장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설파하는 교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교만하다. 가진 것으로 교만하고 남들보다 시간이 많음으로 교만하고, 오래 생각하는 것으로 교만하고
글을 좀 쓴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남들의 화를 잘 돋구는 것으로 교만하고,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부화뇌동 하지 않는 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교만하지 않다고 믿는 것으로 교만하다.

오래 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 줄어들어야 함을 느낀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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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누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즐겁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일이 구체화 된 서술의 형태가 되어서 시각적 묘사와 심리적 묘사가 들어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지 못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짐이 되고 있었다.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글쟁이로 사는 건 힘들것이라는 단념이 맘 속 깊은 속에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세상에 글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찬사와 비평이 같이 들어온다. 둘 다 마음에 짐이 된다. 어떻게 써야 한다. 이렇게 써야한다 라는 나름대로의 강박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강박관념이 생기면 걱정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면 일을 멀리하게 되고 일이 멀어지면 관심이 사라진다. 그렇게 일은 시들해지는 것이다.

오늘 우연하게 J.D 샐린저가 한 말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이 글을 쓰는 이유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은둔해서 뭔가를 썼다. 작품을 발표할 성 싶더니 2010년 정월에 죽어버렸다. 뭘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뭔가 쓰고 있었다. 그는 즐거웠을 것이다. 머릿속에 까맣게 잊어버리고있던 공간에 다시 불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내가 좋아서 쓰는 거 아니었던가.

어슐러 르 귄 여사는 [어둠의 왼손]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더라.
"자기 안에 있는 신이 자기의 혀와 손을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는 것은 뭐란 말인가?"

그렇다.
모든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때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것들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빼앗기지 마라.

짐을 지우는 일은 굳이 찾지 않아도 세상에는 흔하니 네가 좋아하는 일을 [일]로 만들지 말라.

아멘.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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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戒盈杯)

수련장 2010. 3. 12. 23:20
조상들의 술잔 중에 계영배(戒盈杯)라 하는 술잔이 있다. 익히 최인호의 소설 [상도]로 유명해진 술잔이다.
잔의 7할 이상 술을 부으면 압력에 의해 아래 뚫린 구멍으로 술이 다 새어나가버린다. 끝까지 채우면 모든 것을 잃지만 요족함을 알면 그대로 머무는 술잔이다.

전설에 따르면 우명옥이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도공이 자신의 교만함을 깨우치고 만들어낸 술잔이라 한다. 세사의 명성과 부를 잃은 뒤에 만들었던 술잔.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절제의 미덕을 깨달았다한다. 사람은 대저 그러한가,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무언가 부족함을 깨닫는 것인가.

하지만 인간의 성정이라는 것은 항구하지 못하다. 처음에 교만하여 나중에 도를 깨우친다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욕망은 저절로 생겨나 커지는 법이며, 처음에는 소소하고 겸손하게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의 애초 부족함에 갈등하여 더 큰 욕심을 채우도록 발전하는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후자에 속하는 듯 하다. 처음 시작의 마음가짐은 소소하고 질박하더라도 계속되면 그 안에서 복락을 누릴 줄 알았으나 그것이 부서지고 좌절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차라리 이럴 바엔 사람이 욕심을 내고 예전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야함이 아니겠는가'하는 악받침 혹은 분노로 인한 욕망에 눈이 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애초에 10할을 채우지 못하고도 잔이 비었으면 한 번 10할을 채워보려 도전함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비루한 이야기다.
[전도서]를 쓴 유대의 왕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향락을 누려보고서야 모든 것이 덧없음을 깨달았지만
애초에 모든 것을 갖지 않고서도 그것이 쓸모없음을 알았던 법정스님같은 분 또한 존재한다. 둘 다 시작은 달랐지만
결국 도달한 곳은 같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한 성경의 말씀도 그것이며 집을 멸하여야 도를 얻는다는 불가의 말씀또한 그러하다. 사람은 늘 자신을 하루하루 죽여야만 스스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받을만한 말이 아님 또한 어찌 가슴아픈 것이 아니랴.

나는 오늘도 무언가 얻기를 갈구하고, 그것이 어제보다 낫기를 희망하고, 타인의 동정과 긍휼로 얻는 것이 아닌 자력과 소망함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기를 희망하지만 내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오늘도 바라본다.
사람은 스스로 갖지 못함에 절망하고,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절망하며, 변하지 아니하는 시간에 절망한다.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을 절망하고 자책하고 더 많은 것을 잃고, 잃을 수 없는 환경, 잃을 것이 없다 믿는 상황에서 또 다른 것을 잃고 또 잃어 나 자신조차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 가서야 나는 깨달음의 파편 하나를 줏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술잔에 술이 덜 채워지고 더 채워짐에 미련을 두지않을 것이요
어쩌면 술잔에 술이 담긴 것 조차 알 지 못하는 경우가 오지 않으리오.
죽기 전에나 한 번 그런 명경지수의 마음을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나
그 또한 내 욕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슬한 밤 가슴이 시리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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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錢無錢俱可憐(유전무전구가련) : 돈이 있건 돈이 없건 모두가 가련하나니
百年驟過如流川(백년취과여유천) : 백년 인생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누나
平生心事消散盡(평생심사소산진) : 평생의 마음 둔 일 모두 흩어버려라
天上白日悠悠懸(천상백일유유현) : 하늘의 흰 해는 유유히 빛나나니



당나라 시인 노동이 쓴 탄작일(歎昨日)이라는 시의 후렴이다.
어제를 한탄한다는 말이다.

시인은 무엇을 경험했을까. 


어제 일이 오늘로 이어지건 오늘 일이 내일로 이어지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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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은 순간순간 선택인 듯 한데
그 순간 무엇을 골라야하는 지 정말 힘들다.

첫번째는
내가 객관적으로 나를 벗어나서 그 상황을 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선택의 순간은 늘 급작스런 사건이나 외부의 상황덕에
감정의 급박한 변화를 겪으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두가지 상황이 모두 쉽게 일어나고
두가지 다 현명한 결론을 일으키는데 지난한 장애물이다.

첫번째를 하려고 한다면
머리를 차갑게 비우고 게으름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인지해야 하고, 미래를 인지해야 한다. 

두번째는 평정심을 가지고 첫번째로 돌아가야 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정작 닥치면 어버버버
그래서 세번째 필요한 것은 여유로움 인 듯 하다.

음식이건 그림이던 글이던
잔손질이 많이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는 지를 아는 타이밍 아닐까.

죽 나열해 보니
냉철함과 평정심과 여유로움과 시기를 놓치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제대로 된 결정을 한다는 이야긴데

내가 제갈공명도 아니고 참 지난한 일이네그려.
언제쯤 되면 시기에 맞춰서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순리대로 결정하되 옳은 일을 골라서 할 수 있을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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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수련장 2009. 7. 7. 07:37
대부분 곤궁에 빠진 처지를 가져오는 것은
주변환경에 의한 제어 불가능한 상황보다
나 자신의 미숙함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곤 한다.

사람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감정적인 동물이다.

그런데 이미 깨닫고 나면
상황이 종료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보통은 안 좋은 상황,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종료되는 게 문제지만.

가끔은
정신을 주변상황에서 놓아버리고
무념무상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 느낀다.

민감한 말과 반응과 행동들이
내 오감을 자극할 때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아무 생각하지 않는
그런 수련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구우일모(九牛一毛)같은 소소한 일인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날카롭고 예리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정작 필요할 때는 무뎌지고
쓸모 없을 때는 상처를 낸다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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