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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9 아버지 다운 6

아버지 다운

작은 방 한담 2010. 12. 9. 00:52
마실 물이 다 떨어졌다. 코스트코를 들리려고 했는데
자동차가 없지 무언가. 부모님댁까지 가서 차를 빌려서 물만 사러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무슨 물을 사러 양재동까지 가냐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많이 사는게 이익이라 그렇다고 하시니
아버지가 따라오셨다. 아니 왜...

기왕 간 김에 이것저것 구경이나 하고 사오자 싶으셨는지 내가 뭘 구매하는지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려고 오셨는지 하여간 쇼핑을 부자가 같이 하게 되었다. 어머니 손을 붙잡고 어릴적에 동네 시장골목을 왔다갔다 한 기억은 있지만 아버지하고 쇼핑을 가 본 적은 난생 처음이다. 그것도 머리털 한참 나다 못해 빠질만한 나이에.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옷 판매대 근처에서 왔다갔다 하신다.

"왜 그러세요?"

"아니...네 조카 그놈 아침에 데리고 왔다갔다 할 때 추워서 말이지...싼 거 있나 보려고."

여기저기 들었다 놓았다. 입었다 벗었다 하시는데.
가격표를 연신 보면서 흘낏흘낏 남들을 쳐다본다. 미국놈들 사이즈하고 동양사이드가 섞여 있어서 천차만별이고, 싸게 나온 것들 치고는 추위를 막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이것저것 고르시는 걸 보니 뭔가 필요하신 모양이다. 한참을 그러시다. 이것저것 보더니 가격표를 보시고 다시 얼굴이 딱딱해진다.

"그냥 가자."

싸다면 어느 곳보다 싼 판매점이다. 하지만 가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혹하기는 한테 투덜투덜 대면서도 정작 손으로는 집지를 못하시는 게다. 아들네미 입장에서는 익히 봐 온 광경이다. 넥타이 하나라도 공짜로 얻어와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 이런데서 옷을 사실리가 있나. 양복도 구로공단 공장에서 떼어다 사다 입으시는 양반인데.

그렇게 옷 매장을 떠나서 식료품을 사러 가려는 도중. 마지막 매대에서 덕다운을 하나 보고 호기심이 동하셨는지 살짝 만져보신다. 등산객 사이에서는 꽤 잘 알려진 브랜드다. 가볍고, 따듯한 산행용 다운. 내가 가격표를 슬쩍 본다.
헉, 아까 것보다 0이 하나 더 붙어있다. 슬쩍 아버지 얼굴을 보니 아버지도 가격표가 영 마음에 안 드셨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계셨건만, 여전히 슬쩍슬쩍 옷 하나를 들춰보고 계신다.

"한 번 입어보세요."

한번 걸쳐보시더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좋으신 모양이다. 

"그냥 그거 사죠. 몇 벌 안 남았는데."

"비싸지 않냐?"

"백화점에서는 더 비싸요. 나름대로 알려진 브랜든데."

한참을 고민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시고 주섬주섬 다운을 접어서 카트에 실으신다. 아까 옷들보다 확연히 비싸다. 십만원을 넘었다. 당신도 종내 그것이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이다. 행여 맘이 바뀔세라. 난 카트를 몰고 식료품점으로 부리나케 달렸고, 아버지도 천천히 나를 따라 식료품점으로 내려간다.

갑자기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내가 살다가 이렇게 비싼 옷을 사 보네."

20만원도 안 되는 다운.
갑자기 코 끝이 알싸해지는데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돈이 없는 양반도 아니면서. 슬쩍 쳐다보는데 아버지는 다운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어지간히 맘에 드시는 모양이다. 부전자전, 나도 옷에 돈 쓰지 않는다만 아버지만 하랴. 나이가 들면 따듯한거 입는게 낫다고 어리버리 대충 아버지가 듣는지 내 혼잣말인지 중얼거리면서 난 카트를 끈다. 아q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물을 어디서 파는지 찾으러 돌아다니신다. 없으면 안 쓰면 되는거다. 내가 저 말을 몇번이나 들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가. 그래, 없으면 안 쓰면 되는거지. 단단한 땅에 물이 괴는거지. 못 벌어도 쓰지 않으면 되고, 쓰지 않으면 모이는거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당신을 위해 쓰시면 안 되려나. 자식의 부족함이 참 이렇게 한심스럽게 다가올 수가 있는가. 그래도 아버지는 종내 별 말은 안 한다. 그냥 비싸고 좋은 옷을 하나 구입하신게다.

생애 처음으로 아들이랑 같이 간 쇼핑에서 가장 비싼 옷을.

아버지 다운. 
Posted by 荊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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