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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8.31 노력이라는 것 3

노력에 대한 결과

수련장 2011. 6. 11. 00:55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두가지 일을 끝임없이 하고 있다.

하나는 글쓰기다. 정말 투입분의 산출량이라는 것에 있어서 이렇게 채산성이 안 맞는 일이라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타인의 눈에 좋게 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을 뿐더러 나이를 먹을수록 언어의 조탁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생활속에서 쓰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 차에 문자로 남겨야 할 말글의 핍절함 앞에서는 뭐라고 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회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 조차 희박하기 그지없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필생을 들여서 할만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하루에 한 두번 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는
믿지 않겠지만 연애시도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지사. 성직자라도 그럴진대 사지 멀쩡한 사내가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이 일은 전술한 글쓰기에 비하면 정말 허공에 발길질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허망한 짓거리가 있나 싶을 정도다. 내가 불타는 마음을 가지면 뭘 하나. 상대가 차가운 마음을 가지면 그만인 걸. 내가 정열에 가득하면 뭐하나, 상대가 경멸에 가득하면 그만인걸. 사람 상대하는 장사가 가장 어려운 일일진대. 그 중에 마음장사가 가장 힘든 법이다. 열심히 해 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만한 대가가 꼭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증명한다.

노력하면 성공하고 노력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혹자들은 말한다만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써 내려간 역사서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얻은 것을 중시하고 기억한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얻지 못한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럴리 없다. 우리가 갖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피와 눈물과 땀을 뿌려가면서 일에 매진했건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경험을 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미련때문이다.
어쩌면 오기고, 갈고 닦으면 도가 트일것이라 믿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허망한 전승 때문이고
나는 할 수 있으리라 믿는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이다.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전술한 저런 것이 삶의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자기최면일 지언정 저것이없다면 아무것도 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암시를 거는 것이다. 그러다가 수백수천가지 시도 중 하나가 걸려서 내가 만족할수 있는 현재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그것이 요행이랴?
아니다. 그게 노력인 것이다. 요행의 인생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뤄지지 않은 수많은 목표들에 노력을 기울여 왔으니까.
함부로 삶에 요행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어차피 인생은 확률의 변동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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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항로가 잔잔한 일망무제의 만경창파를 헤치고 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게 우리들 인생이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돛을 세우고 키질을 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의 배를 끌고 가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이 노력이라는 것 아니냐.

하지만 아무리 한들 뼈가 부서져라 노력한들,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키를 붙잡고 있다가 토할지경까지 이르러도 바람이 바뀌지 않고 거칠어지는 것 또한 인생 아니랴.

이쯤 되었을 때 우리는 고뇌한다.
여기서 손 놓고 그냥 바람부는 대로 떠내려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서서 죽더라도 키를 잡고 있어야 하나.

누군가는 손을 놓고 누구는 손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들 산다.
떠내려 가는 것이 어쩌면 편할지도 모르고
꽉 붙자고 사는 것이 그의 사는 목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장담하겠느냐. 바람부는대로 표랑하다 도착한 곳이 그가 꿈꾸던 곳일지도 모르고
내가 피땀바쳐 잡아끌며 도달한 목적지가 내가 원하던 곳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봉래 양사언은 이렇게 시를 읊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양사언이 불굴의 투쟁적인 유학자였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양반은 유학자기도 했지만 선도(仙道)를 배운 사람이었다.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론을 알았을 게다. 세상엔 득도 없고 실도 없도다.
그런 그가 왜 저런 시를 읊었을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말을 할 정도는 벗어나야 한다는 거 아니었을까.
일단 뭐든지 토할때까지는 해 본 다음에 손을 놓던 계속 잡던 그 다음에 오는 건 자유로움이라는 거겠지.

그런데 그걸 알기 힘든거지.
언제까지 이걸 잡아야 하는 건지. 언제 놓아야 하는건지.
아직까지 이런 생각이 들 지경이라면
손을 놓기에는 요원하게 먼 것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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