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0.05.08 2cm 2
- 2009.06.10 진일보 8
- 2009.04.21 Into the ring 6
- 2009.03.14 쩝 4
- 2009.03.11 시합 8
- 2008.12.24 크리스마스 이브 복싱 체육관 4
갑자기 관장이 샌드백을 치는데 다가왔다.
별 말 않더니 미트를 꺼낸다.
"원투쓰리포 해 봐라."
"이번엔 원투훅"
"양훅어퍼"
갑자기 시작되어 몇가지 바리에이션을 고작 십분정도 하는 동안
몸은 흠뻑 젖어버렸다.
"니 마이 좋아졌다. 처음하곤 딴판이네"
숨이 차서 감사함다하는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다.
관장은 일언반구 말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거리고 다시 총총.
21세기에 이런 무협지에나 나올 것 같은 교습이 어디있나
돈 냈으면 낸 만큼 충실히 꼬치꼬치 자세교정을 해 주는게 트랜드 아닌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본동작만 가르쳐 주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몸에 붙었다 싶을 때 다음 것을 이야기해주는 관장.
그런데 난 이런게 맞는 모양이다.
철저한 아날로그적인 가르침. 교습이라기보다는 수행에 가까운 행동.
누군가가 내 속마음을 찍으면 세피아톤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
시작한 지 벌써 9개월여가 되어간다.
보통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 같았으면 이미 3개월여에 다 마스터했을 내용을
아직까지 끌고가고 있다.
난 운동신경이 지극히 안 좋다. 성취속도도 하염없이 느리다.
몸으로 때우는 것이 신체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예진작에 포기했어야
하지만 난 최소한 [투기]쪽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듯 하다.
[남들만큼 못하면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요령피지 않는다.]로.
연애건,일이건 비전 없는 일에는 한 큐에 들어갔다 빠지는 내 성격하고
전혀 반대의 일을 이쪽 분야에서만 하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
예전에도 썼지만
몸은 input을 넣어주면...output을 정확하게 내 놓는다.
들어간 만큼의 효과를 보여준다. 시간을 헛되이 쓴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불확실의 시대에 이만큼 정직하고 충실한 것은 없다.
대련을 해서 손도 못 쓰고 깨졌다 해도 죽어라 시간을 들여 파다보면
다음 대련때는 훨씬 나아진다.
세상에 뭐 그런 게 있나?
연애를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뭐 나아지나?
사업을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나?
[불확실성을 구축하는 시간의 투자]가 가능한 종목은 따지고 보면 세상에 거의 없다.
"니 마이 좋아졌다."
라는 말은
내 경우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찬사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결국은 링에 들어섰다.
그냥 매스복싱이었지만 확실히 섀도우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림자는 어차피 내 분신이고 샌드백은 정지된 물체일뿐.
움직이는 것은 생각하고 반응한다.
역시 문제는 보법, 스텝이었고
기본은 원투였다.
살짝 살짝 뻗어들어오는 주먹도 확실히 아프긴 하더라.
사람의 체중이라는 것은
몽둥이 한 개에 실리면 홈런이 되고
주먹 하나에 실리면 사람을 혼절시킨다.
전에 언급했던
그 프로복서 아저씨와 딱 2라운드만 뛰어봤는데
실전과 연습은 확실히 다르더라.
매스복싱이면 스파링도 아니다.
나중에는 어찌 될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된 스파링을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커진다.
나도 이대로 늙다가는 세계를 구원할지도 모르겠어.
졌당.
최고령 프로 대 전 동양챔피언의 경기라는게
어차피 승부가 떼어놓은 당상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선전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갔으니.
"다음주에 뵐께요" 라는 말에
"아마 다음주엔 못 나올겁니다. 후유증이 심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하더니
아마 다음주엔 못 뵐 듯.
아는 사람이 권투경기 나가니까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긴 하는구나.
격투기 선수를 가족으로 둔 사람은
오죽할까
추성훈 선수가 경기할 때 어머니는 TV를 안 본다고 하지.
아 아까워라.
시드만 잘 받았어도 4강까지는 무난히 갔을텐데.
한 사내가 탈의실 쪽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그리고 수도꼭지에 입을 잠깐 댄다.
마시는 게 아니라 입을 대고 있다.
안다.
이 남자.
내가 맨 처음 체육관에 등록을 했을 때부터
땀복을 입고 줄넘기를 하던 남자
언제 체육관을 찾아도
이 사람은 줄넘기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운동을 마치고 갈 때까지도
줄넘기를 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마치 길거리 상점의 자동 인형처럼
같은 자세로 정확하게 같은 동작을 하던 남자.
- 안녕하세요
- 힘드네요
알고 있다.
시합이 토요일이다.
- 이번 주에 시합이죠?
- 예
- 힘드시겠네요
- 아직도 3kg정도 더 빼야 합니다.
- 아무것도 못 드시겠네요
- 이렇게 입만 축이고
일상은 나와 똑같다.
평일 일과를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메고 보내고
저녁에 체육관에 와서 운동을 한다.
- 상대가 너무 세요. 전직 동양챔피언
- 벌써요?
- 원래 한 두 차례 뒤에 붙을 줄 알았는데
- 그런데 왜 동양챔피언이 아마시합에
- 프로니까요.
몰랐다.
이 남자
프로였다는 걸
샐러리맨.
그리고 프로복서
뭔가 모를 괴리감이 머릿속을 잠시 맴돈다.
- 아무것도 안 드시고 회사에서 괜찮으십니까
- 그냥 하루종일 인상만 쓰고 있죠.
- 아.
- 차 한잔 하자는 것도 마다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좀 그렇게 보겠죠
고행.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한 첫번째 과정은
자기에 대한 혹독함일까
- 동양챔피언이라면 장난 아니겠네요
- 이번에는 진짜 심하게 맞겠죠
- 몇 라운드인가요
- 4라운드
- 4라운드
- 10라운드가 아닌 4라운드면 승산이 있습니다. 4라운드는 변수가 있으니까요
이 남자
절대로 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더라도 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열심히 하셨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죠
- 오늘 옆에서 운동을 하지 않으셨으면 혼자서는 운동 못했을 겁니다.
- 예?
- 혼자서 연습하기에는 지쳐서요. 누군가가 옆에서 연습하는 걸 보면서 힘을 내는거죠.
물론 나는 프로복서가 되고 싶은 꿈같은 건 있지도 않고
그 정도의 운동신경도 없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보는 게, 보여주는 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의지의 싸움.
타인을 보면서 자신을 투영하건, 스스로의 모습에서 타인을 투영하건
스스로 갖는 자신감에 날을 벼릴수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가치를 갖는 것.
-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 예
난 아직 이 사람 이름도 모른다.
알아낸 것은
샐러리맨, 프로복서
그리고 참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번 주 토요일
그의 주먹에 무운이 있기를.
이미 내가 들어가기 전에도 너댓명의 사내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옷 갈아입고
분노의 주먹을 샌드백에 후려치면서 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는데
최고참 중의 하나가 나를 보더니
"이브에 나오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습니다."
라면서 웃는다.
-.-;;; 아 뭘 어쩌란 말이야.
한 술 더 떠서 벽에는 관장님이
A4지에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붙여 써 놓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25일 성탄절에도 도장 정상적으로 운영함]
그래,
누구 말마따나 혼을 실어서 샌드백 저 너머의 공간을 뚫어버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