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2.17 김수환 추기경, 승려 그리고 잡설 4
  2. 2008.11.10 종교적 담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의 끄트머리 3
  3. 2008.11.04 마음 4
"너 신부가 되어 볼래?"

이거 농담 아니다.
나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나에게 물어본 말이었다.

우리 집안이 3대째 개신교도이고 나름대로(?) 가족의 전통을 중시하는 집이었고
장남이었으니 망정이지
내 성정에 맞기로는 
머리깎고 절에 들어가 앉아 독경을 하거나
천주교로 개종해서 수사가 되고 신부가 되는게 훨씬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자에 대해 별 관심없을 때 일이다.
요즘처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터에 바디페인팅하는 여자 사진이나 찾아다니는 깜냥으로는
수도가 아니라 파계승도 못될 심정이지만.

각설하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구만.
속세에 어차피 남겨놓은 것도 없으셨을테니 그냥 홀가분하셨을 게다.

그거 보면 신부들이 참 부럽다.
세사 어떤 물질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냥 구도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

난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좋더라.
눈 한 번 질끈 감고 고개 돌리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수도자의 삶인데
민초들의 아우성에 귀를 막을 수 없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모습아닌가.

그저 진흙탕에 고기 몇점 줏어먹겠다고 아둥바둥하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놈이 다 그놈으로 보이는 세상이다.
빛이 비추되 어두움은 깨닫지 못한다는 성경말씀이
요즘처럼 절실한 적이 없었네그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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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백이나 첨언을 하자면, 나는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거의 가풍처럼 기독교를 믿고 있는 집안이다.한 세대 30년이라고 치면 대충 내가 믿는 시간까지만 해도 중첩되는 기간을 제하면 짧게는 50년이고 길게는 70년이상 되는 기간동안 한 가정의 정신적인 dogma로 존재해 오는 것인데 실제적으로 이것에서 오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불어 나도 이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한 도덕적 규례나 개인적인 가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서 내 행동양식도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성향을 빌려보면 나는 오히려 불교쪽에 더 가깝다. 선(禪)에 더욱 가까운 양식이 내 개인적인 사고방식이고 내면에 침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그 핵심적인 사안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아니지, 오히려 그 core는 180도 다를 수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종교적 방식에 있어서는 두 종교의 수련법이나 깨닫는 과정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아직 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돈오점수나 성령의 체험과 성경의 묵상이 한자와 한글의 체험일 뿐, 인간이 느끼는 것은 같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절대자와 인간개인의 수련이라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진여를 깨닫느냐 아니면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존재함을 불현듯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막말로, 내가 어늘 불가적인 수행을 하다가 본래면목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세상을 창조주가 만들었고 구세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천둥에 머리를 돌리듯 깨달았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구원의 감격인가 아니면 불교적인 득도의 경지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기독교의 성경에 써 있는 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면 적이지 절대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육체저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악다구니 같은 돈지랄의 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이번 주 로또 맞게 해주세요]따위의 기도를 줄기차게 뻑적지근한 교회에 앉아서 드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말릴 수 있으랴? 나도 가끔 먹고살기 힘드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절박성 기도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기독교와 상충되는 사회 안에서 상충되는 가치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 봤자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은 점점 탈세속화 되어간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산문의 한가함을 느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산속 도량에서 독경을 하는 것이나 스스로의 욕심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신이나 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진대. 그래서 중세시대에 수도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불어 이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모든 종교의 끝은 결국 시장으로 나와서 도를 설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정토종을 만들 때 그러했듯이 도가 도에 이르면 그 끝은 사람들에게 나서서 도를 잇는 길이 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뭔 차이가 있겠는가. 전도 찌라시 돌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닌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는가.

아아 살면 살수록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이고 종교에 관련된 생각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글로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종교적인 실타래가 꼬여있는데 과연 이것이 죽을 때까지 다 풀릴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번쩍하고 귀가 들리고 눈이 트이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될 것인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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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련장 2008. 11. 4. 15:41
[심두멸각하면 화염도 자량이라] 고  혜림사의 지주 쾌천화상이 말하였다.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는 말인데 원래 쾌천의 말이 아니라 당나라 두순학의 말이다.
하지만 정작 실천에 옮긴 것은 쾌천화상. 일본말로 카이텐 화상인데 이 양반은 전국시대 말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풍림화산으로 유명한 다케다신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문제는 다케다가 오다 가에게 발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가 다케다의 영지로 쳐들어와서 다케다의 영지를 유린했다는 거다. 혜림사의 카이텐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랬더니 노부타다가 절에다 불을 놨다나.

불타는 산문에 정좌해서 타 죽어가면서 외쳤다는 마지막 사자후가 [심두멸각 화염자량]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 시원하다!
오, 젠장. 그 이야기를 아래에서 불 놓던 오다가의 군사들이 듣고 얼마나 섬찟했을까.

나도 평지풍파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부도옹처럼 살고 싶다만.
다 이것이 마음의 고집멸도를 버리고 마음의 본래면목을 찾아 떠나는 수행의 첫 발자국 아니겠는가
상구보리 하화중생해야 반본환원하는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인이 왜 불법을 쓰고 있나.
무념.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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