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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3 어쩌면 지워버려야 할 이야기 4
1.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예전의 일이다. 배낭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프랑스와 이태리 사이의 작은 해변마을을 들른 적이 있었다. 뭔지도 모르는 식사를 대충대충 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오직 하나 바다의 색깔뿐이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바닷물의 빛이 파랗디 파란 사파이어 빛이었다. 그후에도 여기저기, 국내외 여러곳의 바다를 다 둘러보았지만 난 그렇게 파란 색의 바다는 구경해 본 적이 없다. 어느 누가 푸른 바다라고 한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새파란 바다]에 비하면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잔잔하던 파란 바다의 색깔과 풍경은 아마 다른 절경을 보더라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바다가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2. 
10년 전에, 한 명의 여자를 본 적이 있다. 결혼 하기 전의 이야기다.
사람은 태어나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성을 만나면서 자신의 이상형을 구축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결혼생활 롤모델을 만들어간다. 이상형이란 원래 구름위의 성채같은 것. 절대로 이승에서 만나지 못해서 이상형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가장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혹은 그와 비견될만한 매력을 지닌 사람을 만나서 짝을 짓고 결혼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뿔사, 살아있는 이상형을 봐 버린 것이다. 난 그것이 축복이라 생각하였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천형(天刑)에 다름 아니었다.

타인의 눈과는 관계 없이 그 여자는 가지런히 내 모든 조건에 다 들어맞는 사람이었고, 더 큰 문제는 짝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계재가 없었는데 그냥 멍청하니 바라만 보는 처지였던게지. 말 그대로 대가의 그림을 박물관에서 보면서 '아....행복하구나. 내 거실에 걸어두고 싶은 생각 굴뚝같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미술학도 같은 느낌이었다.

대충 포기하면서 살면 그것이 잊혀지리라 생각했건만, 그리고 혼자가 아닌 삶 가운데서는 그것을 일부러라도 잊고 열심히 살았건만. 어떻게 인연이 참 잔망스럽기 그지 없어서 실타래라는게 얽히고 얽혀서 재수없게 혼자 살 때 또 봐 버리고 만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알았다. 아, 내가 잊고 산 것이 아니라 참고 살았구나. 담배랑 똑같은 거였구나. 정말 재수없는 인생이구나, 눈알을 애초에 뽑아버릴 걸 그랬구나. 


3.
인순이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은 적이 있다. 
바로 내 앞에서 댄스곡을 부르는데 온 몸의 신경이 쭈볏 서는 느낌을 받았다. 백건우와 아쉬케나지의 피아노로 라흐마니노프를 듣는다. 머릿속을 일필휘지로 휘감고 달려드는 멜로디의 이어짐이 전해진다. 대가의 음악은 사람의 귀가 아니라 몸을 통해서 나간다. 이런 소리를 듣다가 옆집에서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솟구친다 (연습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비유지만). 왜 거기서 그렇게 음색이 넘어가냔 말이다.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불평할수 없는 내 개인의 호불호다. 좋은 것을 보고 들었으면 사람의 감평은 그 아랫쪽에 결코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다. 이것이 비단 음악이나 미술에만 국한되랴? 아니다. 사람의 이런 감정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4.
혼자 된 다음에 이 사람 저 사람 맘 붙여보려고 무던히 노력해 봤지만 그게 안되더라.
그게 내 엑스와이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예전에 봤고 최근에도 봤고, 아마 잊혀지지 않는 그 여자를 기준점으로 놓고 있더라.
조금이라도 만나는 여자가 내 각도에서 삐긋하는 것 같으면
'아니 대체 뭘 믿고 이 모양이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게 저주가 아니고 천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예 혼자 독경하며 일생을 마감한 팔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눈 질끈 감고 머릿속의 상념을 쫓아내야 하거늘 그것이
안 되는 것이 지금까지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길 아니런가. 이 길에서 과연 나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다른 산적한 일도 태산같아 짐을 지는 일도 버겁기 그지없는데.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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