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내가 수차례 했었고 그들에게 수차례 들었던 질문.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만들어서 타락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었는가? 그것이 없었으면 오히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신학적 교리에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내가 신이 아니기 때문이 첫재요. 더 이상의 이해가능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 둘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자유의지를 줬다는데 사람은 왜 죄인으로 타락하는 것인가?


그런데 최근 몇년 간의 대한민국을 보고 있자니
대충 창세기가 왜 그런지 알겠더라.

그게 아니다.
왜 사람이 타락하는지에 대해서 알겠더라.
왜 욕심이 잉태한 즉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이 되는지 알겠더라.

[자유]를 받고 [민주]를 받아도
사람의 욕심이 극에 차고 [자유]를 누릴 줄 모르게되면
스스로 자유의지를 반납하고 돈에 얽매이게 되고 끝끝내는 후손의 인생까지 담보잡더라.

 [그럼 애초에 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고 민주라는걸 만들었는가?]라고 물으면 뭐라고 할것인가.
그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까. 사람은 존엄하기 때문이니까.

아,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의 형상대로만들어 존엄하게 만들었으니
자유로운 것이 당연하고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당연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스스로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고 얽매여 죄인이 되는구나.
몸으로 때우니까 내 스스로 궁금하던 것이 조금이나마 풀리더라.

2009년 대한민국에 감사해야겠구만.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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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n for Religious

수련장 2009. 4. 11. 14:01

어두운 동트기 전의 세상같은 요즘을 지내면서
종교에 대한 생각도 부쩍이나 많이 합니다.

아마 개인적인 삶의 부분에서
개인적인 사유의 부분을 할애해 보라면
종교가 40% 여성이 40% 기타가 20%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전의 타락사제에 어울리는 컨셉이군요.

각설하고,
현재 제 스탯에서 종교란은 기독교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이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예장, 예수교장로회쪽이죠.

가끔은 기복신앙적인 측면도 보이고
대부분은 이성적으로 제가 가진 종교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점수보다는 돈오쪽에 대한 선호가 강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돈오라는 게 일단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일어나는 돈오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고양의 착각일 경우가 다분하죠.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인 천재라는 이야긴데...이런 고승대덕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냥 줄기차게 보는 편입니다.

성경이라는 게
어찌보면 단편적인 서술로 이뤄져 있고,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를 모르면 뭔 소리인지 모르거나 곡해하기  쉬운 구절도
숱하고...한 마디로 이성의 총합으로 읽어도 불합리할 지경인데
그냥 [믿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장르는 결코 아니라는 거죠.
기독교인으로 산 지 한 4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지금은 백의종군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교회 내 직분이 있기도 했고요.
 
어느 날인가 있을 돈오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있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대로 절대선이 될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절대적인 [종교적인 Credo]는 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를 한번에 설명해 주진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의 선택 범위 밖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기도해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라는 명제가 생략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확신의 부분이지만
신앙은 공동체와 외적인 표출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국기독교는 개인의 믿음을 외적인 신앙으로 포장하는 데 너무 익숙하죠.

현실적 축복,
기도의 응답
그리고 돈

이 세가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홉마리 소 중의 터럭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세가지가 정수라면 일전에 죽은 제 여후배는 의미없는 개죽음밖에 안됩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벌기위해 살아가면서
[성경]하고 하나도 합치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40%가아니라 99.9%가 되도 모자랄 만큼머리가 아프고
기독교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일주일 내내 드는데

왜 이렇게
한국 기독교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사회에 대해서 늘 날 선 말들만 성경에서 취합해서 뽑아내
대외적으로 무장하며
속으로는 꿀빵에 시럽발라놓은 것 같은 말만 슬슬 요리조리 발라서
뭐가 진리이고 요설인지 구별도 못하게 되는 것인지.

그냥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간판은 신자라고 걸어놓은 우리들]에 대한 위로의 차원일까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약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고
그 녀석이 중학교 이상 되어 세례를 받을 때가 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세례를 받던지 말던지 하라고 시킬까.

아비는 아비의 신앙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식에게 있어서 내가 보여준 신앙이 잘못 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닐테니 말입니다.

뭐...이 이후의 일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겠거니 하고 말이죠.



흠.
여성을 사유의 40% 이상 생각하는 남자의 글 치고는 상당히 심각하고 경건하군요.
이것도 자기합리화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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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고백이나 첨언을 하자면, 나는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거의 가풍처럼 기독교를 믿고 있는 집안이다.한 세대 30년이라고 치면 대충 내가 믿는 시간까지만 해도 중첩되는 기간을 제하면 짧게는 50년이고 길게는 70년이상 되는 기간동안 한 가정의 정신적인 dogma로 존재해 오는 것인데 실제적으로 이것에서 오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더불어 나도 이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한 도덕적 규례나 개인적인 가치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서 내 행동양식도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성향을 빌려보면 나는 오히려 불교쪽에 더 가깝다. 선(禪)에 더욱 가까운 양식이 내 개인적인 사고방식이고 내면에 침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그 핵심적인 사안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아니지, 오히려 그 core는 180도 다를 수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종교적 방식에 있어서는 두 종교의 수련법이나 깨닫는 과정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아직 불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돈오점수나 성령의 체험과 성경의 묵상이 한자와 한글의 체험일 뿐, 인간이 느끼는 것은 같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절대자와 인간개인의 수련이라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진여를 깨닫느냐 아니면 이 우주만물의 창조주가 존재함을 불현듯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막말로, 내가 어늘 불가적인 수행을 하다가 본래면목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세상을 창조주가 만들었고 구세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천둥에 머리를 돌리듯 깨달았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구원의 감격인가 아니면 불교적인 득도의 경지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웅다웅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기독교의 성경에 써 있는 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면 적이지 절대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정신적으로 육체저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악다구니 같은 돈지랄의 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이번 주 로또 맞게 해주세요]따위의 기도를 줄기차게 뻑적지근한 교회에 앉아서 드리고 있다. 그것은 어찌 말릴 수 있으랴? 나도 가끔 먹고살기 힘드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 달라는 절박성 기도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기도가 아니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차피 기독교와 상충되는 사회 안에서 상충되는 가치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 봤자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은 점점 탈세속화 되어간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산문의 한가함을 느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나 산속 도량에서 독경을 하는 것이나 스스로의 욕심과 아집에서 벗어나서 신이나 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진대. 그래서 중세시대에 수도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불어 이것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모든 종교의 끝은 결국 시장으로 나와서 도를 설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정토종을 만들 때 그러했듯이 도가 도에 이르면 그 끝은 사람들에게 나서서 도를 잇는 길이 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이 뭔 차이가 있겠는가. 전도 찌라시 돌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닌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는가.

아아 살면 살수록 어렵고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이고 종교에 관련된 생각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글로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종교적인 실타래가 꼬여있는데 과연 이것이 죽을 때까지 다 풀릴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번쩍하고 귀가 들리고 눈이 트이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될 것인지.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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