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1.24 인애불이(仁愛不異)란 개똥철학이런만 2
  2. 2009.06.08 문명인의 폭력과 비선형적 내러티브 4
세기의 커플이니 브란젤리나니 하던 두 명의 배우가 별거하기로 합의를 한 모양이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 하니
별 다른 부연의 말을 쓸 것이 없다. 실제로 요즘 세태가 그러하다. 글 쓰는 나도 그렇고...사는 건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다.

두 외국 연예인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연애하는 감정은 3년이면 사라짐이라고.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수학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XXX이나 000이나 3년 살면 같아보인다]고.
긍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를 일이다.

 3년이 지났는데도 에로스적인 사랑만을 가지고 두 사람의 만남이 존속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사람이라는 동물이 주야장천 불타는 욕망의 화신도 아니고 그러지야 않겠지.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일정량의 특성만을 규정짓는 단어로 좁혀지는 요즘 작태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3년기한의 사랑]이라는 건 할리퀸 로맨스에나 나오는 [욕정의 소산]일 뿐인 게고...내가 아는 사랑이란 적어도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중용과 예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자인야(仁者人也)라. 
어짊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어질 인자란 사람 인(人)자에 두 이(二)자가 붙은 글자. 
옛 성리학자들은 인자인야를 "어짊은 사람을 사람답게 여김"이라 풀이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인자인야를 이렇게 풀이한다. "어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仁)의 근본은 사단의 측은지심인 바, 사람을 보고 마음에서 불쌍히 여김이 있고 그를 긍휼히 여김이 있는 것이
곧 인의 발로이니. 대충 결과론적으로 풀이해보면 사랑이 측은지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연속극보면 가끔 주인공이 애인에게 
"동정따윈 필요없어"라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 상처받은 이의 자존심을 제한다면 동정심이라는 것은 고귀한 감정의 발로인 것이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감정 중 하나다. 그리고 내 생각엔 인간이라는 동물이 보이는 가장 이타적인 행위가 동정심이라는 거다. 막말로, 걱정해 준다고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자식은 없지만 
부모가 자식을 내려다보면서 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기쁜 것 뿐 아니라 뭔가 가슴이 먹먹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 것이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이 정도다...-.-;;)  

살면서 얼마나 많이 측은지심을 느끼는가. 가족에게 느끼지 않는가. 친구들에게도 느끼고, 연인에게도 느끼고, 가끔 여유가 생기면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도 느끼지 않나. 누가 시켜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특출나게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사랑하기에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자식간에만 있는 것도 아니요, 친구나 애인이나 형제자매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만물에 미친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고갱이. 하지만 너무 쉽게 하위개념으로 치부해 버리는 정(情). 바로 그것 아닐까? 

우리가 쓰는 정이라는 말이야말로 측은지심과 인자인야가 같이 들어가 있는 [사랑]이라는 말의 진화형 아닐지.

아,

먼나라에 아무 상관없는 빵선생과 졸리양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갈겨 쓴
이론적 토대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개똥철학 한 토막.
 
p.s 1) 정이 아무리 고결해도 금(金)이 요즘은 그것보다 귀한 것 같긴 하더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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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짐승이고 육식동물에 가까운 잡식동물이며 기본적으로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능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잠재된 폭력인자들이다. 당연하다. 나 역시 그러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살갗과 살갗이 맞댈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해 본다. 싸움을 절대 즐기진 않지만 본능적인 투쟁성이 있음을 감지하는 나는 스스로의 양면성에 숱하게 당황한다. 내가 당황하는 것은 내가 싸움에대한 본능이 울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는 문명인들에게 익숙한 싸움의 룰이 마뜩찮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주먹지름이 공동체의 복지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법]을 만들었다. 실상이야 통치자의 손쉬운 코풀기에 다름아닌 도구에 불과하나 그것은 싸움을 일대일 이상의 폭력으로 상승시키고 개인적 감정갈등의 차원을 높여 절대기준점 하에서 한 사람의 이성과 자유를 도태시키기에 충분한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는 도구로 막강하게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공정하고 올바르게 사용된다면야 누구든 환영할 만한 도구겠지만 자고로 이 도구는 함부로 남용되어왔고, 항의하는 자들의 눈과 귀를 도려내는 것에 주로 쓰여왔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법전을 손아귀에 끼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청춘과 시간을 바쳤던 일련의 엘리트들의 무기와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사랑받는 애완동물에 갈음한다. 국가의 기조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이미 관습화 된 지 오래고, 어느 후진국을 가던간에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동방의 이 나라도 마찬가지일진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법]이나 법을 다루고 애용하는 윗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비형평성과 [법위에서 법을 가지고 장난치는 법전 위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는 그대로 다른 사회의 룰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나 친목단체나 상층부의 사람들이 있다. 잘 놀아서 사람들이 많이 붙던지, 뭔가 있어 보이는 지식인들의 집합체라던지. 이도저도 아니면 말빨좋은 인간들이 모이는 그룹이라던지...어딘가에는 늘 권력의 고갱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의 모임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서는 자연스러운 원시공동체적권력이 붙게 된다. 쪽수는 힘이고 달변은 권력이다. 그들은 상대를 설득하기 편하거나 설득할 수 이는 위치를 점한다. 상대적으로 타인들은 그들을 경청하는 형국이 되거나 그들과 분란이 있을 시는 천천히 흡수되거나 등을 돌리고 집단을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서서히 일어나는 권력의 이동현상이야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떠한 이해관계에 있어서 급작스러운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경우이다.

이미 기술한 바 대로 사람은 폭력성을 띄고 있다. 대립이 격해지면 감정이 생기고 충돌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문명인들의 충돌은 주먹지름이 아닌 자기변론과 공격이다. 갈등과 갈등의 대립과 충돌 그리고 해체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형적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집단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선형적 내려티브, 구조적 기승전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권력의 집단] 내지 [대다수]의가 갖는 힘에 의해 충돌은 걸러지게 된다. 충돌이 흡수된다는 것이 아니다. 테제와 안티테제의 합이 아닌 안티테제의 소멸을 의도적으로 가져오는 문명인의 싸움방법이다. 아무리 권력층에 덤벼드는 사람의 언변이 좋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권력에 대한 저항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일단 쪽수로 밀어붙이거나, 정당성을 넘어서는 현학의 파도가 몰아치거나, 전혀 뜬금없는 유화적 태도와 낯선 의제의 출제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놓게 되는 것이다. 권력자는 피권력자를 철저히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안티테제가 아닌 전혀 다른 이형(異型)의 것]으로 만들어서 엔트로피를 차단한다. 이것이 소위 문명 권력자들이 자신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딴에는 전혀 별다를 것이 없다. 기승전결이나 정반합에 의해 스토리의 서사구조가 이어지는 선형적 내러티브의 권력충돌이나 그런 것 전혀 없이 지식의 폭주나 교화, 뜬금없는 토픽의 나열들로 이어지는 비선형적 내러티브의 권력충돌이나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실상 권력을 현재 쥐고 있는 자가 권력을 소소한 충돌로 내놓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권력의 급작스런 이전을 우리는 [혁명]이라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비선형적내러티브의 가장 큰 문제는 문제 당사자들이 아닌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 관객들의 태도에 있다. 사건발생관계가 명학한 선형적 권력충돌의 스토리는 사건의 당사자 뿐 아니라 사건 주변의 사람들을 몰입시킨다.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한 확연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그 사람의 정치성향이 어떻던 간에 한 쪽의 깃발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감정적인 장치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그에 반해 비선형적 내러티브는 관람자들의 흥미를 날리기 쉬운 방법이다.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건 관심이 없도록 만든다. 유야무야 관심이 증발되어버리게 만들어 종당에는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만든다.

어떤 것이 권력층에 있어서 훨씬 유용한 방법인가?
당연히 비선형적 내러티브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겪고 있는 일이고.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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