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5.08 2cm 2
  2. 2009.06.10 진일보 8
  3. 2009.04.21 Into the ring 6
  4. 2009.03.14 4
  5. 2009.03.11 시합 8
  6. 2008.12.24 크리스마스 이브 복싱 체육관 4

2cm

수련장 2010. 5. 8. 22:17
한 두 주 전쯤부터 일어난 일이다.

샌드백을 치는데 갑자기 너클파트에 찌릿찌릿 거리는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글러브와 밴디지를 풀고 손을 살펴봤는데 시뻘겋기만 할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샌드백을 치기만 하면 너클파트가 아픈거다.
그것도 오른손도 아닌 왼손이.
복싱에서 왼잽을 못 쓰면 탄창없는 총이나 마찬가지다. 
가만히 보니까 뼈가 아니라 힘줄이 아프더라.

이것이 선수들이 잘 걸린다는 건초염인가!
아, 이것으로 내 찬란하지도 않았던 선수복싱생활도 이제 끝인..어쩌구 이런 상념을 하고 있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혼자 아픈 걸 감내해가며 주먹질을 해 대고 있었다.
검도 할 때는 족저근막염에 관절통까지 있었으니 복싱도 꾸준히 하다보면 통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라는 무대포 근성도 끼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시일이 지나도 아픔이 줄어들 지 않더라.

'아, 진짜 몸 상해서 운동 관두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으면 관둬야지.

그때였나. 내 오른손하고 왼손하고 글러브를 낀 손을 비교해 본게.
다른 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엄지의 놓인 자리.
너클파트를 만들어 쥘 때 왼손 엄지가 오른엄지보다 덜 들어가서 중지가 아닌 검지에 끝이 닿아있었다.
다시 꽉 말아쥐고 잽을 쳐 봤다. 통증이 없었다.
엄지를 정확히 말아쥐서 손가락 4개를 가드해주지 못하니까 검지가 뒤로 밀리는 거고
검지관절 인대가 힘을 무리하게 받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좀더 엄지를 깊게 밀어쥐고 때리는 것.

아마 내가
무식하게 계속 같은 방식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으면
타자를 치고 있는 지금 어디 통증외과에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그 순간, 두 손을 비교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 손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걸 바꾸자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맨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는 아프지 않았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정확하게 교범대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자 운동을 내 몸에 맞추면서
동시에 기본적인 것마져 느슨해 진 것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1-2cm의 관절위치때문에 고통이 왔다. 실제적으로 관절이 돌아가는 범위는 1cm도 안 될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

사람은 초심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가
초심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맨 처음 각오를 변화시킨 만큼 움직이고 있는가
둘 다 안 된다면
다시 모든 걸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인생이란 어디서든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일지도.



p.s) 관장님한테 왜 안 물어봤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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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보

수련장 2009. 6. 10. 23:47


갑자기 관장이 샌드백을 치는데 다가왔다.
별 말 않더니 미트를 꺼낸다.

"원투쓰리포 해 봐라."
"이번엔 원투훅"
"양훅어퍼"

갑자기 시작되어 몇가지 바리에이션을 고작 십분정도 하는 동안
몸은 흠뻑 젖어버렸다.

"니 마이 좋아졌다. 처음하곤 딴판이네"

숨이 차서 감사함다하는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다.
관장은 일언반구 말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거리고 다시 총총.

21세기에 이런 무협지에나 나올 것 같은 교습이 어디있나
돈 냈으면 낸 만큼 충실히 꼬치꼬치 자세교정을 해 주는게 트랜드 아닌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본동작만 가르쳐 주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몸에 붙었다 싶을 때 다음 것을 이야기해주는 관장.

그런데 난 이런게 맞는 모양이다.
철저한 아날로그적인 가르침. 교습이라기보다는 수행에 가까운 행동.

누군가가 내 속마음을 찍으면 세피아톤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

시작한 지 벌써 9개월여가 되어간다.
보통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 같았으면 이미 3개월여에 다 마스터했을 내용을
아직까지 끌고가고 있다.
난 운동신경이 지극히 안 좋다. 성취속도도 하염없이 느리다.
몸으로 때우는 것이 신체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예진작에 포기했어야
하지만 난 최소한 [투기]쪽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듯 하다.

[남들만큼 못하면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요령피지 않는다.]로.

연애건,일이건 비전 없는 일에는 한 큐에 들어갔다 빠지는 내 성격하고
전혀 반대의 일을 이쪽 분야에서만 하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

예전에도 썼지만
몸은 input을 넣어주면...output을 정확하게 내 놓는다.
들어간 만큼의 효과를 보여준다. 시간을 헛되이 쓴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불확실의 시대에 이만큼 정직하고 충실한 것은 없다.
대련을 해서 손도 못 쓰고 깨졌다 해도 죽어라 시간을 들여 파다보면
다음 대련때는 훨씬 나아진다.

세상에 뭐 그런 게 있나?
연애를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뭐 나아지나?
사업을 해서 깨졌다가 시간을 들여 파면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나?
[불확실성을 구축하는 시간의 투자]가 가능한 종목은 따지고 보면 세상에 거의 없다.

"니 마이 좋아졌다."
라는 말은

내 경우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찬사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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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ring

수련장 2009. 4. 21. 23:11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링에 들어섰다.

그냥 매스복싱이었지만 확실히 섀도우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림자는 어차피 내 분신이고 샌드백은 정지된 물체일뿐.
움직이는 것은 생각하고 반응한다.

역시 문제는 보법, 스텝이었고
기본은 원투였다.
살짝 살짝 뻗어들어오는 주먹도 확실히 아프긴 하더라.
사람의 체중이라는 것은
몽둥이 한 개에 실리면 홈런이 되고
주먹 하나에 실리면 사람을 혼절시킨다.

전에 언급했던
그 프로복서 아저씨와 딱 2라운드만 뛰어봤는데
실전과 연습은 확실히 다르더라.
매스복싱이면 스파링도 아니다.
나중에는 어찌 될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된 스파링을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 커진다.

나도 이대로 늙다가는 세계를 구원할지도 모르겠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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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장 2009. 3. 14. 22:05
*권투경기 시청 후.*

졌당.
최고령 프로 대 전 동양챔피언의 경기라는게
어차피 승부가 떼어놓은 당상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선전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갔으니.


"다음주에 뵐께요" 라는 말에

"아마 다음주엔 못 나올겁니다. 후유증이 심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하더니 
아마 다음주엔 못 뵐 듯.

아는 사람이 권투경기 나가니까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긴 하는구나.

격투기 선수를 가족으로 둔 사람은
오죽할까

추성훈 선수가 경기할 때 어머니는 TV를 안 본다고 하지.

아 아까워라.
시드만 잘 받았어도 4강까지는 무난히 갔을텐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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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

수련장 2009. 3. 11. 10:46
운동을 하고 나면 그나마 시들시들한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는 기분.

한 사내가 탈의실 쪽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그리고 수도꼭지에 입을 잠깐 댄다.
마시는 게 아니라 입을 대고 있다.

안다.
이 남자.

내가 맨 처음 체육관에 등록을 했을 때부터
땀복을 입고 줄넘기를 하던 남자
언제 체육관을 찾아도
이 사람은 줄넘기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운동을 마치고 갈 때까지도
줄넘기를 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마치 길거리 상점의 자동 인형처럼
같은 자세로 정확하게 같은 동작을 하던 남자.

- 안녕하세요
- 힘드네요

알고 있다.
시합이 토요일이다.

- 이번 주에 시합이죠?
- 예
- 힘드시겠네요
- 아직도 3kg정도 더 빼야 합니다.
- 아무것도 못 드시겠네요
- 이렇게 입만 축이고

일상은 나와 똑같다.
평일 일과를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메고 보내고
저녁에 체육관에 와서 운동을 한다.

- 상대가 너무 세요. 전직 동양챔피언
- 벌써요?
- 원래 한 두 차례 뒤에 붙을 줄 알았는데
- 그런데 왜 동양챔피언이 아마시합에
- 프로니까요.

몰랐다.
이 남자
프로였다는 걸
샐러리맨.
그리고 프로복서
뭔가 모를 괴리감이 머릿속을 잠시 맴돈다.

- 아무것도 안 드시고 회사에서 괜찮으십니까
- 그냥 하루종일 인상만 쓰고 있죠.
- 아.
- 차 한잔 하자는 것도 마다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좀 그렇게 보겠죠

고행.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한 첫번째 과정은
자기에 대한 혹독함일까

- 동양챔피언이라면 장난 아니겠네요
- 이번에는 진짜 심하게 맞겠죠
- 몇 라운드인가요
- 4라운드
- 4라운드
- 10라운드가 아닌 4라운드면 승산이 있습니다. 4라운드는 변수가 있으니까요

이 남자
절대로 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더라도 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열심히 하셨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죠
- 오늘 옆에서 운동을 하지 않으셨으면 혼자서는 운동 못했을 겁니다.
- 예?
- 혼자서 연습하기에는 지쳐서요. 누군가가 옆에서 연습하는 걸 보면서 힘을 내는거죠.

물론 나는 프로복서가 되고 싶은 꿈같은 건 있지도 않고
그 정도의 운동신경도 없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보는 게, 보여주는 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의지의 싸움.
타인을 보면서 자신을 투영하건, 스스로의 모습에서 타인을 투영하건
스스로 갖는 자신감에 날을 벼릴수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가치를 갖는 것.

-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 예

난 아직 이 사람 이름도 모른다.
알아낸 것은
샐러리맨, 프로복서
그리고 참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번 주 토요일
그의 주먹에 무운이 있기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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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가 들어가기 전에도 너댓명의 사내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옷 갈아입고

분노의 주먹을 샌드백에 후려치면서 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는데

최고참 중의 하나가 나를 보더니

"이브에 나오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습니다."
라면서 웃는다.

-.-;;; 아 뭘 어쩌란 말이야.

한 술 더 떠서 벽에는 관장님이
A4지에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붙여 써 놓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25일 성탄절에도 도장 정상적으로 운영함]



그래,
누구 말마따나 혼을 실어서 샌드백 저 너머의 공간을 뚫어버리는 거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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