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쿠엔틴 타란티노의 [nglourious Basterds]를 저녁 늦게 호옹님과 첼로팬과 같이 감상하고 난 뒤 시계를 보니 신데렐라가 구두 떨구고 갈 시간에 근접해 있었다. 이 시간에 호옹님을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분당행 버스에 부탁하느니 모셔다 드리는게 나을 것 같다 싶어 그냥 차를 몰고 분당까지 다녀왔다. 돌아온 시간은 2시 반.
예전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만 지금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자유로우니까. 내가 하고싶은 데로 해도 되니까. 시간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쓰니까.
가정을 가지면 집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가정이 불안해질 때에도, 엎어질 때도, 없어진 뒤에도 난 그 생각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듯 하다.
아마도 나는 집에 집착하거나, 사람에 집착하거나, 내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삶에 집착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공중분해되어 정작 지킬 것이 없어진 지금,
그 모든 것에서 비로소 자유로와 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차를 몰고 집에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자유함은 또 다른 곳에 나를 묶어두기 위한 휴지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고.
아니면 평생 이렇게 한없이 펼쳐진 가능성의 바다를 옷이 젖을까봐 조심조심 젖은 백사장만 밟으면서
다닐지도 모른다고.
2.
수염을 기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별 타박은 하지 않고, 그 중 여성분들 몇몇은 괜찮아 보인다고 말해줘서 그냥 방치해 둔 것인데...아무리 생각해도 영 허하다. 이럴 때는 아버지의 유전형질 중 왜 모발에 관한 것이 유전되지 않았는지 애통할 따름이다. 조만간 더 기를지 자를지 결정을 해야겠다.
결정은 동전던지기로나 해 볼 요량이다. 수염난 분이 나오면 기르고 숫자가 나오면 잘라볼까.
3.
부타양이 추천해 준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아마 2009년 내가 읽어 본 책 중 나와 개인적으로 가장 정서적합일이 많이 된 책 같다.
내가 쓰고자 했으나 차마 능력이 안되거나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꺼내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책을 어느 날 보게 된다면.
작가에게 질투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같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1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