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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2 사람이 초심을 잃었을 때 12
맨 처음 양배추를 끓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2년 전인가 문득 머리를 스친 아이디어였다.
배추도 국을 끓이는데 더 야들야들한 양배추는 국을 왜 못 끓이겠는가라는 생각이 그 첫번째였고

속을 국물로 덥히되, 가급적이면 비싼 먹거리를 쓰지 말고 질박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찾아보자는게 그 두번째 목표였다. 사실 먹는 일에 그렇게 관심도 흥미도 없었지만 그나마 인생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급은 받아야 할 터,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고른 메뉴였다. 아무런 미련도 없고, 만들다 망해도 그냥 던져버릴만한 최소한의 음식.
그것이 양배추국의 시작이었다.

그런데로 소금도 안 넣고 맨 처음에는 양배추만 끓여먹었다.
그냥 그렇게 먹었다.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끓어서 풀어진 양배추만 먹은 것이다. 밥하고.

근데 솔직히 못 먹겠더라. 그래서 소금을 넣어서 간을 했다.
그런저럭 먹을 만 했다. 묘한 단맛과 짠맛의 조화가 어우러졌다. 
이 정도면 밥에 아무런 집착없이 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는]분야에 있어서는 최적의 음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찬장에 치킨큐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넣어주고 가신 듯 했다. 
치킨큐브가 무엇인가?
맹물에 하나만 던져넣어도 닭국물이 된다는 기적의 향신료 아닌가!
무념무상으로 양배추를 끓이던 어느 날 저녁, 초록색 통이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나는 소금 대신 그 놈을 넣어서 간을 해 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풍미가 나기 시작했다. 
고기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양배추국이라니! 오호 은혜로다. 난 참 머리가 좋아. 혼자 이러면서.  

그때는 몰랐더랬다.
그 맛과 향이 지금까지 먹었던 고고한 채식의 아취를 와장창 깨버리고 슬며시 육식의 유혹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걸.

다음날부터 소시지를 잘라서 양배추국에 넣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먹는다는 [사우어 크라프트] 생각이 났달까. 그러다가 집 찬장에서 혼자 외롭게 놀고 있던 스팸을 보고
'거기 혼자놀다간 평생 독신으로 살다 맥주안주 따위밖에 안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그 놈을 배추국에 넣어봤다.
맛이 달랐다. 고기냄새만 풍기는 국물이 아니라 뭔가 씹히기 시작하니 세상이 달랐다.

점점 내 양배추국은 양배추만 들어가는 국이 아니라 잡다한 요소들이 이것저것 첨가되기 시작했다.
몸을 생각해서 마늘을 잘라넣기 시작했고
영양소 균형을 생각해서 감자 한 알을 같이 썰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스팸을 과감히 탈피해 버리고, 어느 순간
소시지계의 끝판왕..미국 [존슨빌 소시지]를 구해다 숭덩숭덩 썰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무념무상으로 국을 끓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내가 만들고 있는 양배추국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청정 초록빛만이 감돌아야 할 냄비 안이 너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았으니

오호라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로다
처음에는 남는 재료가 아까워 넣기 시작하더니
어느순간 부터는 미각을 탐하여 이것저것 채우기 시작했구나
주인공 양배추는 어디 구석에 파묻히고
언제부터 양키쏘세지가 냄비를 나와바리로 접수하였던고.

며칠 뒤
호옹님이 친히 집을 방문하시어
끓고 있던 양배추국을 슬쩍 보시고 뚜겅을 열어 보시고 다시 덮으시면서
조용히 한 말씀을 던지셨다.

"이것은 스튜(stew)입니다."

그렇다. 
더 이상 맑은 물 아래 양배추가 비치는 국이 아닌 스튜가 되었던 것이다.

그저 한 끼니 거르지 않고 넘기며 감사하려고 만든 국이
어느날 밑바닥도 보이지 않는 걸쭉한 고기국물로 변하는 순간.
이제는 예전처럼 만들어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10년은 정말 정신사납게 보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 중 팔할은 내 욕심과 내 분을 못 이기고 만든 일이었으니.
올 해는 좀 더 신중해 볼까.

한번 넘어서면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국이나 스튜나 인생이나 일반일텐데.

p.s) 다 쓰고 보니 뭔 소린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지금 양배추국을 다시 끓여먹고 오는 길이라.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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