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합

수련장 2009. 3. 11. 10:46
운동을 하고 나면 그나마 시들시들한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는 기분.

한 사내가 탈의실 쪽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그리고 수도꼭지에 입을 잠깐 댄다.
마시는 게 아니라 입을 대고 있다.

안다.
이 남자.

내가 맨 처음 체육관에 등록을 했을 때부터
땀복을 입고 줄넘기를 하던 남자
언제 체육관을 찾아도
이 사람은 줄넘기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운동을 마치고 갈 때까지도
줄넘기를 하고 있던 적이 있었다.
마치 길거리 상점의 자동 인형처럼
같은 자세로 정확하게 같은 동작을 하던 남자.

- 안녕하세요
- 힘드네요

알고 있다.
시합이 토요일이다.

- 이번 주에 시합이죠?
- 예
- 힘드시겠네요
- 아직도 3kg정도 더 빼야 합니다.
- 아무것도 못 드시겠네요
- 이렇게 입만 축이고

일상은 나와 똑같다.
평일 일과를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메고 보내고
저녁에 체육관에 와서 운동을 한다.

- 상대가 너무 세요. 전직 동양챔피언
- 벌써요?
- 원래 한 두 차례 뒤에 붙을 줄 알았는데
- 그런데 왜 동양챔피언이 아마시합에
- 프로니까요.

몰랐다.
이 남자
프로였다는 걸
샐러리맨.
그리고 프로복서
뭔가 모를 괴리감이 머릿속을 잠시 맴돈다.

- 아무것도 안 드시고 회사에서 괜찮으십니까
- 그냥 하루종일 인상만 쓰고 있죠.
- 아.
- 차 한잔 하자는 것도 마다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좀 그렇게 보겠죠

고행.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한 첫번째 과정은
자기에 대한 혹독함일까

- 동양챔피언이라면 장난 아니겠네요
- 이번에는 진짜 심하게 맞겠죠
- 몇 라운드인가요
- 4라운드
- 4라운드
- 10라운드가 아닌 4라운드면 승산이 있습니다. 4라운드는 변수가 있으니까요

이 남자
절대로 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더라도 진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열심히 하셨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죠
- 오늘 옆에서 운동을 하지 않으셨으면 혼자서는 운동 못했을 겁니다.
- 예?
- 혼자서 연습하기에는 지쳐서요. 누군가가 옆에서 연습하는 걸 보면서 힘을 내는거죠.

물론 나는 프로복서가 되고 싶은 꿈같은 건 있지도 않고
그 정도의 운동신경도 없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보는 게, 보여주는 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의지의 싸움.
타인을 보면서 자신을 투영하건, 스스로의 모습에서 타인을 투영하건
스스로 갖는 자신감에 날을 벼릴수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가치를 갖는 것.

-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 예

난 아직 이 사람 이름도 모른다.
알아낸 것은
샐러리맨, 프로복서
그리고 참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번 주 토요일
그의 주먹에 무운이 있기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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